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kings way 1. 춤추시는 하나님 | 이응도 | 2019-06-2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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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 수요예배 마가복음 King‘s Cross 1. 춤추시는 하나님 (막 1:1~13)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에서 철학을 가르치는 에밀 카이에(Emile Cailliet)는 ‘나를 이해하는 책’이라는 글에서 자신이 하나님을 만났던 경위를 소개합니다. 그는 청년시절 신과 종교에 대한 회의와 의심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세계 2차 대전이 발발하고 수많은 청년들이 전선에 투입되면서 그도 징집되었습니다. 옆에 있던 동료가 총에 맞아 죽고 그는 총상을 입습니다. “내가 인간의 상황을 얼마나 잘못 이해했는지 어처구니가 없었다. 친구가 가슴에 총알을 맞은 채 어머니 이야기를 하면서 눈앞에서 죽어 가는 마당에 철학적 논쟁이 다 무슨 소용인가?” 그는 총상을 입고 오랫동안 병원 신새를 지는 가운데 자신의 고민과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 글과 책에 대한 갈증이 생겼습니다. 닥치는 대로 읽었고, 마음에 닿는 글들을 노트에 기록했습니다. 훗날 자신의 고민 많은 청년의 시기를 풍요롭게 했던 이 글들로 다른 청년들을 위로하는 책을 만들리라고 생각하면서 그는 세상의 수많은 좋은 말들을 기록하고 또 기록했습니다. 많은 시간이 흘렀고 노트도 두터워졌습니다. 하루는 자신의 정원 나무 그늘에 앉아서 그동안 자신이 기록했던 것들을 살펴봤습니다. 마음이 답답해졌습니다. 그 시기, 자신의 고민했던 시간의 골목마다 자신을 위로했던 말들은 그 다음 골목에서는 다시 꽉 막힌 벽이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나를 이해했던 그들은 다른 상황에서는 나를 힘들게 했습니다. 그가 답답한 마음에 낙심하고 있을 때 그의 아내가 길에서 만난 한 목회자에게서 받았다며 책을 한권 내밀었습니다. 프랑스어로 번역된 성경이었습니다. 그는 복음서에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에 대해 설명하는 글을 읽으면서 자신의 마음을 꽉 막히게 했던 모든 갈증과 고통이 해결되는 경험을 합니다. 사람이 사람의 삶을 설명하는 책이 아니라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이 사람에 대한 사랑을 보여주는 책이 자신의 실존과 삶의 목적을 이해하는데 가장 큰 도움을 주는 책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고백합니다. 1. 이야기를 시작하시는 하나님 마가는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표현 하나를 쓰고 있습니다. 1장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어디서 많이 들어본 표현 아닙니까? 마태복음 16:16에서 베드로는 이렇게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이 두 구절이 서로 내용으로 닮지 않았습니까? 마가는 서술로, 베드로는 선언으로 표현했지만 두 표현은 모두 같은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그리스도, 즉 메시야입니다. 둘째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베드로의 제자였던 마가는 베드로의 구술을 따라 성경을 기록했고, 베드로는 자신이 예수님 앞에서 고백했던 일과 칭찬받았던 일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가장 아름다운 신앙의 고백이었고, 예수님에 대한 가장 완전한 표현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에밀 카미에가 그랬던 것처럼 사람의 사람에 대한 이야기는 곧 한계를 만나고 벽을 만납니다. 그러나 사람에게 들려주는 하나님의 이야기는 사람에게 복음이 됩니다, 구원의 은혜가 됩니다. 헤아릴 수 없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이야기하는데 그 이야기를 통해서 사람이 가장 잘 이해됩니다. 하나님께서 마가복음을 통해서 우리를 이해하시며 도우시며 구원하십니다. 2. 주의 길(King's Cross)을 예비하다. King's Cross라는 기차역이 있습니다. 영국 런던에 있는 가장 큰 기차역이면서 해리포터에서 마법학교 호그와트로 가는 관문이 있는 역이기도 합니다. 팀 켈러 목사는 자신의 교회에서 마가복음을 강의하면서 마가복음 전체의 주제를 ‘King's Cross’라고 말했습니다. 이 뜻은 왕이 지나간 교차로이면서 왕이 지고 간 십자가일 수 있습니다. 마가는 예수님에 대한 표현을 하고 난 다음 바로 세례 요한에 대해 말합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이 가야 할 길을 예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들을 보내시면서 “요한이 너의 길을 준비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을 것인데 “너희는 주의 길을 예배하라. 그의 길을 곧게 하라”고 말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광야의 외치는 자는 세례요한이요, 준비된 길을 갈 왕은 예수님입니다. 왕이 걸어간 길, 어떤 길일까요? 복음서가 기록될 당시에는 로마의 황제가 다니는 길이 있었습니다. 모든 성에는 그 나라를 다스리는 왕이 가는 영광의 길이 있었습니다. 아마도 세례요한이 메시야의 길을 예배한다고 할 때 모든 사람들이 상상하는 길은 로마의 황제보다 더 영광스럽고 아름다운 길이었을 겁니다. 하늘의 천군 천사가 호위하고 세상의 모든 영광보다 뛰어난 길을 상상하게 됩니다. 하지만 요한이 준비하는 메시야의 길은 그런 길이 아니었습니다. 그 길은 준비하는 요한 자신도 그런 길 위에서 자신의 삶을 발견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자신에게 세례를 받기 위해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향해 외칩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 요한을 통해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메시야의 길, 만왕의 왕의 길은 ‘어린 양’이 걷는 길입니다. 그 어린 양은 세상의 죄를 지고 있습니다. 희생의 제물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계시록에서는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그들을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노릇 하리로다 하더라.”(계5:9-10)라고 했습니다. 요한을 통해 선포되었고, 복음서를 통해 설명되는 왕의 길은 단순한 교차로(cross) 가 아닌 ‘십자가의 길’입니다. 만왕의 왕이 우리의 모든 죄를 담당하시고 구원하시기 위해 걸어가신 길 위에서 우리가 그 왕을 만납니다. 3. 춤추시는 하나님 복음서에서 3위 하나님이 함께 등장하는 장면이 두 번 있습니다. 그 중 첫 번째 장면이 본문 10-11절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곧 물에서 올라오실 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막 1:10-11) 성자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고 성령 하나님이 비둘기 같이 임하셨습니다. 성부 하나님은 아들을 축복하시고 기뻐하십니다. 왕의 길의 출발에 서 있는 성자 하나님을 성령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성부 하나님이 축복하는, 인류의 역사에 허락된 가장 아름다운 장면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구속의 사역이 삼위 하나님의 협력의 결과이며 작품임을 증거합니다. 성령 하나님을 비둘기로 비유하는 것은 지금 우리들에게는 이미 익숙하지만 2000년 유대 사회에서는 다소 생소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이렇게 부드럽게 표현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마가 시대에 유대인들이 읽던 아람어 구약 성경인 탈굼역에서는 창세기 1장 2절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은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비둘기’처럼 수면 위로 훨훨 날아다니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마가는, 혹은 마가에게 복음을 구술했던 베드로는 아마도 그들이 어렸을 때부터 읽었던 창세기를 기억하면서 성령 하나님의 임재를 비둘기가 훨훨 나는 것처럼 표현했을 것입니다. C.S. Lewis는 이 장면을 해석하면서 “기독교의 하나님은 정적인 분이 아니다. 역동적이고 활기찬 생명이시다. 마치 드라마와도 같다. 불경한 표현이라고 말할지 모르겠지만 하나님은 마치 ‘춤꾼’(dancer)과도 같은 분이시다”라고 했습니다. 물에서 나오시는 맑은 예수님과 성령 하나님이 비둘기처럼 날아오시는 장면, 그리고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춤추시는 하나님’으로 묘사한 것입니다. 그는 계속 이 장면을 해석하기를 “이것이 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삼위 하나님의 춤, 드라마, 삶의 패턴이 우리들 각자의 삶에도 그대로 나타나야 하기 때문이다. 기쁨과 능력, 평안과 영생은 실재의 중심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와 아름다움의 거대한 샘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는 삼위 하나님의 협력과 하나 되심, 그리고 서로의 사역을 기뻐하고 영광되게 하심을 통하여 교회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봅니다. 자기중심적이고 자기만족적인 사랑이 아니라 ‘서로에게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을 통해서 서로의 기쁨이 되고 있습니다. 요단 강가에서 삼위 하나님의 어우러짐과 춤이 보이십니까? 그 춤사위 속에 우리도 있습니까? 우리도 하나님의 춤 안으로 들어가 있습니까? 희생하고 협력하고 영광스럽게 하는 아름다운 어우러짐 속에 있습니까? 하나님은 요단 강변에서 가장 아름다운 춤으로 우리들을 초대하고 있습니다. 4. 세상의 시작, 구원의 시작 춤추시는 하나님, 영광받으시고 기뻐하시는 하나님은 이미 창조의 때에 등장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을 지으실 때 기뻐하시고 영광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의 기쁨과 영광이 인류의 죄와 악으로 가려졌을 때 하나님은 스스로 이 땅에 내려오셔서 기쁨과 영광을 회복하십니다. 스스로를 ‘우리가’(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창 1:26)라고 표현하셨던 삼위 하나님이 기쁨과 영광으로 추셨던 아름다운 춤을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면서 교회와 함께, 성도와 함께 춤추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본문 12-13절은 우리의 현실이 마냥 즐거운 춤과 기쁨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광야에서 사십 일을 계시면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천사들이 수종들더라”(막 1:12-13) 하나님은 마가복음을 통해서 창조의 역사와 구속의 역사가 같은 맥락 가운데 있음을 보여주십니다. 먼저 창세기와 마가복음은 하나님의 기쁨과 영광을 증거합니다. 하나님이 춤추십니다. 그런데 그 춤이 오래가지 않습니다. 시험과 유혹이 있습니다. 스스로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스스로 시험과 유혹으로 들어가십니다. 그 결과는 다릅니다. 창세기에서 인류는 타락합니다. 마가복음에서 새로운 구원의 역사가 시작될 때 두 번째 아담이신 예수님은 사탄의 시험과 유혹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기십니다. 타락 이후에 모든 들짐승은 사람의 적이 되었습니다. 사람을 해치거나 사람에게 해침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시험을 받으신 후에 들짐승들과 함께 있고, 또한 천사와 함께 있습니다. 완전한 평화가 임했음을 증거합니다. 구원자이자 두 번째 아담으로 오신 예수님은 인류가 가야 할 길을 먼저 걸어가셨습니다. King's way는 곧 죽임 당하신 어린 양이 걸어가는 King's cross였습니다. 사람들이 걷는 길이 아닌, 사람들이 걷는 길과 교차하는 하나님의 길, 구원자의 길이었습니다. 주님께서 먼저 그 길을 걸으시면서 그 길 위에서 “나와 함께 이 길을 가자! 종의 길이 아닌 왕의 길을 가자!”며 우리를 부르십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신의 십자가를 지는 사람 - 이 세상을 살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으며 사는 사람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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