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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King's way 10. 소금과 소금과 소금 이응도 2019-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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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 수요 예배 마가복음 King's Cross

 

10. 소금과 소금과 소금(9:30-50)

 

최근 부패한 경찰을 소재로 하는 악질 경찰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전과자들을 사용해서 부당한 이익을 취하는 조필호라는 경찰은 자신이 기획한 범죄사건을 마무리할 때 늘 소금을 뿌립니다. 사용했던 차량에도, 자신이 범죄를 도운 전과자들에게도 소금을 뿌립니다. 기분 나쁘다고 항의하는 전과자들에게 그가 하는 말이 있습니다. 부정 탄다는 말입니다. 악한 기운이 자신에게로 와서 범죄가 드러날 것을 우려해서 그렇게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소금을 뿌리는 행위를 부정한 것을 막는 상징적인 행위로 여겼습니다. 그런 면에서 한국인의 전통 정서와 성경은 맞물리기도 합니다.

 

소금은 기독교가 가진 오랜 영적 소재입니다. 부패하고 타락한 세상을 살면서 성도와 교회는 부패를 방지하는 소금과 같아야 하고, 건조하고 무의미한 삶을 반복하는 세상을 살면서 성도와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맛을 전해야 하고, 불경건하고 사악한 세상을 살면서 소금을 치듯 하나님의 거룩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소금이라는 한 상징적인 이미지를 설교에 반복해서 사용하면서 각각 다른, 혹은 발전적인 의미로 적용하고 있습니다. 한 가지 의미로만 사용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오늘 본문을 성경학자들은 난해구절이라고 이름하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의미로 소금을 세 번이나 언급하셨을까요? 함께 생각해 봅시다.

 

1. 두려워하다.

 

제자들은 변화산에서 변화된 예수님과 구약의 엘리야와 모세를 만났습니다. 선생으로 알았고, 메시야임을 때로 의심하기도 했던 예수님이 정말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의 주인공임을 확인했습니다. 제자들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 것이 옳을까요? 만일 우리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우리의 반응은 무엇이었을까요?

 

제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을 만난 후 보인 첫 번째 정서적인 반응은 두려움이었습니다. (이는 그들이 몹시 무서워하므로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알지 못함이더라/9:6) 그 두려움에는 두 가지 동기가 있습니다. 하나는 경건한 두려움즉 경외감입니다. 하나님의 존귀와 위엄을 만났고, 이전과는 다른 태도로 예수님을 대하게 됩니다. 다른 하나는 존재에 대한 위협으로 느끼는 무서움입니다. 영광 가운데 임하신 메시야의 십자가의 죽음에 대한 예언은 그들이 쉽게 받기 어려운 내용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자신을 따르려거든 함께 십자가를 져야 함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에게 십자가는 공포 그 자체였습니다. 마가복음 9장에서의 두려움이 이 두가지 두려움의 중간 지점 쯤 있습니다.

 

그들과 함께 다른 제자들에게 돌아오신 예수님은 귀신이 들린 아들을 데리고 온 아버지를 만납니다. 남아있던 제자들은 그를 어떻게 할 수 없었습니다. 아들을 위해 간구하는 아버지의 기도를 들으신 예수님은 그의 믿음에 근거하여 귀신을 쫓아내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그들에게 믿음이 없음을 책망하셨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지를 묻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기도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 모든 것이 있음을 믿는 믿음과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을 사모하는 기도 - 예수님은 이 말씀으로 변화산 사건과 귀신들린 아들을 고치는 사건을 마무리하셨습니다.

 

2. 소금을 치다.

 

제자들에게 이정도 보여주시고 이정도 말씀하셨으면 알아들을 만 하다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의 마음 깊은 곳에 뿌리내린 두려움은 아주 강하고 견고합니다. 두려움과 염려, 모든 종교성의 뿌리이면서 건강한 신앙이 뿌리내리는 것을 가로막는 먼저 뿌리내린 씨앗이기도 합니다. 마가는 제자들에 여전히 두려워하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두려워하더라”(9:32) 변화산에서의 놀라운 사건을 목격하고 오히려 두려워했던 그들은 귀신을 쫓아내는 장면을 보고, 또 예수님의 책망의 말씀을 듣고도 여전히 그 두려움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보다 그들의 안전에 대한 염려에 더 마음을 두고 있었고, 말씀을 깨닫지도 이해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그저 질문하는 것조차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두로와 시돈을 돌아서 다시 가버나움으로 돌아온 예수님은 돌아오는 길에 제자들이 나누었던 이야기가 무엇인지를 물으셨습니다. 가버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새 제자들에게 물으시되 너희가 길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하시되 그들이 잠잠하니 이는 길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9:33-34) 그들은 서로 누가 큰 지를 논쟁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섬기는 사람’(9:35)이 될 것을 권면하십니다. 그때 제자들에게 이상한 소문이 들립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요한이 예수께 여짜오되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9:38) 귀신을 쫓아내는 일은 그들이 실패했던 일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인데 우리는 하지 못한 일을 제자가 아닌 다른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을 의지하고 믿고 그 일을 했다는 사실, 제자들은 당황했고... 그리고 그것을 금지했습니다.

 

그들의 마음의 질서가 얼마나 복잡한지 보이십니까? 그들은 예수님의 좋은 제자가 되고 싶습니다. 하지만 십자가는 두렵습니다. 그들의 믿음과 삶이 일치되지 않았을 때 귀신은 그들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제자 아닌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을 의지해서 귀신을 쫓아내고 있습니다. 우리가 누릴 영광과 능력을 빼앗기는 것 같습니다. 못하도록 막아버렸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이 무엇인지를 제자들에게 다시 가르치십니다.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9:41) 예수님은 지금 제자들에게 있어야 할 믿음이란 무엇인지를 가르치고자 하십니다. 예수님이 그들에게 심고자 하는 믿음이란 예수님의 이름으로 물 한 그릇이라도 주는 헌신입니다. 믿음은 그것이 옳다고 인정하는 마음이나 그렇게 되고 싶은 지향성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위치는 옳다고 인정하는 삶이며 지향한대로 살아가는 삶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기가 참 쉽지 않습니다. 고백한 대로 살고, 믿는 대로 실천하는 일 - 수많은 시험과 유혹 속에서 우리의 손과 발과 눈과 귀는 믿음과 삶의 거리를 만들어 냅니다. 예수님은 믿음대로 살지 못하도록 시험하고 유혹하는 모든 것을 지옥으로 표현하십니다. 그리고 결론으로 49절에서 소금을 언급하셨습니다.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Everyone will be salted with fire. 9:49)

 

여기서 불과 소금의 공통점을 무엇일까요? 그것은 불순물을 정제하거나 소독한다는데 있습니다. 구약의 제사의식에서 소금이 사용된 의미와 같습니다. 다른 헬라어 원문 버전을 사용하는 KJV49절을 이렇게 번역합니다. 모든 사람이 불로 소금치듯함을 받을 것이며, 모든 제물이 소금으로 소금치듯 함을 받으리라”(For every one shall be salted with fire, and every sacrifice shall be salted with salt.) 구약의 제사에는 다양한 의미로 소금이 사용되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의미는 성결에 관한 것입니다. 소금으로 소독하여 깨끗하게 한다는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것으로 향을 만들되 향 만드는 법대로 만들고 그것에 소금을 쳐서 성결하게 하고”(30:35) “정결하게 하기를 마친 후에는 흠 없는 수송아지 한 마리와 떼 가운데에서 흠 없는 숫양 한 마리를 드리되 나 여호와 앞에 받들어다가 제사장은 그 위에 소금을 쳐서 나 여호와께 번제로 드릴 것이며”(43:23-24) 순결한 은이나 금을 연단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불을 사용하여 불순물을 태우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질서없는 생각과 삶,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않은 수많은 생각과 욕심과 삶의 습관들이 불태워져야 합니다. 불순물이 제거되어야 합니다. 마치 그것은 하나님 앞에 제물로 드리기 전에 쉽기 부패하기 쉬운 환경에 있던 그들이 소금을 뿌려서 제물의 거룩과 성결을 지키는 것과 같다는 말씀입니다. 정제되고 정리된 다음에 비로소 그들의 믿음이 하나님 앞에 거룩한 제물로 드려질 것입니다.

 

3. 소금으로 맛을 내다.

 

예수님은 50절에서 두 번째 소금을 언급하십니다. 이번에는 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소금은 좋은 것입니다. 맛을 냅니다. 소금의 맛 - 어떤 것입니까? 예수님은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라고 했습니다. 짜게 하는 맛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굳이 불로 소금 치듯...’과 연결할 필요는 없습니다. 예수님이 하셨던 말씀을 베드로의 기억을 따라 마가가 기록한 성경이 마가복음입니다. 따라서 소금에 대한 연결된 기억의 결과일 수 있고, 각 소금에 대한 의미가 발전적으로 기록되었다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소금은 그 고유 성질을 따라 맛을 내는 것이고, 그것은 소금에만 해당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소금이라고 말씀하셨고, 교회가 그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맛을 잃으면 버려져서 밟히게 될 뿐이라고 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5:13)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4:6)

 

소금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하는 성도와 교회가 될 때 하나님이 지으시고 구원하신 사람이 사는 맛을 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것을 으로 표현하신 것은 재미있습니다. 사람이 사람처럼 사는 맛 - 교회의 사명입니다.

 

4. 소금을 내 안에 두다.

 

소금에 대한 세 번째 사용은 약속과 관련이 있습니다. 고대 근동지방에서는 사물에 대한 의미를 다양한 의미로 해석하고 사용했습니다. 소금은 변함이 없는 것을 상징합니다. 소금언약은 소금이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에 고대 중동지방에 널리 알려진 화친의 맹세의 상징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화친을 맺는 두 부족이 그 사이에 소금을 가져다 놓고 이 서약이 변치않기를 약속하는 풍습입니다. 부족의 손익을 따라 쉽게 화친의 약속을 깨뜨리고 적으로 돌변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에 그들은 변하지 않는, 신뢰할만한 화친의 약속을 필요로 했습니다. 예수님이 사용하신 이 표현은 유대인이라면 익숙한 관용어구와도 같았습니다. 약속에는 변함이 없어야 하고, 모든 약속은 서로에 대한 화평과 신뢰를 바탕으로 합니다. 관계의 평화가 깨어지는 순간 약속 또한 깨어집니다.

 

그러나 때로 어느 한쪽이 신뢰를 깨뜨리거나 화평을 깨뜨릴 때가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는 쉽게 오해하고 쉽게 평화를 잃습니다. 이때 상대방의 행위에 근거한 약속에 대한 신실함은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는 쉽게 내 입장에서 다른 사람의 행동과 마음을 해석하고 약속 파기에 대한 책임을 상대방에게 미룹니다. 약속을 지킬 책임을 상대방에게 두고 의심 가득한 눈길로 지켜보는 것은 이미 약속이 깨진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소금을 각자의 마음에 두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약속에 대한 책임이 각각에게 있습니다. 변하지 않는 마음과 신실함으로 내가 먼저 하나님과 교회와 성도와 이웃에 대한 약속을 지켜야 합니다. 이 일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먼저 행하신 일입니다.

 

흔들리는 제자들을 보면서 예수님은 먼저 자신의 마음에 소금을 두셨습니다. 자신을 희생하여 사람의 삶을 맛있게 만드셨습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사람이 어떻게 거룩하게 살 수 있는지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먼저 소금이 되셔서 소금의 삶으로 인도하십니다. 우리 또한 소금을 내 안에, 우리 안에 두고 하나님을 더욱 사모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변치 않는 것이 우리의 사랑이기를, 변치 않는 것이 우리의 인내이기를, 변치 않는 것이 우리의 믿음과 소망이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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