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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King's way 7. 성결 이응도 2019-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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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 수요 예배 마가복음 King's Cross

 

7. 성결(7:14-23)

 

레위기 6장을 보면 대제사장의 죽음의 가능성이 언급됩니다. 하나님 앞에 1년에 단 하루 속죄일에 이스라엘 백성을 대표해서 지성소에 들어가는 대제사장은 죽음의 가능성을 앞에 두고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지성소에 들어섰습니다. 가까운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교수였던 레이 딜러드(Ray Dillard)는 스가랴 3장을 해석하면서 이 장면을 자세하게 묘사했습니다.

 

속죄일 일주일 전 대제사장은 집을 떠납니다. 혼자만의 장소에서 묵상하며 하나님과의 만남을 준비합니다. 부지불식간에라도 부정한 것을 만지거나 보거나 듣거나 먹지 않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깨끗한 것을 먹고 깨끗하게 삶을 유지하면서 스스로가 거룩한 제물이 되기 위해 노력합니다. 속죄일 전날 밤에는 침소에 들지 않고 밤을 새워 기도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읽습니다. 그렇게 마음과 생각을 정결하게 유지하면서 속죄일 당일이 되면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깨끗하게 씻습니다. 순결한 백색 세마포 옷을 입습니다. 그리고 지성소로 들어가서 자신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짐승으로 희생의 제물을 드렸습니다. 흰 세마포가 피로 물듭니다. 그는 지성소에서 나와 다시 목욕합니다. 새로운 백색 세마포 옷을 입고 지성소로 들어갑니다. 이번에는 제사장들의 죄를 위해 짐승으로 희생의 제물을 드립니다. 흰 세마포가 다시 피로 물듭니다. 그는 지성소에서 나와서 다시 목욕하고 새로운 세마포로 갈아입습니다. 지성소로 다시 들어가서 이번에는 백성들의 죄를 대속하는 제물을 드립니다. 세마포는 다시 피에 젖습니다. 속죄를 위한 제사입니다.

 

이 모든 과정은 공개적으로 진행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전 주변에서 이 길고 어려운 과정을 지켜보았습니다. 물론 두터운 휘장으로 둘러싸여 있었지만 대제사장이 움직이는 소리, 씻는 소리, 짐승의 울음소리를 들었고, 피비린내를 맡을 수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지켜보는 사람들을 대표해서 하나님 앞에 섰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의식을 대신하고 대표하는 대제사장이 작은 실수라도 범할까... 작은 부정한 일이라도 행할까 노심초사하며 기도하고 격려했습니다. 이것이 일반적인 속죄일 제사의 과정입니다.

 

그런데 스가랴 3장을 보면 당시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지성소에 서 있는 장면이 있습니다. 선지자 스가랴는 이것을 환상으로 봅니다. 안타깝게도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더러운 옷을 입고 서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서 있는지라”(3:3)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티끌만한 허물도 있어서는 안되는 거룩한 제단 앞에 더러워서 도저히 입을 수 없는 옷을 입고 그가 서 있습니다. 하나님은 왜 스가랴에서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이런 모습을 보여주셨을까요?

 

1.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나님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을 스가랴에게 보여주시고 이렇게 명령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령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3:4)

 

하나님의 뜻은 분명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성결한 삶을 살아야 하고 준비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스스로 거룩과 성결을 회복할 수 있는 능력도 의지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약속하시면서 선지자에게 그 옷을 벗기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악을 제거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3:4)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거룩하게 할 수 없는 이스라엘을 품으시고 죄악을 제거하시며 아름다운 옷을 입히신다 말씀하십니다. 이 일을 어떻게 이루어질까요?

 

2. 오점(汚點)

 

인류는 오랫동안 원인을 알 수 없는 근원적인 죄책감 혹은 수치심에 시달려왔습니다. 제가 아직도 기억나는 한 장면이 있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 국어 시간이었습니다. 철용이라는,늘 일등을 맡아서 하던 친구가 있었습니다. 선생님이 시를 한편 써서 제출하라는 숙제를 주셨습니다. 철용이는 다음날 무엇인가를 심각하게 써서 제게 보여주었습니다. 길지 않은 시였는데 이런 표현이 있었습니다. “나는 맑은 하늘에 찍힌 하나의 오점(汚點)...” 뭐든지 잘하는 것 같고 인기도 많은 친구였는데 자신에 대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니.... 놀란 제가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자신은 한번도 이런 생각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 친구를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대학 2학년 때였습니다.

 

한참 학교 앞에서 시위가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누군가 제 어깨를 쳤습니다. 철용이었습니다. 서울대학교를 다니던 친구였는데 학기 중에 뜻밖에 부산으로 내려와 있었습니다. 이유를 묻자 철용이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 군대나 가려고... 나라가 이렇게 어지러운데... 공부만 하는 것도 우습고... 그렇다고 시위에 참가하는 것은 확신이 없고... 응도야, 잘 지내라...”

 

저는 그 친구가 내면에 어떤 어둡고 아픈 것을 품고 있는지 정확하게 모릅니다. 다만 지금은 그 친구를 다소 이해할 수는 있습니다. 어쩌면 철용이는 저보다 더 깊고 정직한 고민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몇 년 전에 그냥 웃기에는 슬픈 기사가 났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한국의 유명 인사들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나는 당신이 한 일을 다 알고 있습니다. 언론에 폭로하기 전에 돈을 입금시키세요.” 어이없게도 많은 사람들이 범인이 지시한대로 입금했습니다. 오죽하면 "I know what you did last summer!"라는 제목의 소설과 영화가 만들어졌을까요? 사람들은 자신만이 가진 어둡고 깊은 골방이 있기 마련이고, 그것이 행위이던 말이든 생각이든 다른 사람들에게 드러내고 보여줄 수 없는 비밀들을 품고 삽니다.

 

3. 의로운 삶을 위하여

 

그래서 인류는 오랫동안 자신에게 있는 근거를 알 수 없는 악을 이기고 보다 의롭고 나은 삶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사람을 원래 악하게 보든 원래 선하게 보든 다양한 경로와 노력을 통해서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했습니다. 인류가 개발한 가장 보편적인 길은 바로 종교였습니다. 물론 종교의 내면의 동기는 다양합니다. 소원의 형상화, 두려움과 염려의 극복, 정치와 지배의 논리적 근거 등이 있기도 합니다. 그 중에 가장 큰 것은 바로 종교성을 통한 의로움의 획득입니다. 우리는 종교적 행위를 통한 의로움을 획득하려는 유혹을 이기지 못합니다. 기도하고 성경을 읽고 예배에 참여하고 제물을 드리고 고행을 합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은 메시야를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종교는 하나님의 거룩함에 이르는 길이 아닙니다.

 

종교를 아편으로 보는 견해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정치를 통해서 사람 사는 세상을 보다 나은 세상으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끊임없는 개혁을 주장했고 새로운 계몽과 진보를 약속했습니다. 20세기 초반 서구사회를 휘몰아쳤던 정치철학은 20세기 중후반을 전쟁과 냉전으로 몰아갔습니다. 그들은 사회 구조를 바꾸고 사람을 교육하면 인간 사회가 나아질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자본주의도, 사회주의도 인간의 악한 본성을 바꾸지는 못했습니다.

 

오늘날 인류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대중문화입니다. 사회는 영웅을 만듭니다. 이전처럼 역사를 변화시키거나 나라를 바꾸는 영웅이 아닙니다. 대중문화라는 가치로 치장된 모두가 본받고 싶어하는 매력을 가진 영웅입니다. 오늘날 성장하는 자녀들은 그들에 관해 읽고 보고 생각하고 본받으려고 합니다. 그들처럼 되고 사는 것을 목적으로 삼습니다.

성공과 성취 또한 이 범주에 속합니다. 이것은 자기만족과 관련이 있습니다. 내가 최선을 다하고 최고의 결과를 얻을 때 나는 선하고 아름답다... 고 느낍니다. 심지어 이런 경향은 설교자들에게도 나타납니다. 말씀을 전하는 것이 하나의 일로 생각될 때... 설교자는 성도들의 반응에 집중하게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얼마나 하나님을 잘 드러냈는지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고 반응을 얻고 유명해지는지가 관건이 됩니다.

4.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오늘의 본문은 막 7:1-5의 말씀을 배경으로 합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그들은 많이 화가 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유대인들이 지키던 정결의식을 무시하고 음식을 먹었다고 했습니다. 이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 묻되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준행하지 아니하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나이까”(7:5) 예수님은 이들의 질문에 대해 명쾌한 답을 주십니다. 예수님의 답을 두 가지로 나눠서 생각해 봅시다. 첫째는 더러움에 관한 것이고 둘째는 깨끗함에 관한 것입니다.

 

더러움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명쾌합니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더럽습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사람은 자신들에게서 나오는 것으로 스스로를 깨끗하게 하려고 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유대인의 율법과 전통이었습니다. 8-9절을 봅시다.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느니라 또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전통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도다”(7:8-9) 전통은 그들이 만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것과 시각적으로 병치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도 이렇게 깨달음이 없느냐 무엇이든지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함을 알지 못하느냐 이는 마음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배로 들어가 뒤로 나감이라”(7:18-19) 율법과 전통을 생명처럼 지키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있어서 이 말은 치명적인 모욕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배설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사람이 만든 것들의 결과물이 무엇인지 설명하십니다. 또 이르시되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7:20-23) 예수님에게 있어서 사람의 전통, 사람의 배설물, 사람의 악한 마음과 행위는 결국 같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깨끗함은 어디에 있습니까? 18-23절의 말씀에서 사람에게 있는 온갖 더러운 것을 말씀하신 예수님은 딱 한 구절 깨끗한 것을 언급하십니다. 19절 하반절에 있습니다. 이러므로 모든 음식물을 깨끗하다 하시니라”(7:19) 마가는 의도적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음식물을 깨끗하다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마음에 악한 생각을 품지 않는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것은 거룩하고 깨끗합니다. 그리고 모든 인류 가운데 딱 한 존재, 예수님이 거룩하고 깨끗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의 거룩으로 들어갑니다. 스가랴 3장에서 하나님은 온갖 더러운 것으로 물든 옷을 입은 제사장 여호수아를 다시 거룩한 옷으로 입히십니다. 하나님은 깨끗하고 거룩한 것을 창조하셨고, 회복시키십니다. “깨끗하다!” “거룩하다!” 선포하시고 그의 피로 씻기신 옷을 입혀주십니다. 또 내가 들으니 허다한 무리의 음성과도 같고 많은 물 소리와도 같고 큰 우렛소리와도 같은 소리로 이르되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19:6-8) 구약의 제사장들만이 입을 수 있었던 거룩하고 빛나는 세마포 옷을 입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거룩함의 회복, 오직 스스로 죽임당한 어린 양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습니다. 그 은혜와 피에 힘 입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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