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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인내, 동참과 기다림 na kim 2015-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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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10. 21.                                   초대교회 수요 성경 공부 - SLOW CHURCH

 

* : 고린도전서 13 4-7 말씀

* : 6. 인내, 동참과 기다림

 

              어제 가까운 귀니드 양로원에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갔습니다.  때마다, 함께 예배드릴 때마다 마음에 작은 하나가 얹히는 기분이 듭니다.  어제는 그랬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한분씩 휠체어를 밀어서 방으로 모셔드리고 있었습니다.  거의 모셔다 드리고 3, 4분의 어르신들 밖에 남아 있지 않을 때였습니다.  어느 할머니의 휠체어 손잡이를 잡았는데, 누군가 뒤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돌아보니 뒤쪽 소파에 처음 보는 할머니 분이 저를 보고 손짓을 하고 있었습니다.  “예? 어머니 그러세요?  할머니는 아주 반갑게 웃는 얼굴로 “이리 와서 앉아봐... 그런데 며느리는 안왔어?”라고 물으셨습니다.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몰랐습니다.  “며느리는 어디다 두고 혼자 게야?  ... 아마도 치매가 있으신 했습니다.  “여기 앉아봐... 앉아보라니까.... 할머니는 자꾸 손을 잡으시려고 했습니다.  “할머니, 할머니 모셔다 드리고 다시 돌아올께요.  생각 없이 제가 잡고 있던 휠체어를 밀고 방으로 모셔다드렸습니다.  그리고 돌아왔더니 다른 봉사자들이 남은 할머니들을 모셔다 드린 후였습니다.  결국 저는 할머니 옆자리에 앉지 못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계속 마음 구석이 무거웠습니다. ‘잠시 옆에 앉았다면 좋았을텐데....  ‘손이라도 잡아드릴 ....  이런 저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시간이 정말 같이 빠르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시간의 흐름이 멈춰버린 사람들도 있습니다. 때의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고통과 상처 속에 사는 사람들이 있고, 잊혀지지 않기 위하여, 잊지 않기 위하여 애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할머니와 같은 정지된 시간에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기억이 정지되고 삶도 정지되었습니다.  이상 새로운 삶의 계획과 기억의 시간을 만들 없습니다.  할머니에게 매일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할머니가 손바닥으로 두드리며 앉으라고 권하시는 자리에 며느리와 아들, 손주와 손주 며느리가 앉아줄까요?  할머니는 그들을 기억하고 행복해질 있을까요?  그런 사람들을 스쳐 지나가면서 마치 나는 문제가 없는 것처럼, 내가 가진 시간을 빨라야 하고 효과적이어야 하며 잠시 멈추면 손해라도 나는 것처럼 우리는 빨리 빨리 많은 일들을 소화하며 살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살고 있는 주변을 돌아보십시오.  즉각적이고 빠른 만족을 위한 많은 도구들이 있습니다.  부엌에는 분만에 음식을 데워주는 전자레인지가 있고, 음식들을 항상 신선하게 보관하고 언제든지 바로 꺼내먹을 있도록 준비해주는 냉장고가 있고, 설거지거리를 빨리 처리해주는 식기 세척기가 있는가 하면, 빨래를 쉽고 빠르게 세척 건조해주는 세탁기가 있습니다.  수세식 변소가 생활에 주는 편리함을 말로 다할 없습니다.  T.V. 수많은 정보와 재미를 안까지 부지런히 날라주고, 스마트폰과 컴퓨터는 내가 앉은 곳에서 이전에 하루 종일 도서관을 뒤져도 찾을 없는 정보들을 검색할 있도록 해줍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우리의 삶은 윤택하고 행복하고 가치있게 되었습니까?  

 

1. 노동, 하나님의 은혜

 

              18세기 후반 영국에서 일어난 산업혁명은 생산 방식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공했습니다.  사람이나 가축의 힘을 사용하던 생산공정이 기계를 사용하는 방식으로 전환되었습니다.  분업화와 단순 노동화가 이루어졌습니다.  사람들은 같은 시간에 비교할 없는 생산물을 만들어낼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산업혁명 이후의 사람들은 이전보다 여유롭고 사람다운 삶을 있었을까요?  오늘날 생산력은 인류의 역사상 가장 크게 발전해 있지만 우리의 삶을 날로 바쁘고 복잡해졌습니다.  일하는 시간이 줄고 생산하는 능력은 커졌지만 남은 시간이 우리에게 별로 유익하지 않습니다.  여유 있고 생산적인 휴식이 아닌 수많은 정보와 지식, 만들어진 필요와 관계 속에서 우리는 피곤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고 노동할 있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인간의 노동은 하나님이 우리에 대해 행하신 창조행위를 모방하는, 하나님의 형상을 가장 많이 닮은 행위입니다. 인간은 노동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아니라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창조에 동참하게 됩니다.  그런데 기계 문명이 발달하면서 발생하는 중요한 긴장 중에 하나는 노동이 이상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전하는 통로가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노동이란 생산을 위해 일정한 시간과 고통을 견디는 과정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제 우리는 과정이 생략된 결과에 이미 익숙합니다.  이것을 우리는 fast라는 말로 미화합니다.  이상 노동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와 복이 아닙니다.  노동이 은혜요 복일 때는 과정을 통해서 얻는 결과 또한 하나님의 것이요 그것은 창조적 소비가 되어 하나님의 현재적 창조에 동참하는 과정이 됩니다.  하지만 생산 자체가 목적이 되고 노동이 수단이 , 우리는 생산 과정의 부분을 담당하는 기계와 같은 역할을 하게 됩니다.  노동의 기쁨이 사라지고 창조적인 노동과 소비는 멀어집니다.

 

              어제 양로원에서의 일을 생각하게 됩니다.  제가 해야 일은 휠체어 하나를 끌고 빨리 여러 할머니들을 방으로 모셔다 드리는 일이 아니었는지도 모릅니다.  많이, 빨리 일하려는 유혹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의 마음과 시선으로 주변을 있기를 바랍니다.

 

2. 긍휼, 정지된 삶을 향한 마음

 

              타인의 고통에 동참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 시대 문화의 최고의 미덕은 생산성, 효율성, 속도입니다.  이것들은 우리가 가던 길을 멈춰 서서 고통 받는 자와 함께 하며 우는 자와 함께 우는 것을 바보스런 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차라리 그들에게 얼마를 던져주고 우리는 가던 길을 가는 것이 낫지 않느냐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멈춰 서서 그들 곁에 앉거나 천천히 걸으며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우리의 ‘빠르고 효과적인 생산’을 방해해는 일로 생각합니다.  해야 일이 많기 때문에 함께 있지 못하게 됩니다. 

 

              요즘 상담 프로그램에서 가장 많이 다루는 이슈는 ‘성인 아이’라는 개념입니다.  ‘성인아이’란 신체는 이미 성장했지만 감정표현의 방법은 어린아이 수준에 머물러 있어서 어른이 뒤에 인간관계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런 경우 어린 시절에 감당할 없는 고통의 기억이나 순간들이 정서적인 성장을 가로막아서 감성이나 이성의 어떤 부분이 성장하지 못하고 이후 어른이 되어서도 여전히 어린 아이의 정서적 반응을 보이기도 합니다.  이런 일이 발생하는 것일까요?  어린 아이가 삶의 흐름 속에서 만난 충격과 문제를 그저 시간의 흐름에 맡겨 버렸기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어린 아이의 상처와 아픔의 시간에 멈추어 서서 함께 이야기하고 손을 잡고 고통의 기억으로부터 걸어 나올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현대사회는 그렇지 않습니다.  과거 수많은 관계가 대가족 속에 있어서 누군가 사람은 나에 대해 주목해주고 이야기해주던 시절에서 이제는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나의 ‘정체됨’은 주목받지 못하거나 걸림이 뿐입니다.  심지어 자기 자신조차도 자신의 정체를 외면함으로서 자기 소외가 발생하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는 긍휼, compassion 마음이 필요합니다.  고통을 함께 해야 합니다.  빠르고 효율적인 삶에서 잠시 멈추어 서서 나의 시간과 마음이 필요한 사람은 없는지 살펴야 합니다.  교회는 세상의 시간에 살아가는 사람들 속에서 하나님의 시간으로 사는 법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시간 속에 하나님의 자신이 들어오셔서 하나님의 시간으로 사는 법을 삶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세상의 시간 속에서 하나님의 시간으로 사는 , 그것은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우리의 삶으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시간으로 들어오신 것처럼 우리 또한 우리의 걸음을 멈추고 이웃의 시간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하나님의 마음으로 이웃의 삶에 동참할 있는 믿음의 결단이 필요합니다.

 

3. 인내, 긍휼이 삶이 되는 방식

 

              인내에 대한 소극적이며 잘못된 방식의 이해가 있습니다.  고통을 그저 참아내는 , 견디는 것은 인내의 가장 소극적인 면에 불과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인내는 그것을 넘어섭니다.  성경은 사랑은 인내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언제나 발생하는 (고전 13:4)이며,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는(고전 13:7) 것입니다.  사랑과 관련한 인내는 ‘언제나 바라는 것과 믿는 것’이 있는 인내입니다.

 

              사람의 시간 속에서 하나님의 시간을 따라 살아가기, 이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시선이 있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 성공과 성취를 향해 달려갈 나는 나에게 다가오신 하나님의 마음으로 교회와 이웃에게 다가서야 합니다.  멈춰진 시간이 속에 눈물 흘리고 고통당하는 사람들에게 다가서서 하나님의 시간을 나눌 있어야 합니다.  긍휼의 사역, 고통을 함께 나누는 사역에는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인내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마음은 단순히 고통을 견디는 것이 아니라 목적이 있는 인내, 소망이 있는 인내입니다.  하나님의 시간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줄로 믿는 믿음과 형통함에 대한 소망입니다. 

 

              인내 없이 긍휼함이 실천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긍휼에 동참할 있습니다.  자비하심에 동참할 있습니다.  하지만 계속되고 반복되는 긍휼과 자비의 사역은 참으로 힘든 일입니다.  견디고 지나가는 인내는 감당할 수밖에 없는 수동적인 것이라면 믿고 바라는 인내는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자비하심의 사역에 능동적으로 동참하는 것입니다.  긍휼과 자비의 대상이 가진 가치와 관련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그들의 가치를 따라 긍휼과 자비의 사역을 계속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간과 뜻을 따라 인내하며 동참하는 것입니다.

 

4. 지역교회의 긍휼과 인내의 사역

 

              테네시 동부에 있는 교회는 1989 특별한 크리스마스를 맞이했습니다.  화려한 성탄 전야제를 준비하고 있을 교회 맞은 10 건물에서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건물은 도시에게 가장 건물이었고, 저소득층 주민들과 노인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16명이 죽고 수많은 사람들이 다쳤습니다.  교회는 소방대와 구조대를 위한 본부가 되었고, 부상자를 분류하는 병원이 되었으며, 임시 시체 보관소가 되기도 했습니다.  교회의 목회자는 사건 이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두말할 필요 없이 정말 충격적인 성탄 이브였습니다.  하지만 사건은 장기적인 측면에서 교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교회가 이웃들에게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종종 우리의 관심은 세상의 아름다움에 쏠립니다.  하지만 어떤 때는 처참한 현실이 우리의 발걸음을 멈추게 합니다.  그전까지만 해도 대다수의 성도들은 우리 교회 맞은 건물에 사는 사람들에 대해 거의 관심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교회는 바로 맞은 편에서 오랫동안 무시를 당했던 사람들에게 좋은 이웃이 되는 여러 가지 방법들을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도심을 벗어나서 교외 지역으로 이전하자는 논의가 있었지만, 결국 존슨 시의 도심에 남아서 자리를 지키기로 결정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그곳에 자리를 잡게 데에는 어떤 이유가 있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남기로 했습니다.

 

              지역 교회는 인내하시는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들의 삶이 단련되는 대장간과도 같습니다.  각자가, 그리고 교회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이르기까지( 4:13) 성장하기 위해 오랜 시간 지역, 교회에 머물면서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며 서로 긍휼을 베풀며 인내하기를 반복해야 합니다.  인내는 믿음의 지체들을 찢어놓는 여러 가지 세상적 사건 속에서 교회를 하나로 만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어려운 일들을 만날 걸음 물러서서 감정을 정리하고 걸음 다가서서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어려운 시간을 만날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 안에 존재하는 관계의 고통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연약함 속에 사역의 자리를 발견해야 합니다.  잠시가 아니라 목적이 있는 인내의 시간을 통과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세상을 살면서 고통에 긍휼과 인내의 사역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하나님의 시간으로 들어가는 법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자리를 토닥이며 옆에 앉아달라고 하던 할머니를 기억합니다.  자리는 여전히 비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자리이며, 우리에게 양도하신 자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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