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King's way 4. 종교가 아니라 복음 | 이응도 | 2019-06-2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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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 수요 예배 마가복음 King's Cross 4. 종교가 아닌 복음 영국의 유명한 설교자인 딕 루카스(Dick Lucas)가 설교 중에 이런 상상을 소개했습니다. 초대교회의 시대에 서로 이웃해서 살고 있는 초대교회의 한 성도와 로마사람의 대화입니다. “듣지 하니 종교를 가지고 있다고 하던데... 당신이 믿는 종교의 성전과 성지는 어디인가요?” “성지...? 성전...? 우리에게 그런 것이 따로 있지 않아요. 예수님이 우리의 성전이시지요.” “그러면 제사장은 어디서 제사를 하나요?” “제사장...? 없어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중재해야 할 제사장은 없어요. 예수님이 우리의 제사장이 되시기 때문이지요.” “제사장도 없다고요...? 그러면 제물은요? 희생 제물을 드려야 신의 은총이 임할 것 아닙니까?” “희생 제물도 없어요. 예수님이 우리의 희생의 제물이시고, 우리 자신을 드리면 되고....” 그러자 로마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에 뭐 이런 종교가 다 있어? 성전도 예수고, 제사장도 예수고, 제물도 예수라고....? 그런 신(神)이 어디 었어?” 그의 상상은 재미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허락된 복음의 핵심을 정확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사람이 만들고 교훈하는 종교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부름에 있습니다. 하늘에서 시작되었고, 예수 그리스도로 임했고, 우리가 믿고, 삶으로 살아갑니다. 1.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오늘 말씀은 2:15에서 3:6절까지의 세 가지 에피소드를 중심으로 나누려고 합니다. 그 중 첫 번째 이야기는 2:15-22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리였던 마태의 집에 들어가십니다. 당연히 마태와 동료들, 그리고 세관 주변에서 일하는 친분이 있는 사람들이 모였을 것입니다. 성경은 그들을 ‘죄인’이라 표현합니다. 바리새인의 서기관들 또한 “어찌하여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라고 말할 정도로 그 당시에는 그들을 ‘죄인’이라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죄인들 중에서 더욱 손가락질을 받던 마태를 제자로 삼으셨고, 그의 집에 들어가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당연히 바리세인들은 문제를 제기합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랍비라면, 더욱이 스스로를 메시아라고 선언하는 사람이라면 이렇게 더러운 죄인들과 함께 있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막 2:17) 예수님 앞에 아무도 자신의 의를 주장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이 율법을 수단으로 삼아서 스스로 의롭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을 죄인으로 손가락질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종교로 삼아서 다른 사람을 책망하고 스스로 교만해지는 사람들을 꾸짖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은 종교를 강화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선포하고 보여주는데 있었습니다. 아직 복음을 알지 못했던 요한의 제자들은 종교의 위험에서 벗어나서 바른 믿음을 위해 몸부림쳤지만 넘을 수 없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경건성을 유지하기 위한 방법으로 금식을 사용했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조차 자신의 의를 드러내는 수단이 될 뿐 복음 자체는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복음 앞에 모든 종교적 행위는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2.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두 번째 에 에피소드는 2:23-28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 대한 쉬운 오해는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주인이시기 때문에 아무 일이나 다 할 수 있다는 말씀으로 이해하는 것은 곤란합니다. 이 말씀은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다’는 말씀과 관련해서 이해해야 합니다. 안식은 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안식일법을 비롯한 율법을 주실 때 그 정신을 잘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애굽에서 종으로 살았던 역사를 청산하고 가장 아름다운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야 할 역사적 책무가 그들에게 있었습니다. 그들의 현실의 비루함과 그들에게 맡겨진 역사적 책무는 서로 잘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율법’을 주십니다. 예를 들어 안식과 관련한 모든 법은 ‘안식’에 대한 어떤 권리나 자유를 가진 적이 없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참으로 생소하고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비로소 하나님의 평안과 쉼을 삶으로 경험하는 순간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고 세운 나라에서는 일곱 날 중에 하루를 구별하여 하나님의 평안과 안식에 함께 들어갑니다. 예배하고 쉽니다. 안식년이 되면 토지가 쉬고 가축이 쉽니다. 부채가 탕감됩니다. 피곤했던 모든 삶의 조건들이 하나님이 정하신 자신의 자리를 찾아갑니다. 희년이 되면 모든 질서가 회복됩니다. 하나님의 창조적 질서의 회복을 상징하는 아름다운 사건을 인생이 최소한 한번은 경험하고 하나님 앞으로 부르심을 받도록 허락하신 것입니다. 율법은 사람을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탐욕과 폭력의 사슬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의 나라와 백성답게 살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율법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역사는 율법의 정신을 훼손합니다. 율법을 가치 없게 여겨서 잊고 살았던 이스라엘의 역사와 율법을 지나치게 강조해서 종교화했던 바리새인들은 다른 듯 같은 율법 정신의 왜곡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율법의 원래 정신을 새롭게 하고 있습니다. 3. 네 손을 내밀라! 세번째 에피소드는 3장 1-6의 말씀입니다. 안식일이었고 유대인의 회당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곳에서 선천적이었을 가능성이 많은 손이 오그라든 채 살아가는 한 사람을 만납니다. 선천적인 기형에 대한 유대인들의 판단은 심플했습니다. 모든 것은 죄와 관련이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 자신이나 그의 조상 중에 범했던 중대한 죄가 그의 손에 나타난 것으로 봤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그를 고치실 것인지를 주목했습니다. 죄인을 대하는 예수님의 태도는 율법을 대하는 태도와 관련이 있고, 마침 그곳은 안식일의 회당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을 아십니다. 그들에게 아주 중요한 질문을 던지십니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주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평안과 안식을 경험하고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가게 하고자 함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율법으로 사람을 정죄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가로막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묻습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막 3:4) 이것은 안식일에 어떤 일을 해야 하고 하면 안되고...라는 개념과 질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그들은 안식일 율법을 지키기 위해 하지 말아야 할 활동의 목록을 39가지나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손을 내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를 고치십니다. 성경은 사람들의 마음의 완악함에 대해 예수님께서 탄식하셨다고 했습니다. 율법은 결과적으로 그들을 악하게 만들고 말았습니다.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를 왜곡하고 있는 것이고, 하나님 아닌 다른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어리석음을 범했습니다. 손이 마르는 현상... 어려서부터 그 손을 가리려고 노력했을 것이고, 수치와 눈물의 이유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 손을 내밀라고 말씀하십니다. 손을 만지십니다. 손이 모든 연약함과 부족함에서 해방됩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이면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입니다. 주님 앞에 우리의 수치와 슬픔으로 나오는 일을 주저하지 않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면 좋겠습니다. 4. 바리새인들과 헤롯당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니라”(막 3:6) 이 한구절의 말씀은 많은 것을 의미합니다. 헤롯당은 정복자 로마의 하수인이자 잔혹한 왕이었던 헤롯을 따르는 무리들이었습니다. 로마는 한 국가를 정복하면 다른 민족의 통치자를 세워서 분할 통치를 했습니다. 정치적으로는 분열정책을, 문화적으로는 그리스 문화를 이식하는 것을 목표로 했습니다. 헤롯당은 로마의 이러한 정책에 이스라엘 민족 내부에서 부응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소위 시류(時流)에 편승할 줄 아는 사람들이었고, 어떻게 사는 것이 그 시대에 합당한지를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생각이 트인 사람들일 수 있습니다. 이미 나라는 망했고, 시대정신은 ‘로마’라는 말로 요약됩니다. 굳이 유대적인 전통과 신앙을 고수하기보다 유연하고 지혜로운 삶의 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입니다. 우리 민족의 과거 역사에도 같은 입장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친일 부역을 하고 신사참배를 해도 당당할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이 시류를 선택하는 논리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파는 그들의 반대됩니다. 그들은 로마의 정책과 문화에 저항했습니다. 구약 성경의 가르침과 전통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유대가 이방의 문화에 오염되지 않도록 정체성을 지키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들은 전통의 가치를 지키기를 원했고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삶을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 두 정파가 연합할 수 있었을까요? 그들에게 있는 수많은 차이를 이기는 같은 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같은 점은 바로 스스로 주인이 되는 삶에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과 전통을 지키는 과정을 통해서 자기의를 획득하고 스스로 만족한 삶을 살아가려 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이웃들이 경험하는 모든 아픔과 고통을 그들이 스스로 율법을 지키지 못한 결과입니다. 민족의 현실과 사회의 아픔은 그들에게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자신들이 율법을 지키며 거룩하게 살아서 만족을 얻으면 됩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율법과 전통은 그들 자신의 종교가 되었습니다. 헤롯당은 시대의 흐름이 그들의 신이 됩니다. 그들이 시대의 흐름을 선택한 이유는 자신들의 편안하고 안락한 삶에 있습니다. 자신들의 욕구와 필요를 만족시키는데는 그것만큼 좋은 논리가 없습니다. 결국 그들은 자기만족과 자기의의 큰 틀에서 서로 만납니다. “착한 사람은 복을 받고 나쁜 사람들은 벌을 받는다. 사람은 율법과 전통을 통해서 의로운 삶을 산다. 우리는 율법과 전통을 지키는 착한 사람들이다.” “생각이 트이고 시대를 아는 사람은 복을 받고 자기 생각을 고집하고 꽉 막힌 사람은 벌을 받는다. 우리는 열린 생각과 지혜로운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들이 왜 예수님 앞에 서로 연합하는지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전하시는 복음은 그들의 거짓된 논리를 깨뜨리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 논리를 이기지 못해서 연합하여 예수 죽일 일을 논의하게 됩니다. 결국 바리새인들과 서기관, 제사장의 무리들과 헤롯당, 그리고 젤롯당까지 연합해서 예수를 십자가에 매다는데 연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각자의 논리를 종교로 삼아서 한 시대를 살았던 그들이 복음 앞에서 그들의 무너지는 논리를 견딜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세 가지 에피소드로 우리를 만나주셨습니다. 복음으로 다가와서 우리의 손을 잡아주셨습니다. 주님에 내 손을, 내 마음을, 내 삶을 맡길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우리의 모든 마른 삶에 하나님 나라의 평강이 임할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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