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king's way 3. 한걸음 더 깊이 | 이응도 | 2019-06-2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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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 수요예배 마가복음 King‘s Cross 3. ‘한 걸음 더 깊이’(막 2:1~12) 영화를 한 편 보고 있다고 상상을 해 봅시다. 주인공은 30세의 청년 예수입니다. 잘 생겼고, 말을 잘하고, 무엇보다 표정에서 넉넉한 자기 확신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라 다닙니다. 오늘의 무대는 갈릴리 호수의 서북쪽에 있는 ‘가버나움’이라는 도시입니다. 가버나움은 다메섹에서 지중해로 가는 길목에 있었고 사람들의 왕래가 많은 곳이었습니다. 로마의 세관이 있었고 유대인의 회당도 있었습니다. 문화와 종교가 섞이는 곳이고, 다양한 사연을 가진 인생들이 모여 사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청년 예수의 사역의 많은 부분이 이곳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베드로와 야고보, 안드레와 요한, 그리고 마태가 이곳에서 예수의 부르심을 받아서 제자가 되었습니다. 제자들을 데리고 길을 떠났던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으로 왔다는 소문이 들렸습니다. 사람들이 예수께서 머무는 집으로 몰려들었습니다. 숨 쉴 틈도 없이 빽빽하게 사람들이 들어찼습니다. 예수께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입가에 여전한 웃음과 낮지만 분명한 목소리로 하나님의 나라를 설명합니다. 1. 듣고 싶었을까? 그런데 카메라는 그들 중 한 사람에게 집중합니다. 그는 예수와 비슷한 나이의 청년입니다. 그는 지금 생각이 많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바리새인이었고, 자신의 신앙과 철학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예수라는 랍비가 나타나서 자신의 삶을 지키던 신념을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눈동자가 흔들리고 손이 자꾸만 움직입니다. 꿀꺽 침을 삼키고 손을 들어 질문을 하고 싶습니다. 카메라는 불안하게 보이는 그를 지나서 구석에서 사람들에 가려서 잘 보이지 않는 한 사람을 주목합니다. 그는 무척 더운데도 몸을 칭칭 감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에서 자신을 숨기고 싶은 사람입니다. 다만 그의 시선은 예수께 꽂혀 있습니다. 예수가 자신을 한번만이라도 봐주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카메라는 그를 지나서 왠지 화가 나 있는 한 사람을 주목합니다. 그는 이 지역에서 유명한 젤롯당원입니다. 목숨을 걸로 로마에 저항하고 유대의 독립에 헌신하고 있습니다. 그는 예수에게 좀 화가 났습니다. 예수 정도의 인기와 능력이라면 자신들의 지도자가 되어 유대의 독립을 쟁취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이제 저 뜬구름 잡는 것처럼 보이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이야기가 끝나면 이 땅에서 우리들이 속한 이 나라에 대한 예수의 입장을 물을 생각입니다. 만일 애매하게 대답하거나 조금이라도 로마의 편에 붙었다고 판단되면 지금 이 자리에서 끝장을 볼 생각입니다. 씩씩거리는 그를 지나서 카메라는 깔끔하게 차려입은 두 사람에게 주목합니다. 그들은 서기관들입니다. 평생을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는 일을 해왔습니다. 그들이 처음 예수에 대한 소식을 듣던 장면이 오버랩됩니다. 서기관이라면 다 아는 이야기입니다. 메시야가 올 것입니다. 베들레헴에서 나타날 것입니다. 군림하는 왕이 아니라 죽임당하는 희생의 제물로 오실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알지만... 모르는 바가 아니지만.... “에이... 설마~~”라는 마음이 많았습니다. 아무리 상상력을 동원해봐도 하나님의 아들, 만왕의 왕 메시아가 이 땅에 온다면 그런 모습일 리는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들의 눈앞에 있는 이 초라한 청년, 눈빛과 목소리 빼고는 그들과 별 다를 바가 없는 청년이 스스로 메시아라고 말합니다. 성경의 기록에 비추면 맞는 것 같고, 그들의 상식이 비추면 아닌 것 같습니다. ‘아.... 몰라, 몰라... 일단 무슨 말 하는지 들어나 보자. 혹시 트집 잡을 거 있으면 잡으면 되고.....’ 2. 말하고 싶었을까? 어쩌면 그들은 예수의 이야기를 듣고 싶은 것이 아닐지 모습니다. 오히려 하고 싶은 말들이 많은 사람들입니다. 그들 마음 깊은 곳, 삶의 밑바닥까지 섬세하고 깊게 뿌리내린 소원들은 그들의 삶의 모든 가지마다 소원의 꽃을 피우고 욕망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하늘에서 왔다는 메기야가 하는 말보다 그들의 삶에 뿌리내린 소원이 더 간절합니다. ‘언제쯤 예수의 말이 끝나고 나에게 소원을 물어줄까?’ ‘언제쯤 예수는 우리의 욕망의 기수가 되어 돌로 떡을 만들고, 욕망과 타협하는 왕이 되고, 하늘로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뜻이 아닌 땅에서 피어나는 사람들의 소원의 구주가 될까....?’ 그들은 모두 하고 싶은 말들을 만지작거리며 “여보시오, 예수! 내가 듣고 싶은 말은 그런 말이 아니라.... 바로 이런 것이오....!” 꿀떡꿀떡 이런 말들을 삼키며 예수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예수는 참 지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얼굴만 봐도 생각을 알고 보지 않고도 병을 고칩니다.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수백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텐데 예수는 여전히 ‘뜬구름’을 말하고 있습니다. 듣고 싶은 것이 아니라 말하고 싶어 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아직도 기회를 주지 않고 있습니다. 그때입니다. 카메라가 예수의 입에서, 청중들의 떨리는 시선으로, 그들의 꼼지락거리는 손으로 바삐 움직이고, 무엇인가를 암시하는 음악이 짠짠하고 흐릅니다. 사람들로 가득 차서 어둡던 집에 햇살이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지붕이 열리고 가버나움에서 유명한 한 중풍병자가 침상에 실려서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3. 참을 수 없어요. 영화는 갑자기 얼마 전에 있었던 일 하나를 회상합니다. 마가복음 1장에서 예수는 세례를 받았고, 제자들을 모았습니다. 회당에서 가르쳤습니다. 사람들은 놀랐지만 큰 주목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귀신들렸던 한 사람이 예수를 발견합니다. 그는 예수를 보고 떨다가 스스로 예수를 하나님의 이라고 고백합니다. 예수는 그 사람에게서 귀신을 쫓아냅니다. 오호... 사람들의 눈이 커지고 시선이 집중됩니다. 예수의 소문이 온 갈릴리에 퍼졌습니다.(1:28) 그리고 예수는 제자 베드로의 장모를 고칩니다. 사람들이 각종 질병에 걸린 사람들을 데리고 옵니다. 예수는 그들을 고칩니다. 여기에 주목할 표현이 하나 있습니다. “예수께서 각종 병이 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쫓으시되 귀신이 자기를 알므로 그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니라”(1:34)입니다. 어쩌면 귀신들린 사람들의 입을 통해서 예수가 메시야인 것을 전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일 수 있지 않을까요? 이미 효과를 본 것이 아닐까요? 그런데 예수는 귀신을 쫓아냈지만 그들의 입을 통해서 예수가 누구인지 전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귀신이 전하는 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그런가 하면 40절에는 한 나병환자를 고치십니다. 그리고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가서 네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고 네가 깨끗하게 되었으니 모세가 명한 것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하셨더라”(1:44) 그런데 그는 말을 참지 못합니다. 그는 온 동네에 자신이 어떻게 나은 것을 퍼뜨렸습니다. 그 결과는 45절에서 설명됩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나가서 이 일을 많이 전파하여 널리 퍼지게 하니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는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시고 오직 바깥 한적한 곳에 계셨으나...”(1:45) 예수님이 가버나움에 다시 들어가신 것은 일정한 기간 한적한 곳에 계신 후였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주목과 관심에서 오히려 멀어지려 한 것일까요? 카메라는 다시 예수를 주목합니다. 친구인 중풍병자를 침상이 실어서 지붕을 통해 내린 사람들.... 실은 그들은 예수의 말을 막았습니다. 1장에서의 귀신이나 나병환자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이 한 일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예수에 대한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가 하는 말을 막았습니다. 다른 하나는 사람들에 대한 것입니다. 그들은 모두 사람들의 관심을 예수의 말이 아닌 자신들의 삶의 문제와 소원에 집중시켰습니다. 중풍병자와 네 명의 친구는 다른 모든 사람들이 하고 싶었던 말을 대신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한 목소리로 외칩니다. “당신의 복음보다 우리의 소원이 더 중요합니다.” 성경은 예수가 그 친구들의 믿음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믿음만 보시고’라는 말이 맞습니다. 해결되지 않은 인생의 모든 문제가 주님 앞에서는 해결될 수 있다는 믿음 하나만 보신 겁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다소 뜬금없는 말씀을 주십니다.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했습니다. 중풍병자의 소원은 해결된 것일까요? 성경을 이것을 밝히지 않습니다. 지붕을 뚫고 중풍병자가 침상에 실려 내려올 때.... 다들 놀라기는 했지만 모두가 예상하는 결말이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다시 이적의 주인공이 되고, 의심과 적개심으로 가득 차 있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얼굴 시뻘건 패배였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오히려 사람들에게 시비거리를 안겨주십니다. 조금 전까지 하시던 ‘뜬구름’을 계속 이어 말씀하십니다. 4. 더 쉬운 것, 더 중요한 것 서기관들이 이 장면을 놓치지 않습니다. 지붕을 뚫고 내려온 간절한 소원 앞에 ‘죄 사함’을 말하다니.... 예수 당신은 사람들의 간절한 마음을 외면할 뿐만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죄 사함의 권위를 훔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라는 질문이 그들의 마음에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예수께서 원하시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는 꽤 논쟁적입니다. 그들에게 질문합니다.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2:9) 얼마 전까지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를 고친 예수의 능력에 비추어보면 중풍병자에게 일어나서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고 명령하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있습니다. 돌로 떡을 만드는 일도, 십자가에서 뛰어내려 로마와 유대권력을 심판하는 일도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소원을 들어주고 그들의 마음을 빼앗는 일도 쉽습니다. 하지만 예수는 그 쉬운 일을 하지 않겠다고 말씀합니다. 그것은 예수의 사역에 포함될 수 있으나 중요하지 않습니다. 1장에서 귀신이 소리치는 것, 나병환자가 소문을 낸 것 - 이 모든 것의 결과는 중풍병자가 지붕을 뚫고 내려오는 소동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의 소원의 강력함이 상식을 넘어서서 예수께 밀려오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받으시는 것은 그 소원을 들고 예수께 나오면 무엇인가 해결이 된다는 믿음의 한 부분입니다. 그러나 그 소원을 믿음과 등가치환(等價置換)하지 않으십니다. 예수께서 원하시는 믿음은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과 관련이 있고, 우리의 죄 사함과 관련이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논쟁을 일으키시고 그들에게 답을 주십니다.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2:10) 예수께서는 쉬운 길이 아닌 중요한 길을 선택하셨고, 그 길은 십자가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십자가에 반대하는 논리는 제자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 사역의 시작에서부터 제자들에게 교회를 맡기실 때까지 계속되었고, 오늘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우리 믿음의 뿌리는 어디에 있을까요? 우리의 기도는 무엇을 향하고 있을까요? 가버나움에서 찍힌 이 한편의 영화는 우리들에게 아주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오늘 교회의 타락과 성도의 부패는 믿음과 소원을 등가치환(等價置換)한데서 왔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복음을 심기를 원하셨고, 하나님 나라를 향한 거룩한 소망을 품기를 원하셨습니다. 우리의 믿음과 소망이 좀 더 깊은 곳으로 가야 합니다. 문제를 해결하고 사람에게 만족을 주는 일은 세상의 능력도 가능합니다. 돈과 지혜와 관계를 사용하면 대부분의 문제는 견딜만 한 수준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의 그 어떤 것도 복음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영원한 생명에 관한 복음은 세상에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복음이 나의 삶의 문제와 소원보다 조금 더 깊은 곳에 있습니다. 세상이 우리의 마음과 눈을 가리고 복음보다 소원에 집중하고 믿음보다 삶의 문제에 집중하게 할 때....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깊은 곳으로 가서 복음의 물길에 삶의 그물을 내릴 것을 권면하십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라고 말씀합니다. 함께 한 걸음 더 깊이, 한 걸음 더 가까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 다가서는 2019년을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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