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King's way - 6. 더 깊은 절망에서 기다리다 | 이응도 | 2019-06-2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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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 수요 예배 마가복음 King's Cross 6. 더 깊은 절망에서, 기다리다.(막 5:21-43) 성경에는 비슷한 이야기를 병행하거나 포함시켜 서술함으로 원래의 주제를 강화시시는 방식을 사용할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비슷한 내용의 천국 비유를 반복해서 사용하시는 것이나 같은 내용을 반복하는 시편의 구절들이나 오늘의 본문인 마가복음 5장의 상황이 그렇습니다. 왜 성경은 이 두 가지 사건을 함께 기록하고 있는 것일까요? 이 두 사건의 공통점과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실은 얼마 전에 S 집사님으로부터 전화 연락을 받았습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고 기도만 해주실 수 있냐고 물었습니다. 당연히 그렇겠다고 했습니다. 얼마 전에 정기 검진을 갔더니 암일 가능성이 많다고 정밀 검사를 받자고 했다는 겁니다. 검사를 받기로 한 날이 점점 다가오는데.... 잠을 이룰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자녀들의 문제와 다른 사람들의 문제에 대해서는 그렇게 담담하고 용기있게 대할 수 있었는데 정작 자신에게 그런 문제가 생겼다고 하니까 아무 것도 손에 잡히지가 않는다고 했습니다. 저는 기도하겠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한동안 고민에 빠졌습니다. 왜 불행은 한꺼번에 밀려오는가? 왜 고통은 반복되는가? 왜 어떤 사람, 혹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좀 편안한 삶을 살도록 허락하지 않으시는가? 다른 사람은 평생에 단 한 번도 경험하지 않을 고통과 고독의 시간을 왜 어떤 사람은 지속적이고 반복적으로 경험해야 하는가? 사실 그때가 변미숙 집사님의 회복을 위해서 기도하기 시작한 지가 얼마 되지 않았던 때여서 더 많이 고민이 되고.... 하나님께 화가 나기도 했습니다. 신앙으로 살고 계신 여러분! 한번 대답해주시겠습니까? 한 사람의 삶에 반복되는 고통이 다가오고, 시련과 시험이 집중되는 이유... 하나님의 뜻과 섭리... 과연 무엇일까요? 우리가 알 수 있을까요? 물론 변미숙 집사님은 투병 중에 있고, 또 다른 집사님은 간단한 수술만 하면 되는 것으로 판명이 났습니다. 다행이고 또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두 사건을 만납니다. 평생을 신앙으로 살았던 한 사람과 오랜 기간 질병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의 삶에 닥친 불행과 그들을 만나주시는 예수님을 통해서 한 걸음 고민의 깊이와 답을 향한 접근을 하고자 합니다. 1. 여인, 더 깊은 고통 성경은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먼저 소개합니다. 병이 들어 죽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는 아마도 레위인이었을 가능성이 많고, 오랫동안 유대교적인 전통에 익숙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가장 사랑하는 딸의 질병 앞에 그의 편견과 아집의 벽은 무너지고 맙니다. 내 딸을 죽음의 질병에서 구원할 수 있는 길은 예수 밖에 없다고 판단한 것 같습니다. 그는 예수의 발 앞에 엎드립니다. “회당장 중의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 아래 엎드리어 간곡히 구하여 이르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 하거늘”(막 5:22-23) 그의 행위가 믿음인 것은 그가 간구하는 방식과 내용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는 발 아래 엎드렸습니다. 완전한 복종과 헌신을 표현하는 행위입니다. 간곡히 구합니다. 딸이 죽게 되었다는 것, 그 위에 손을 얹어 달라는 것, 그래서 딸이 구원을 받아 살게 해 달라고 간청합니다. 예수님이 이 사건에 관심을 가지시는 이유와 성경이 이 사건을 기록하는 이유는 동일합니다. 예수님이 만났던 수많은 사람과 사건들, 성경이 모든 것을 기록하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반드시 필요한 사람과 사건을 기록하셔서 우리에게 믿음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구원을 얻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사건 또한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만으로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성경은 야이로의 딸에게로 가는 과정에서 또 한 사건을 소개합니다. 이 사건은 이렇게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아 온 한 여자가 있어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막 5:25-26) 여인이 처한 상황이 보이십니까? 열두 해를 당시로서는 원인을 알 수 없는 질병에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많은 의사에게 치료를 받으려고 했지만 오히려 괴로움만 받았습니다. 가진 것을 치료하는 일에 다 허비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병은 더 심각해졌습니다. 절망의 깊이가 더해지고 삶은 더 힘들어집니다. 그때 그녀의 마음에 들린 이름이 바로 ‘예수’였습니다. 예수를 만나면... 그를 만지기라도 할 수 있다면... 세상은 나를 비난하고 외면하지만 그는 혹시 나에게 은혜를 베풀까.... 실낫같은 희망을 품고 사람들을 헤치고 나와 예수의 옷깃을 만집니다. 소망을 만집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을 놓치지 않으셨습니다. 이 여인을 통해 주고자 하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녀에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막 5:34) 사람과 그들이 가진 능력이 세상을 지배하던 시대에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믿음이 사람의 모든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답이라는 사실을 말씀합니다. 인생의 깊은 고통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이 예수라는 사실을 세상은 그렇게 알게 됩니다.
2. 아버지, 더 깊은 절망 그 모든 일을 지켜보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안타깝습니다. 딸이 지금 죽어가고 있고, 분초가 급한데 누군가 예수님의 발걸음을 막고 있습니다. 평소에는 쳐다보지도 않을 사람입니다. 부정하고 가치없는 여인이 내 귀한 딸을 생명을 구하는 길을 가로막고 있다니.... 그런 여인과 대화하고 있는 예수님을 보면서 마음이 새까맣게 불타고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그에게 청천벽력같은 소식이 들려옵니다. 딸이 죽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의 발걸음은 더뎠고, 생명은 짧았습니다. 그 짧은 침묵의 시간.... 아버지의 무너지는 마음이 보이십니까? 그는 회당장이었지만 예수님에게 엎드린 사람입니다. 실낱같은 소망에 자신의 삶을 걸었던 사람입니다. 분노와 원망이 그를 사로잡았을 겁니다. 바로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조금 전에 무엇이라 말했는지 잊었느냐? 열두해를 혈루증으로 앓으면서 온갖 수치와 모멸의 시간을 보냈던 저 여인의 믿음이 구원의 열쇠가 되지 않았더냐? 너에게 믿음이 있느냐? 두려움과 염려가 아니라, 욕망과 필요가 아니라.... 믿음이 있느냐? 믿을 수 있겠느냐?” 예수님은 그를 데리고 집으로 들어갔고, 아이를 잔다 말씀하시고 손을 잡아 일으킵니다. 아이가 잠에서 깨듯 살아났습니다. 3. 예수님, 더 깊은 평안 질병과 죽음, 인류가 넘지 못하는 두 가지 벽입니다. 이 두 가지 앞에 마치 여인이 그랬던 것처럼, 야이로가 그랬던 것처럼 사람은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지식과 방법을 사용하고 시간과 노력을 소비하고 결국 절망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염려하고 두려워하며 걱정하고 분노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때마다 풍랑을 잔잔하게 하십니다. 파도보다 깊은 평안, 바다보다 넓은 평안으로 사람들을 위로하십니다. 그들에게 오직 하늘의 하나님과 연결되는 것만이 사람이 걸어야 할 길임을 늘 말씀하십니다. 질병과 가난에 허우적거리던 여인이 고침을 받습니다. 하지만 다시는 병들지 않는 몸을 가질 수 있을까요? 야이로의 딸은 다시는 병들지 않고 죽지 않았을까요? 살아나고 결국은 죽게 될 것이요, 고침을 받아도 다시 병이 들 것입니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있다는 사실이며, 예수가 그들 안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이 구원받은 백성으로 산다는 것은 변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이라는 바다 위에 구원의 배를 띄우시는 분입니다. 믿음이 그들을 구원한다는 단순하고 분명한 진리를 전하고 그들을 평안으로 위로하십니다. 4. 그러므로, 믿음과 기다림 그러므로 세상 속에 사는 성도와 교회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하나는 믿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믿음으로 인내하는 것입니다. 병은 깊어지고 재물은 사라지고 사람들은 떠나고... 나는 이제 살 가치가 없다고 절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여자 때문에 내 딸이 죽었다고, 예수 당신이 빨리 가지 않아서 내 딸이 죽었다고 원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시간에 일하십니다. 믿음과 기다림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습니다. “인내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참아내는 것입니다. 인내는 당장 결과가 나타나지 않아도 계속해서 열심을 다하는 것입니다. 인내는 인생의 어떠한 상황에서도 분노하지 않고 고통까지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입니다.”(팀 켈러, 왕의 십자가 p.105) 여인의 12년은 예수님을 만나기 위한 인내와 섭리의 시간이었습니다. 단순한 치료의 행위가 아닌 구원의 복음을 만난 것입니다. 야이로가 예수님을 모시고 집으로 가는 길에는 죽음과 부활이 있습니다. 딸의 문제가 아니라 야이로의 문제입니다. 그 길에서 죽고 산 것은 실은 야이로입니다. 그는 딸을 통해 죽음을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습니다. 문제 많은 세상을 삽니다. 믿음이 필요하고 인내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이 그 사이에 계십니다. 믿음의 대상이시면서 인내의 본이 되십니다. 깊은 평강을 품고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손 내미십니다. 주님의 손을 잡을 때 문제는 감사가 되고 고난은 기쁨이 됩니다. 생명의 주가 되시는 우리 주님의 평강의 시간을 기다립니다. 우리에게 믿음을 더욱 주옵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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