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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King's way 12. 중심이동 이응도 2019-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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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 수요 예배 마가복음 King's Cross

 

12. 중심이동(10:35-45)

 

기독교 역사학자인 앤드류 윌스(Andrew Wills)는 기독교와 다른 종교의 차이를 독특한 관점에서 제시했습니다. 현대 세계화된 종교들은 대부분 발생지와 진원지가 같다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 이슬람교는 아라비아의 메카에서 시작되었고, 지금도 중동은 이슬람의 중심지입니다. 동아시아에서 발원된 불교 또한 여전히 동아시아 중심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인도에서 발생한 힌두교는 인도의 제일 종교입니다. 다만 기독교는 그렇지 않습니다. 기독교의 중심지는 끊임없이 이동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바 기독교의 발생은 예루살렘에서였습니다. 곧 헬라 중심의 지중해 세계로 옮겨가게 되고, 오랫동안 미개인으로 취급받던 북유럽인들에게로 옮겨갑니다. 북유럽은 이후 천년동안 기독교의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합니다. 북유럽에서 북미지역으로 옮겨갔던 기독교의 중심은 최근 큰 전환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지구의 남반구와 북반구는 개발 정도와 부의 정도에 큰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북반구의 남반구에 대한 경제적, 정치적 지배가 일반화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 남반구의 기독교 인구 및 성장의 속도가 북반구를 넘어섰습니다. 1900년대 초만 해도 아프리카의 기독교 인구는 1%를 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거의 절반 정도가 기독교권으로 들어와 있습니다. 향후 50-70년 사이에 기독교는 단순히 인구 비율에서 뿐만 아니라 영적 지도력까지도 그 중심을 이동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이런 주장을 하는 앤드류 윌스에게 기독교의 중심이동에 대한 질문이 들어왔습니다. “왜 다른 종교의 중심지는 그대로인데 기독교의 중심지만 끊임없이 변하는 겁니까?” 그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십자가 때문입니다.” 이해하지 못하는 질문자에게 앤드류 윌스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기독교는 낮은 곳에 그 중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중심에 십자가가 있고, 십자가는 계속 낮아지고 나눠주고 섬기는 자리에 있습니다. 교회가 부와 권력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면 십자가는 교회를 떠나 낮은 곳으로 이동하기 시작합니다. 높은 곳에 있는 교회에는 십자가의 은혜와 섬김의 메시지가 역동성을 잃습니다. 기독교는 점잖고 안정한 종교로 변질됩니다. 복음은 종교화된 기독교를 떠나 낮은 곳으로 움직이게 됩니다.”

 

1. 선한 선생님에게

 

마가복음 10장은 바리새인과의 논쟁으로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이 인류에게 허락하신 최선의 복음을 사람이 만든 제도로 얽매려는 어리석은 시도에 대해 예수님은 꾸짖으셨습니다. 13-16절은 또 하나의 복음에 반하는 상식을 무너뜨리십니다. 어린 아이들을 물리치는 제자들을 꾸짖으시고,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어린 아이들의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엇인가 선하고 의로운 일을 하고, 가진 것과 쌓은 것이 많아야 된다고 생각했던 유대사회에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가진 것이 없어도 하나님의 만져주심을 바라는 마음 하나로도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청중은 여전히 깨닫지 못합니다.

 

그 중 한 사람이 예수님 앞으로 나섭니다. 바리새인으로 추정되는 이 사람은 복음에 관해 관심이 많은 사람입니다. 당시 바리새파는 영생을 믿었습니다. 그렇다면 그의 질문은 좀 이상합니다. 그들은 최선을 다해 율법을 지키고 선을 행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영생을 상으로 주신다고 믿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아마도 그는 무엇인가 공허함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은 내가 무엇을 좀 더 해야 하는 것일까요?”를 묻는 것과 같습니다.

 

그가 예수님은 선한 선생님이라 부른 것에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은 자기편으로 놓고 싶습니다. 나도 선생님처럼 선을 행하는 사람이라고 주장하고 싶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의도를 막으십니다. 사람으로부터 시작된 의로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오직 한 분 하나님만 의에 대해 말씀하실 수 있다고 가르치십니다. 그가 모든 율법을 지켰다고 주장하자 예수님은 그것은 여전히 의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에게 있어서 한 가지 부족한 것은 100가지 중 한 가지를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없으므로 아무 것도 아닌 것에 대해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의 의는 결국 아무 의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2. 충돌하는 세계관

 

예수님은 그에게 재물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재물을 버려두고 십자가를 따를 수 있겠는가....? 재물과 십자가는 양립할 수 없는 가치이고 영광과 고난 또한 양립할 수 없는 삶의 조건이었습니다. 양립할 수 없는 두 가치는 예수님의 사역의 곳곳에서 계속 충돌하고 있습니다. 높아지려는 제자들과 십자가를 가르치시는 예수님, 자기 선과 자기 의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주장하는 바리새인들과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가르치시는 예수님, 성전과 제사에 구원이 있다고 주장하는 제사장들과 삶으로 드리는 참된 예배를 가르치시는 예수님, 부와 권력에 삶의 의미가 있다고 주장하는 헤롯당원들과 섬김과 헌신에 하나님이 뜻이 있다고 가르치시는 예수님.... 예수님의 사역의 현장은 충돌하는 세계관의 전쟁터였습니다.

 

예수님께 영생을 질문한 청년의 마음도 그렇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최선을 다해 율법을 지키며 경건하게 살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무엇인가 공허합니다. 부족합니다. 그의 삶을 지배하는 가치가 실은 두 가지였기 때문입니다. 그 가치 중에 하나는 하나님에게서 왔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영생이라는 가치, 그들은 오랫동안 그 가치를 붙들고 있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세상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세상이 주는 성취와 영광은 그들이 이 세상에 머무는 동안에 포기할 수 없는 가치가 되고 말았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세상으로부터 출발한 이 가치로 하늘로부터 시작된 가치를 대체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하늘로부터 출발한 가치는 오직 은혜와 감사로 이루는 것이라면 세상으로부터 출발한 가치는 자기의와 만족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선한 삶과 의로 하나님을 만족하게 하고, 영생과 하나님의 나라를 얻을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다만 예수님께서 그를 사랑스럽게 보신 이유가 있습니다.(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 10:21) 그가 느낀 공허함.... 그의 마음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쟁을 읽으셨기 때문입니다. 생각의 전쟁은 그렇게 시작되는 것이고, 그는 고민하고 기도하고 결단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 또한 그렇습니다. 두 가지 마음을 느낍니다. 나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고, 세상에서 영광을 얻고 싶습니다. 누군가가 이 두 가지는 같은 것이라고 말해주면 좋겠습니다. 내가 듣고 싶고 따르고 싶은 말씀만 주면 좋겠습니다. 그것을 복음이라 하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나는 알고 있습니다. 내 안에는 전쟁이 있습니다. 벌써 평정되어버린 전쟁일 수 있고, 일어나야 함에도 불구하고 조용할 수도 있습니다. 치열한 싸움이 계속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과 삶은 가치관의 충돌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3. 당신의 신은 무엇인가?

 

예수님은 자기 안에 흔들리는 세계관을 드러낸 청년에게 질문합니다. “네가 섬기는 신은 과연 무엇이냐?” 버릴 수 있는 것는 신이 아닙니다. 양보할 수 있는 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청년에게 있어서 버리고 양보하고 잊을 수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반대로 포기할 수 없고 손에서 놓을 수 없는 가치는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세상이라는 신, 물질이라는 신은 꽤 능력이 있습니다. 그 신은 사람을 스스로 크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은혜나 도우심이 없이 살 수 있는 존재로 만듭니다. 그 신은 하나님의 나라를 작은 것으로 만듭니다. 세상의 가치에 비해 하나님의 나라는 연약하고 빈약하게 보입니다. 약대로 변한 사람은 바늘귀로 변한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고 싶지 않습니다. 마가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은 약대로 변한 사람들에게 바늘귀보다 작은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약대는 바늘귀로 들어갈 수 있는가? 세상의 신을 섬기는 사람은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작고 낮은 곳으로 찾아가는 사람, 약대가 아닌 겸손하고 겸비한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좁은 길, 좁은 문을 지나 영생의 대로를 걸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의심하고 회의하는 제자들에게 세상을 섬기는 사람은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고 가르치십니다. 하늘의 복음으로 자신을 변화시킨 사람은 할 수 있습니다.

 

4. 사랑하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았도다.

 

마가복음 10장의 율법사 청년과 12장이 서기관은 닮았습니다. 그들은 모두 예수님께 대해 적대적인 관계 속에 있는 무리에 속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진리에 대해 관심이 있습니다. 들으려 하고 마음을 열고자 했습니다. 예수님은 독사의 자식들아!’라고 꾸짖으시던 목소리를 낮추시고 그들을 가르치셨습니다.

 

1021절에서는 율법사 청년을 사랑하셨다고 했습니다. 그의 삶의 노력과 진리에 대한 관심, 예수님 앞에 나온 용기를 인정하신 것입니다. 1228절에서는 예수님과 바리새인, 서기관, 제사장들의 논쟁을 보고 있던 한 서기관을 소개합니다. 그는 마음으로부터 예수님의 대답이 옳다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그가 다시 진리에 대해 묻습니다.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의 진리를 말씀하십니다. 그는 예수님의 미말씀을 받습니다. 세상의 그 어떤 제사보다 한 분이신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과 이웃을 같은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이 옳다고 인정합니다. 예수님은 그의 질문과 대답을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칭찬하시기를 예수께서 그가 지혜 있게 대답함을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도다 하시니 그 후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12:34)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비록 진리에 관심이 있었지만 재물이 많으므로 근심하며 돌아간 율법사와 진리에 대한 가르침을 겸손한 마음으로 받았던 서기관... 그들은 결국 어떤 삶을 살았을까요? 성경은 결과를 우리에게 보여주지 않습니다. 이들의 삶은 교회의 역사에서 계속되고 있고, 같은 질문과 대답이 지속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우리에게 위로와 소망이 있는 것은 예수님은 여전히 세상을 신으로 섬기고 있는 그들에 대해 관대하시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변화를 기다리십니다. 어쩌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까지 변화되지 않을 수도 있는 그들... 예수님은 그들을 사랑스런 눈과 마음으로 보시면서 칭찬하시고 격려하십니다. 그래 조금만 더 고민하고 조금만 더 깊이 들어가보자... 세상이 너희의 신이 될 수 없고, 세상이 진리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될게다... 조금만 더 들어가보자.... 예수님은 그들을 격려하며 기다리십니다. 그 사랑과 오래 참으심이 연약한 우리의 위로가 되고 격려가 됩니다.

 

믿음이란 중심이 이동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이동해야 하고 삶이 이동해야 하고 교회가 이동해야 합니다. 낮은 곳에 십자가가 있습니다. 진리가 심겨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과 삶도 십자가의 자리, 진리가 숨 쉬는 곳에 함께 심길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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