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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king's way - 11. 차악의 제도, 최선의 복음 이응도 2019-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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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 수요 예배 마가복음 King's Cross

 

11. 차악의 제도, 최선의 복음(10:1-12)

 

미국에서 목회를 하면서 같은 교단의 목회자셨던 아버지의 친구분들을 몇 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한국 교계의 지도자 중 한분이라고 인정받는 **’ 목사님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 목사님이 목회하시는 교회에서 지원하는, 우리 교회 가까이에 있는 교회의 설립예배를 드릴 때였습니다. 어릴 적 뵙고 거의 30년이 지나서 다시 인사를 드렸었습니다. “... 니가 이 목사 아들이가....?” 짧은 시간이었지만 석목사님이 기억하시는 저의 부모님의 젊은 시절에 대한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인사를 드릴 수 있어서 좋았고, 부모님의 젊은 날을 들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목회행정의 달인으로 불리시는 석목사님은 그날 설교에서 꽤 인상적인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목사가 일단 위임을 하면 32가지 권한이 한 손에 들어온단 말이야!”라고 말씀을 시작하시고는 정말 암기하기도 어려운 32가지의 ‘....’()을 나열하셨습니다. 모두가 하나님께서 주신 권한이자 권위라고 했습니다. 걸걸한 목소리로 감히 누가 목회자에게 주신 하나님이 주신 권위에 도전할 수 있는가를 말씀하실 때는... 정말 그런가...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습니다.

 

하지만 요즘 그 교회를 별로 좋지 않습니다. 이미 아들 목사님이 세습을 했고, 목사님은 교단의 법을 바꾸려다가 실패했고, 많은 교회와 목회자들이 반발하자 교회가 석목사님을 중심으로 만들었던 교단에서 탈퇴했습니다. 재정과 생활에 대한 여러 구설들이 계속 교회와 목사님을 괴롭히고 있습니다. 여전히 그 목사님은 교회행정의 면에서는 아무도 따라올 수 없는 높은 식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만 교회가 가져야 할 복음의 능력에서는 현저하게 힘을 잃었습니다. 영향력도 존경도 없습니다. 무엇이 더 중요한 것인지 고민해야 합니다. 목회자가 가진 행정적인 권위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교회에 허락하신 복음의 원칙이니까요.

 

전도서 729절에서 전도자는 독특한 고백를 합니다. 나의 깨달은 것이 이것이라 곧 하나님이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은 많은 꾀를 낸 것이니라”(7:29) 그가 깨달았다는 것, 죽음이 목전에 다가오고 원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던 자신이 숨 쉬는 것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는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깊은 지혜를 발견합니다. 그 중 하나가 729절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는데 사람은 그것을 왜곡하는 를 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에 반하는 인류가 만든 왜곡은 우리 삶의 곳곳에 드러납니다. 심지어 그것은 신앙을 가장하기도 하고, 열심을 포장하기도 합니다. 그 중 하나가 유대인들이 만든 전통과 제도입니다.

 

1. 이혼 증서를 쓰다.

 

교회는 오랫동안 결혼관계의 해소, 즉 이혼에 대한 네 가지 입장을 가져왔습니다. 그 중 첫 번째는 결혼을 하나님 앞에서의 언약으로 보고 결코 중단할 수 없다고 보는 견해입니다. 하나님이 짝 지어주신 것을 사람이 나눌 수 없고 오직 죽음만이 결혼 관계의 해소의 이유가 된다고 말합니다.(10:6-9) 두 번째 견해는 결혼은 원칙적으로 영구적인 약속에 해당하지만 한쪽 일방이 그 약속을 깨뜨릴 때를 예외로 보는 것입니다. 사람은 언약에 대해 늘 연약했습니다. 어느 한쪽이 하나님과 배우자 앞에서의 약속을 깨뜨릴 때 상대 배우자는 약속파기에 대한 책임없이 결혼관계를 해소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특히 유대의 전통은 간통을 사형으로 처리했는데 사형이라는 것이 법적으로 어렵게 되면서 결혼의 죽음’, 즉 이혼을 허용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예수님 당시 시대에 만연했던 동성간의 관계도 이혼의 이유가 되었습니다. 세 번째 견해는 두 번째 견해를 확대해석하는 경우입니다. 회개함이 없이 비정상적인 관계를 계속할 때, 불신자에 의해 핍박 혹은 버림을 받는 경우, 기독교로 개종하기 전의 이혼 등을 이혼이 가능한 예외의 규정으로 보는 것입니다. 특히 예수님은 모세가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이혼을 허락하였다(10:4-5)고 말씀하십니다. ‘마음의 완악함은 약자에 대한 폭력과 살인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고, 인권을 보호하기 위한 차악의 선택을 이혼 증서를 써서 허용하는 것으로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이 견해를 받아들였던 교회는 마음의 완악함1) 배우자나 아이를 학대하는 것, 2) 회개함이 없는 만성적인 알코올 중독이나 약물 중독, 3) 가족을 돌보지 않는 경우(딤전 5:8) 4) 배우자와 아이들이 하나님을 믿지 못하게 하는 경우까지 적극적으로 해석하기도 했습니다. 네 번째로는 이상적으로 결혼은 영구적인 것이지만 그러나 교회법정에서 무효가 된 경우는 제외한다고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카톨릭의 전통적 견해로 보면 됩니다. 쉽게 말하자면 여러 가지 형편과 사정을 고려하여 그 가정 혹은 성도가 출석하는 교회의 신부가 허락하는 경우에는 그것을 하나님의 허락으로 이해한다는 견해입니다. 연약한 성경적 근거와 위험한 결론이라 하겠습니다.

 

2. 차악(次惡)의 제도

 

중요한 것은 이런 견해들에 의해서 모세의 시대에 이혼 증서를 썼고 예수님의 시대까지 이것이 유대사회에 존속해왔다는 것입니다. 수많은 모세시대의 율법을 잊거나 외면했던 그들이 이혼에 대한 모세의 차악’(次惡)의 선택을 지지하고 지켜온 이유는 무엇일까요?

 

유대인들이 하나님께서 이혼을 허용하셨다는 근거로 사용했던 말씀은 신명기 24장의 말씀입니다. 사람이 아내를 취하여 데려온 후에 수치되는 일이 그에게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거든 이혼 증서를 써서 그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어 보낼 것이요

그 여자는 그 집에서 나가서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려니와“(24:1-2) 이 말씀의 배경과 이유가 되는 것은 모세 시대의 히브리인들의 삶의 정황에 있습니다. 400년을 노예로 살다가 자유를 얻고 가나안으로 가는 여정에서 그들은 다양한 세상의 문화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단 한 번도 위를 쳐다보지 못하고 살아남기 위해 땅만 바라보던 그들이 하늘을 보고 사람을 보면서 새로운 세상을 만납니다. 그 중에서 히브리남성들이 만난 것이 바로 이방 남성들의 자유로움과 이방 여인들의 아름다움입니다. 노예로 태어나서 평생을 노예로 살아온 자신의 아내들보다 이방여인들의 자유와 여유에 쉽게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모세가 그들의 선택과 이혼을 지지하지 않자 어떤 남성들이 아내를 광야에서 죽이고 유기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아내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워 죽이거나 쫒아내기도 했습니다. 모세가 신명기 24장에서 이혼 증서를 허용한 것은 최악을 막기 위한 차악의 선택이었습니다. 남성들의 욕망과 악함에 희생되는 여성들을 보호하기 위한 사회적 보장제도의 측면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남성 중심의 유대사회는 모세가 허락했던 이제도를 자신들의 욕망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사용했습니다. 제사장들에 의해 이혼 증서가 남발되고 남성들은 그들의 욕망을 따라 여성의 인권과 가정의 가치를 묵살하기도 했습니다. 본문 2-5절의 상황은 당시 유대인들의 인식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묻되 사람이 아내를 내어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대답하여 가라사대 모세가 어떻게 너희에게 명하였느냐 가로되 모세는 이혼 증서를 써주어 내어버리기를 허락하였나이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이 명령을 기록하였거니와”(10:2-5) 예수님은 모세가 그들의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차악의 선택을 했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3. 최선의 복음

 

하지만 사람의 연약함 때문에 만들어진 차악의 제도가 하나님이 사람을 위해서 허락하신 최선의 복음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차악의 제도를 정당화하고 자신의 욕망을 위해 이용하려는 바리새인들에게 가정의 가치를 다시 한번 확인하십니다. 창조시로부터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으니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그 둘이 한몸이 될찌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찌니라 하시더라”(10:6-9) 가정에 대한 예수님의 이 말씀은 내가 원래 이렇게 너희를 지었다는 창조주로서의 선언입니다. 하지만 유대사회에서 태어나 교육을 받으며 자라온 제자들은 그들의 상식과 충돌하는 복음에 의문을 가집니다. 그들은 바리새인들의 물러가고 난 다음 다시 이 문제에 대해 질문합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같습니다. 집에서 제자들이 다시 이 일을 묻자온대 이르시되 누구든지 그 아내를 내어버리고 다른데 장가드는 자는 본처에게 간음을 행함이요 또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데로 시집가면 간음을 행함이니라”(10:10-12)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하와를 허락하신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사람에게 다른 사람을 허락하셔서 서로에게 이웃이 되게 하신 것이고, 성도에게 다른 성도를 허락하셔서 교회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남성에게 여성을 허락하셔서 서로를 사랑하게 하시고 가정을 조직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아담에게 하와를 통해서 허락하신 관계는 창조적 축복이 함께 하는 관계이면서 신적인 언약이 있는 관계입니다.

 

그러나 사탄은 우리를 이웃되게 하시고 교회되게 하시고 가정을 이루게 하신 최선의 복음을 훼방합니다. 그들은 이 관계를 깨뜨려 서로에게 좋은 이웃이 되지 못하게 하고, 좋은 교회가 되지 못하게 하며, 가정의 경계를 허물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사람의 꾀에서 시작된 전통과 제도를 만들었습니다. 복음이 아닌 전통과 제도를 따라 살아도 되는 것처럼 서로를 속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4. 이혼에 대한 성경적 입장을 정리합시다.

 

1) 성도의 가정에서 이혼은 원칙적으로 허락되지 않습니다.

 

결혼한 자들에게 내가 명하노니 (명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주시라) 여자는 남편에게서 갈라서지 말고 (만일 갈라섰으면 그대로 지내든지 다시 그 남편과 화합하든지 하라) 남편도 아내를 버리지 말라”(고전 7:10-11)

 

성도들 가운데 이혼은 허용되지 않습니다. 예외는 없습니다. 어느 누군가가 불순종하여 이혼한다 하더라도 그는 다시 화합하든지 결혼하지 않은 상태로 지내야 합니다. 결혼 언약에는 하나님의 거룩함이 함께 존재하며, 따라서 부부가 갈라섬은 이러한 하나님의 거룩함을 파괴하는 행위로 해석되기 때문입니다.

 

2) 불신자와의 이혼도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 내가 말하노니 (이는 주의 명령이 아니라) 만일 어떤 형제에게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있어 남편과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그를 버리지 말며 어떤 여자에게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있어 아내와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그 남편을 버리지 말라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고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자녀도 깨끗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이제 거룩하니라 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애될 것이 없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느니라 아내 된 자여 네가 남편을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며 남편 된 자여 네가 네 아내를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리요”(고전 7:12-16)

 

어느 한쪽이 불신자일 경우, 이혼에 대한 주도권은 믿지 않는 자에게 있습니다. 불신자가 이혼을 원하지 않는데 신앙이 다르다는 이유로 이혼을 해서는 안됩니다. 다만 불신자인 배우자가 신앙을 이유로 이혼을 원하면 허용할 수 있습니다.

 

3) 배우자의 음행, 혹은 폭력으로 인한 이혼은 허용적입니다.

 

한쪽 배우자가 결혼의 언약을 배반했을 때 다른 한쪽이 약속을 계속할 것인지에 대한 영적 권위를 가지게 됩니다. 결혼의 의무를 배반한 배우자와의 언약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지만 성경이 원하는 것은 용서와 화해에 있습니다. “아내 된 자여 네가 남편을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며 남편 된 자여 네가 네 아내를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리요”(16)

 

4) 성도의 이혼은 권징 사유입니다.

 

만일 성도인 부부간에 화해가 이루어지지 않고 어느 한쪽이 이혼을 고집한다면 어떻게 할까요? 그것은 교회 안에서의 일반적 권징의 과정을 거치는 것이 옳습니다. 마태복음 18장에 의해 먼저 화해를 권면합니다. 그래도 안 될 경우 교회에 알리고 교회에서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권면하고, 그 권면에도 불응할 경우 이 문제를 공식적으로 교회에 내 놓아야 합니다. 만일 성도인데 교회와 성경의 권면을 거부한다면 교회는 그 정도에 따라 권징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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