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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king's way 2. 종교와 복음 이응도 2019-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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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 수요예배 마가복음 King‘s Cross

 

2. 종교와 복음 (1:14~15)

 

흔히 기독교를 세계 3대 종교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4대 위인으로 설명하는 책도 있습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우리가 믿는 신앙은 종교(宗敎), 즉 가장 높고 위한 가르침입니까? 신앙을 종교라고 보는 것은 그것이 가르치고 교훈하는 바가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보다 나은 삶을 향한 선택의 가능성이 모든 사람에게 있고, 그것을 위한 고민과 연구의 결과가 고결한 가르침으로서의 종교로 형성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마가복음의 본문이 말하는 복음과 세상에 만연한 종교는 그 본질이 다릅니다. 비교의 대상도 아닙니다. 신앙 밖에서는 비교종교학등으로 각 신앙의 체계를 비교하고 분석하려 하지만 성경은 여타 종교의 경전과 비교할 수 없고, 신앙은 종교의 영역으로 해석할 수 없습니다.

 

복음으로 번역되는 성경의 헬라어 원문은 유앙겔리온’(Euangelion)입니다. 소식을 전한다는 뜻의 앙겔리온’(Angelion)과 기쁨을 뜻하는 접두사 ’(Eu)가 결합된 말입니다. 뜻은 기쁨을 주는 소식이라는 뜻입니다. 마가가 성경을 기록하던 당시 유앙겔리온이라는 단어는 이미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 당시의 고대 로마의 비문에는 이런 글이 있습니다. 가이사 아구스도의 유앙겔리온‘(복음)의 시작이다.’ 이 비석에 쓰인 문장은 로마의 황제였던 아구스도의 탄생과 즉위, 통치의 과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설명의 시작을 유앙겔리온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이 단어가 사용되는 곳은 또 있습니다. 예를 들어 황제 대관식이나 큰 전쟁에서의 승리했을 때도 유앙겔리온을 사용했습니다. 그들이 유앙겔리온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을 때 그것은 역사적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큰 일이 발생했다는 사실을 의미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마가복음을 기록하면서 쓰면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유앙겔리온의 시작이라”(1:1)고 선언한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그리스도로 이 땅에 오신 것은 역사의 새로운 시작이다라는 선언입니다.

 

1. ‘소식’(news)'조언‘(advice)

 

대부분 종교의 본질은 보다 가치있고 나은 삶을 위한 지혜의 조언입니다. 욕심을 버리고, 참고 인내하며, 서로를 돕고 평안을 누리며 한 평생 공존하며 살자는 것입니다. 심지어 신과의 영적 교제를 위해서는 이러저러한 과정을 거치는 것이 좋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다양한 역사적 상황을 따라 다양한 종교가 발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가진 믿음은 그것과는 다릅니다. 믿음은 기쁘고 새로운 소식, 유앙겔리온으로부터 출발했습니다. 그 소식이 우리의 삶을 바꾸고 인류의 역사를 바꾸었습니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복된 소식의 시작이다는 것이 마가복음의 첫 구절이며, 마가복음 전체의 내용입니다. 복음은 사람이 하나님께 가까이 나가기 위해서, 혹은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 어떻게 수련하고 연구하고 접근했는가를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람의 삶과 역사에 어떤 관심을 가지고 어떻게 개입하시는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첫 사역을 시작하시되 복음의 선포와 함께 하십니다.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1:15) 여기서 우리는 신앙의 본질을 발견합니다. 예수님이 전하시는 복음은 해석하고 이해하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고민하고 선택하고의 문제도 아닙니다. 로마의 황제가 선언하는 새로운 시대의 시작에 사람들은 순종할 뿐 설명이나 이해를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마가는 같은 논리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을 선언했고, 복음 앞에 회개와 믿음을 명령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시작되었습니다. 기쁘고 복된 뉴스(News)입니다. 새로운 시대가 열렸습니다. 이전의 삶을 버리고 새로운 삶으로 들어가는 것은 그 나라 백성에게 허락된 명령이면서 순종해야 할 의무입니다.

 

2. 부르심

 

마가복음 116-20절에는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시는 장면이 소개됩니다. 이미 예수님은 갈릴리 해변에서 유명한 사람이 되었고, 그들 또한 복음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그들을 부르시는 장면에는 무엇인가 새로운 것이 있습니다.

 

당시 유대문화에서는 선생이 제자를 모으는 일은 드물었습니다. 대부분 제자들이 스승을 찾아 헤매었고, 선택했습니다. 예를 들어 요한의 제자였던 안드레는 예수님을 찾아와서 진리를 물었습니다. 이런 경우 스승을 그를 제자(follower)로 인정하고 제자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이 스승을 선택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를 부르십니다.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예수님은 그들을 직접 부르셔서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부르심이 없이 따랐던, 아니 그들 스스로가 선택했던 많은 사람들은 결국 흩어지고 떠나갔습니다. 그들이 예수를 선택했던 이유가 사라졌을 때 그들은 예수를 버렸습니다. 이적과 기사가 그들의 마음을 유혹했지만 십자가는 그들의 마음에 의심과 실망을 심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부르시지 않으면 누구도 아무도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었습니다. 믿음은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복음의 부르심 앞에 주저하는 것도 용납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삶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이유로 복음의 부르심 앞에 주저합니다.

 

예를 들어 부친의 장례 때문에 예수님을 따르는 일을 주저하는 제자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죽은 자에게 죽은 자를 장례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8:21-22, 9:59-60)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난해한 구절로 받아들여집니다. 만일 우리가 믿는 신앙이 종교, 합리적인 조언의 수준이라면 예수님의 이 말씀은 비윤리적인 대답으로 비난받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를 제자로 부르신 예수님은 생명과 구원의 말씀을 주시는 분입니다. 말씀을 자세하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유대인의 장례를 일반적으로 하루를 넘기지 않습니다. 시신에서 육체가 모두 썩으면, 뼈를 모아 석골함(Ossuary)에 담습니다. 뼈를 석골함에 담는 날은 슬픔에 잠겨 있지만 그러나 다음날은 기뻐합니다. 기뻐하는 이유는 죽은 자가 율법을 지켜야 하는 모든 의무로부터 놓임을 받았다고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죽은 자를 위한 장례의 마지막 절차는 죽은 지 1년 쯤 되는 때, 뼈를 모아 석골함에 담는 의식입니다. 이 장례 절차를 오실레기엄’(ossilegium) 또는 두 번째 장사’ (secondary burial)라 부릅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이런 유대인의 장례 관습에 따라 장사 지낸 당일부터 두 번째 장사가 있기 전까지의 필요한 시간을 요청한 것입니다. 이것은 짧게는 몇 일에서 길게는 10개월이나 걸리는 긴 시간이었습니다. 그는 지금 유대의 전통을 지킬 것인가 예수님의 복음을 따를 것인가의 기로에 서 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의 전통을 생명처럼 지키는 자들에게 지키라고 하고 너는 나의 복음을 따르라고 권면하셨습니다. 복음의 부르심에 순종으로 응답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3. 권위

 

복음은 조언이 아닌 명령입니다. 왕이 임했고 새로운 세상이 열렸습니다. 왕의 권위가 선포된 말씀에 충만합니다. 마가복음 121-22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 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가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1:21-22)

 

왜 마가는 예수님의 권위를 서기관들과 비교할까요? authority라는 말은 author와 관련이 있고, author의 어원은 original과 같습니다. 즉 작가는 자신의 생각으로 이야기를 원래 창조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에게 원래의 근본적인 권위가 있습니다. 그런데 서기관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빼껴 쓰는 사람들입니다. 자신의 말이 아닌 기록된 말을 쓰고 또 씁니다. 많이 아는 것 같아도 자신의 것은 아니고, 가르치고 교훈해도 자신의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가 있고, 서기관과 같지 않다는 말은 아주 중요한 표현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것에서 사람들이 하나님을 느끼고 있다는 말입니다. “뭔가 오리지널의 향기가 난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신앙과 삶에서 우리가 copy하는 사람들이 아닌 오리지널의 향기를 뿜는 사람들로 살 수 있을까요? 예수님이니까 그렇지...가 아니라, 우리의 신앙에서, 삶에서, 섬김과 헌신에게, 순종과 열정에서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을 증거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발견되었던 권위는 예수님의 삶에서 바로 증명됩니다.

 

4. 증명

 

123-26절에서 예수님은 회당에서 귀신들린 사람을 고치십니다. 23절을 보시면 귀신들린 사람이 예수님을 견디지 못하고 먼저 소리쳤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더러운 귀신을 그 사람에게서 나가게 하십니다. 그가 고침을 받았습니다. 성경은 사람들의 반응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다 놀라 서로 물어 이르되 이는 어찜이냐 권위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에게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1:27) 더러운 귀신도, 사람도, 세상 만물도 예수님의 권위 앞에 복종합니다. 129-31절에는 시몬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시는 사건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이신 주님은 말씀에만 권위가 있는 것이 아니라 피조 세계 모두를 다스리시는 능력과 권위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주장하고 선언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능력으로 증명하십니다. 십자가 사건 또한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말씀이 육신이 되는데서 나옵니다. 섬김과 낮아짐을 가르치시고 예수님은 그 말씀대로 십자가를 지십니다. 사랑과 희생을 말씀하시고 자신의 살을 찢고 피를 흘리십니다. 제자들에게 배와 그물과 가족을 버려두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은 먼저 하늘 보좌를 버리셨고, 아버지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자신을 낳은 어머니를 먼저 떠납니다. 말씀의 권위는 그 말씀을 육신으로 살아가는데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성도와 교회가 오리지널의 향기가 나는 삶을 살 수 있을까요? 복음으로 살고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예수님이 보여주셨습니다. 믿는 대로 살고, 복음이 인도하는 대로 살면 됩니다. 능력과 이적이 일어나고, 역사하심을 보게 될 것입니다. 주장하고 말하고 인정하고 설명하는 신앙이 아니라, 믿고 순종하며 헌신하는 사람에게 우리 주님은 오리지널의 향기를 허락하십니다. 우리 모두가 그 아름다운 향기로 살아갈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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