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King's way 8. 이 믿음을 가졌으니 | 이응도 | 2019-06-2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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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 수요 예배 마가복음 King's Cross 8. “이 믿음을 가졌으니...”(막 7:24-30) 신에 대한 인류의 보편적인 이해는 크게 두 가지로 갈라집니다. 첫째는 마치 피에 굶주린 폭군같은 신입니다. 그 신에 대한 두려움으로 사람들은 그들에게 있는 가장 가치 있는 것을 희생 제물로 드렸습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신제물의 흔적이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잔혹하고 전능한 신은 사람의 삶에 눈물과 한숨을 주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사람에게 있는 가치있는 것에 대한 희생을 요구한다고 믿었습니다. 깊은 바다와 높은 산에 존재했던 신들은 때로 진노를 드러내서 많은 사람을 희생시켰고, 그것을 피하기 위해 사람들은 제물을 드려서 신을 달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것이 좀 더 발전하면 희생 혹은 제물의 의미가 바뀝니다. 보다 선하고 가치 있는 삶을 살아서 이생에서 신의 공의를 만족시키면 저승에서 신의 은혜를 누린다고 생각했습니다. 인류가 발전시킨 고등종교들의 논리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인류는 인생의 소원과 필요를 채우는 존재였습니다. 내 소원을 들으시는 신, 나의 필요를 만족시키는 신, 나를 위해 존재하는 신입니다. 이 신은 전지전능하고 위대하지만 사람의 한계를 넘지는 못합니다. 사람의 소원과 필요가 만든 신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류의 역사를 돌아보면 어느 문화권, 어느 민족에도 무속(巫俗)은 존재합니다. 무속의 핵심이 이 두 가지 요소에 있습니다. 두려움부터의 자유와 소원의 만족 - 우리에게 있는 믿음은 이 요소들과 어떻게 다르고 또 같을까요? 오늘 본문에서 만나는 수로보니게 여인은 우리들에게 이것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1. 숨길 수 없는 진리 먼저 본문 24절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예수님이 두로 지방으로 들어가신 이유입니다. 예수님은 두로 지방으로 들어가셔서 한 집에 기거하십니다. 마가는 예수님의 의도를 이렇게 기록합니다.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 하나....’ 아마도 갈릴리 지역에서 사역하시면서 유대인들의 억척과 논쟁에 지치셨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방 지역으로 가셨고, 그곳에서 한 집에 들어가셨는데, 아무도 모르게 그렇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의도는 실패합니다. “숨길 수 없더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숨길 수 없었을까요? 마가가 이것을 기록으로 남긴 이유는 무엇일까요?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이 두로와 시돈으로 가셨던 기록은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예수님은 두로지방으로 가시기 직전에 바리새인들과 치열한 논쟁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전통을 만들어 지키면서 하나님의 계명을 버린다고 책망하셨습니다. 사람에게 들어가는 것이 더러운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더러운 것임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거룩한 사명, 거룩한 택하심을 더러운 것으로 바꾸어버렸습니다. 예수님은 가슴 깊은 슬픔과 고통을 느끼셨습니다. 그리고 선택하신 다음 장소는 바로 두로와 시돈이었습니다. 두로와 시돈은 지중해 연안의 도시로서 무역과 수산업, 그리고 모래 채취로 많은 부와 번영을 누리는 도시였습니다.(그림 1,2) 교통의 요충에 있었기 때문에 늘 강대국의 식민통치 아래에 있었지만 중요한 도시가 되어 풍요를 누리는 도시이기도 했습니다. 수많은 이방의 신들이 다양한 족속의 이글거리는 욕망을 형상화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그 욕망의 도시로 가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두로에서 수로보니게 여인을 만나신 후 시돈을 거쳐서 다시 갈릴리로 가십니다. 그곳에서 귀먹고 말을 더듬는 사람을 만나십니다. ‘에바다’라는 말씀으로 그를 고치십니다. 그리고 그에게 다른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지 말라고 당부하십니다. 하지만 소문은 빠르고 급하게 퍼졌습니다. 알리지 말라고 경고할수록 예수님에 대한 소식은 더 급하게 전파된다고 했습니다.(막 7:36) 그리고 그것은 유대땅 뿐만 아니라 이방인의 땅에도 그랬습니다. 진리는 숨길 수 없습니다. 진리를 가로막을 수 없는 벽도 없습니다. 유대인에게는 숨겨지고 이방인들에게는 드러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의 닫힘과 열림이 혈통이나 지역에 있는 것이 아님을 본문이 말합니다. 복음의 능력과 가치는 유대인에게나 이방인에게 동일합니다. 2. 그 앞에 엎드리다. 한 여인이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그 집으로 찾아옵니다. 아마도 예수님 앞에 엎드리는데 많은 장벽이 있었을 것입니다. 집 주인과 열두 명의 청년들, 그리고 예수님의 숨기고 쉬고자 하시는 의도까지 뚫고 그 앞에 엎드리는 일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하지만 여인은 그 예수님 앞에서 오랜 눈물에 젖은 사연과 소원으로 뒹구는 일에 성공합니다. 어제 4월 16일은 세월호 참사가 있은 지 5주기가 되는 날이었습니다. 지난 해 4주기를 기념해서 세월호 부모들 중 일부가 미국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미국에 있는 동포들과 미국 언론을 만났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활동에 대해 피로감을 느끼나 봅니다. 국회의원을 지난 차**라는 사람은 노골적으로 부모들을 마치 자녀들의 죽음으로 이익을 취하는 집단인 것처럼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직접 부모들을 만나보면 전혀 다른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왜, 어떻게 이렇게 오랫동안 싸울 수 있는지 물었을 때 그들은 같은 대답을 했습니다. “엄마니까요... 아빠니까요....” 국가가 국민을 보호하지 못했고, 비극을 설명하지 않았고, 슬픔을 위로하지 못했습니다. 세월호는 아직 진상이 밝혀지지 못했기 때문에 현재 진행형입니다. 잊어서는 안될 동시대를 사는 모든 부모의 자녀들에 대한 부채입니다. 저는 작년 간담회에 참석을 하고 거금을 들여서 세월호 부모님들의 손으로 만든 목공예 몇 점을 샀습니다. 그 중에 하나 나무 십자가가 있습니다.(그림3) 보시는 저 사진입니다. 저희 집 거실에 붙여뒀습니다. 다음 세대에 대한 책임을 잊지 않겠다는 저의 마음의 다짐이기도 합니다. 세상에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말합니다. 비겁한 사람과 평범한 사람과 용감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또 한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원해 비겁한 사람이었던 평범했건 혹은 원래 용감한 사람이었건.... 모든 부모는 자녀의 문제 앞에 절박해집니다. 모든 비겁과 평범함은 사라집니다. 부모는 자녀의 문제에 대해서는 무한 용감, 무한 헌신, 무한 사랑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수로보니게 여인의 전투적인 기도는 바로 어머니의 힘에서 나왔습니다. 그녀는 그 힘으로 이방 사람 예수 앞에서 뒹굴고 있습니다. 3. 교만과 열등 사이 일반적으로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교만한 마음 때문입니다. “내가 죄인이라고?” “예수 외에 다른 길은 없다고?” 그들은 복음보다 높은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엎드릴 수 없습니다. 그들의 삶에 있는 가치와 원칙이 복음보다 앞섭니다. 바리새인들이 그랬고 제사장들이 그랬고 수많은 유대인들이 그랬습니다. 다른 한편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는 열등감 때문입니다. 나는 복음의 대상이 아니라는 판단 때문입니다. 복음의 능력이 나같은 존재에까지는 미치지 않는다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는 서로 통합니다. 목사였던 John Newton은 낙심해서 복음을 받지 못하는 사람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극심한 죄책감과 열등감에 시달리신다고요? 물론 자기 안의 악을 의식하는 것은 좋습니다. 하지만 그 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나같은 죄인을 받을 리가 없다고 하셨지요? 그러면서 자신을 가치 없는 존재라고 말씀하셨지요? 예, 저도 그렇습니다. 참 가치 없고 하찮습니다. 하지만 우리를 사랑하시는 구속자의 인격과 사역과 약속을 하찮게 여기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당신의 신앙을 가로막는 죄책감과 열등감 속에는 오히려 교만과 판단과 정죄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것들은 당신이 저지른 죄악과 별로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한 이방 여인이 예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유대인의 입장에서 보면 수로보니게 여인은 이방여인이요, ‘개’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여인의 입장에서는 유대인들의 교만은 그저 우스울 수 있습니다. 가진 것도 없는 것들이 교만하기만 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당시 두로가 가진 문화와 번영은 갈릴리와 비교할 수 없었습니다. 두로가 가진 것으로 인한 교만이나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으로서의 열등감, 여인에게는 이 두 가지가 다 없습니다. 그녀는 오직 자신의 삶에 그 어떤 것으로도 극복할 수 없는 문제와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 앞에 뒹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한 편으로는 그녀의 열등감을, 다른 한편으로는 그녀의 교만을 자극하십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이든 화려한 잔치상에 펼쳐진 음식이든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 사랑이 필요할 뿐입니다. 그 사랑이 표현되는 어떤 방식이나 조건이 아닌 오직 그 사랑입니다. 반면 유대인들은 바로 이 부분에서 실패합니다. 그들의 교만과 열등감은 예수님이 표현하시는 사랑의 방법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십자가는 그들에게 수치였습니다. 제국 로마가 사용하는 형들에 우리를 구원할 메시야가 매달리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메시야는 그들에게 없습니다. 다른 한편 그들에게는 위대하고 장엄한 신이 필요했습니다. 이방의 모든 신들은 큰 형상과 위압적인 개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제국을 이루었고 이방의 신들은 제국의 신이 되어 군림했습니다. 우리도.... 나도.... 저런 신의 가호와 인도를 받고 싶었습니다. 그들이 꿈꾸었던 메시야, 그들이 결국 거절했던 메시야는 열등감의 표현입니다. 4. 이 말을 하였으니.... 마가복음에서 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이 빛을 발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지극히 유대적인 개념으로 여인과 대화했습니다. 여인은 평소에 유대인들이 하던 언행을 잘 알고 있습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않다”는 예수님의 표현을 너무 심각하게 받을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여인을 무시하고 모욕했다고 해석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사용하신 ‘개’에 해당하는 단어는 실제로는 아이들과 함께 노는 강아지에 해당하는 단어입니다. 예수님은 여인을 모독하기 위해 ‘개’라는 단어를 사용하신 것이 아니라 ‘순서’에 대해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두로와 시돈으로 오시지 않고 갈릴리를 거쳐 오신 이유를 설명하신 것이고, 유대인으로 태어나서 자라신 이유를 설명하신 것이고, 유대인의 손에 죽임당하시는 이유를 설명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여인이 중요한 고백을 합니다. 그 순서를 기다리겠다는 것입니다. 자녀들에게 먹이고 남은, 자녀들이 거절한 은혜를 사모하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말과 믿음을 축복하십니다. “이 말을 하였으니...”라고 말씀합니다. 여인의 건강한 의식과 믿음이 보이십니까? 열등감도 아니고 교만함도 아닙니다. 자기 소원에 대한 절박한 솔직함과 간절한 겸손입니다. 믿음은 그런 것입니다. 자신의 생각과 뜻, 두려움과 소원을 섞지 않는 것입니다. 허락하신 은혜의 차례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 은혜가 오직 하나님께 있음을 인정하는 믿음, 그 은혜의 흐름을 낮은 곳에서 엎드려 기다리는 겸손함, 그 은혜의 때를 사모하며 바닥을 뒹구는 간절함.... 예수님은 그녀가 보인 믿음을 인정하시고 구원의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녀의 믿음을 복음이 증거되는 모든 시대와 지역에 함께 증거하십니다. 우리는 성도와 교회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살기 참 어려운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많고 마음을 유혹하는 것이 많습니다. 하나님만을 바라보기 어렵습니다. 수많은 열등감의 이유와 교만의 조건들이 우리를 시험합니다. 성경은 오늘 한 여인을 우리에게 자랑합니다. 예수님 앞에 엎드려 뒹구는 여인의 믿음으로 우리를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인에게 있었던 말과 고백했던 믿음이 우리에게도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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