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King's way 9. 변화산에서 | 이응도 | 2019-06-2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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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 수요 예배 마가복음 King's Cross 9. 변화산에서(막 9:2-13) 마가복음은 베드로의 수제자로 알려진 ‘마가 요한’에 의해 기록되었습니다. 마가가 기록했지만 베드로의 경험과 가르침의 결과라는 것에 대부분 동의합니다. 예수님의 설교보다는 삶에 초점을 맞추었고, 복음서 중에 가장 짧고 빠르게 이야기를 전개합니다. 주로 이방인 교회와 성도들에게 예수님을 소개하고 알리는데 목적이 있었습니다. 마가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눠집니다. 전반부는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집중적으로 다룹니다. 후반부는 그 분이 오신 목적을 밝히고 그 목적에 헌신하시는 모습을 그립니다. 그리고 이 두 부분으로 나뉘는 경계에 두 사건이 있습니다. 하나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며 구주이심을 고백하는 장면입니다. “또 물으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매”(막 8:29) 예수님은 그의 대답을 기뻐하셨고 축복하셨습니다. 그리고 비로소 그때부터 가르치신 것이 있습니다. 처음 아주 구체적으로 가르치셨다는 말씀입니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막 8:31) 그리고 엿새가 지납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데리시고 높은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그곳에서 세 제자는 놀라운 경험을 합니다. 삼위 하나님의 동행하심을 보게 됩니다. 놀라운 영광의 임재 - 그들은 압도당했습니다. “마침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This is my Son, whom I love. Listen to him)(막 9:7) 이 두 사건의 의미와 목적을 생각해 봅시다.
1. 고백, 그리고 십자가 베드로의 예수님에 대한 고백은 교회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가장 완전한 최초의 고백입니다. 어쩌면 베드로는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믿고 고백하면.... 나머지는 고백의 대상이 된 신의 몫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이전에 베드로가 믿어왔고, 인류가 의지해왔던 신에 대한 개념을 그러했습니다. 사람의 두려움과 소원이 형상화되었기 때문에 그 신을 믿고 고백하고 재물을 드리기만 하면 신이 곧 나를 위해 일해 준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의 고백 위에 새로운 신적인 소명을 주십니다. 먼저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인 그가 사람의 손에 결박당하고 십자가 위에서 처참한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될 것이다...가 아니라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he must be killed and after three days rise again)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놀랐고 베드로는 항의했습니다. 베드로가 사용한 'rebuke'라는 단어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사탄을 쫓아낼 때 사용하신 단어입니다. 베드로의 당황과 분노의 정도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그를 rebuke하셨습니다. 베드로 안에 역사하는 사탄의 생각과 두려움을 쫓아내셨습니다. 그리고 신앙을 고백한 그들에게 ‘고백 이후의 삶’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막 8:34-35) 제자들은 무척 놀랐고, 침묵했습니다. 베드로가 어떻게 꾸지람을 받는지를 보았기 때문이고, 여전히 잘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이고, 그리고 두려웠을 것입니다. 엿새가 지나갑니다. 2. 여기가 좋사오니.... 예수님은 세 제자를 데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 앞에서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어떤 모습으로 변화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직관적으로 엘리야와 모세가 함께 나타나 예수님과 대화하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베드로가 참지 못하고 말합니다. “베드로가 예수께 고하되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니”(막 9:6) 우리는 베드로의 이 말을 대부분 잘못 이해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변화된 예수님의 모습과 모세와 엘리야를 보고 너무 좋아서 이렇게 말을 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7절을 보면 “이는 그들이 몹시 무서워하므로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알지 못함이더라”고 했습니다. 베드로가 이런 말을 하게 된 내면의 동기는 ‘두려움’이었습니다. 왜 베드로는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을까요? 8절에 그 이유가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현실화되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었습니다. 모세와 엘리야의 모습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경험했던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뿐만 아니라 그들 자신의 생명을 잃을 수도 있다는 위기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베드로가 말하는 ‘초막’이란 원래 ‘성막’으로 번역되는 말입니다. 모세의 시절에 하나님의 영광이 시내산에 나타나고 난 다음 히브리인들은 성막을 지었습니다. 그들은 한편으로 간절히 하나님의 임재를 원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성막을 짓고 제사장은 희생의 제물과 함께 성막으로 들어가 제한된 시간에 하나님의 영광과 임재를 경험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베드로의 이 간청은 모세의 시대 성막을 지었던 히브리인들과 같은 동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간절한 소망이었지만 다른 한편 감당할 수 없는 위엄이었을 것입니다. 성막은 아직 자기 안에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지 못하고 있는 베드로가 하나님을 소망하면서도 두려워하는 마음을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때 ‘구름’이 내려와서 그들을 덮었습니다. 마가는 그것을 구름이라 해석했고, 제자들 또한 그렇게 느꼈을 수 있습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막 9:8) 하나님이 그들에게 직접 주신 명령입니다. 이전에는 하나님의 면전에 서는 모든 사람은 죽었습니다. 그들의 두려움 또한 여기에 기인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오히려 영광 중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은 이미 하나님의 임재를 예수님을 통해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과의 동행이 하나님의 임재 자체입니다. 우리 또한 그 임재를 매일 경험하며 삽니다. 성막을 통해서가 아니라 내 삶을 성막으로 삼고 하나님이 내 안에, 내가 하나님 안에서 날마다 예배합니다. 3. 인자가 살아날 때까지는.... 산에서 내려오는 길,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당부하십니다.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경고하시되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막 9:9) 예수님은 놀라운 경험을 한 제자들에게 자신의 부활을 다시 한번 강조하십니다. 부활하기 위해서는 먼저 죽어야 합니다. 아직 예수님의 죽음을 인정하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변화된 자신의 모습과 함께 모세와 엘리야를 보여주시고, 그렇게 아름답고 완전한 모습으로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세 제자는 여전히 궁금합니다. 베드로의 구술을 따라 성경을 기록하는 마가는 충실히 당시 베드로의 기억을 복기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물었습니다. “죽었다가 살아난다고요? 왜요? 어떻게요...?” 그리고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이에 예수께 묻자와 이르되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막 9:11) 이 질문은 매주 중요합니다. 제자들은 조금 전에 엘리야를 봤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메시야가 나타나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전 엘리야가 올 것이라는 예언이 성취되었다면... 이제는 하나님의 나라가 와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와야 하는 시점에 메시야의 죽음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의 질문은 이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엘리야가 온다는 것은 곧 메시야가 온다는 것인데, 선생님... 이렇게 우리가 엘리야를 만났으니까... 이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져야 하는 것 아닙니까?” 예수님은 그들의 생각을 바로 잡으십니다. “이르시되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것을 회복하거니와 어찌 인자에 대하여 기록하기를 많은 고난을 받고 멸시를 당하리라 하였느냐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가 왔으되 기록된 바와 같이 사람들이 함부로 대우하였느니라 하시니라”(막 9:12-13) 풀어서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만일 너희들이 기대하는 것처럼 엘리야가 온 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실현하는 일과 관련이 있다면 성경에 왜 인자가 고난을 받고 멸시를 당한다는 말씀이 있겠는가? 성경이 말한 엘리야는 조금 전에 너희들이 본 엘리야가 아니라 얼마 전에 죽임당한 세례 요한이다. 이미 엘리야는 세상에 왔다가 멸시와 고난을 받고 하나님의 나라로 돌아갔다." 복음서의 전반부에서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셨고 성령이 비둘기처럼 임재했으며 하나님은 음성으로 기쁨을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은 가르치시며 치유하시며 제자들을 모으셨습니다. 복음서의 후반부를 시작하면서 다시 한번 하나님의 임재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큰 시험과 고난을 준비하십니다. 4. 나의 믿음을 도우소서! 이 일이 있은 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돌아오셨습니다. 큰 소동이 있습니다. 귀신이 들린 아들을 제자들에게 데려온 사람이 있었는데 제자들이 감당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 대해 한탄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막 9:19) 예수님은 간절한 소원으로 나온 아이의 아버지와 대화를 통해서 아직 믿음이 없는 제자들에게 ‘설교’하십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 9:23) 아이의 아버지가 간절하게 외칩니다. “곧 그 아이의 아버지가 소리를 질러 이르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하더라”(막 9:24) 바로 이 외침이 제자들이 해야 할 기도입니다. 소원은 있으되 아직 믿음이 없는 제자들을 향해서 예수님은 한 아이의 질병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상식과 소원에 근거해서 판단하고 생각하는 그들에게 믿음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역사하는지를 보여주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귀신을 쫓아내셨고, 아이는 고침을 받았습니다. 제자들이 묻습니다. 왜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없었나요? 예수님은 ‘기도’를 말씀하셨습니다. 더 많이, 간절하게 기도하라는 말씀일까요? 제자들이 귀신을 쫓아내지 못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약하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교만했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이 두 가지를 해결하는 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힘입을 수 있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하나님은 누구신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더 많이 기도하고 울트라 파워를 가지라는 말씀이 아니라 스스로 할 수 없음을 고백하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더욱 간구하면... 예수님 없는 세상을 살면서 하나님의 임재와 도우심을 경험하며 살게 될 것이라는 메시지가 숨어 있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막 9:8) 제자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이 명령은 초대교회와 성도들에게, 그리고 우리들 모두에게 동일하게 선포되었습니다. 제자들이 순종해야 하고, 초대교회가 순종해야 하고, 우리가 그리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에게 주셨던 권면을 기억합시다. 우리는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뒤를 따를 사람들입니다. 십자가의 여정이 골고다 언덕일 수 있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일 수 있습니다. 그 말씀에 순종하면서 기도하면서 믿음을 붙듭니다. 그 믿음으로 이 길을 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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