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King's way 13. 이 사람을 보라! | 이응도 | 2019-06-27 | |||
|
|||||
초대교회 수요 예배 마가복음 King's Cross 13. “이 사람을 보라!”(막 10:45) 모라비안 형제회의 설립자 중 한 사람인 진젠도르프(Nicholas von Zinzendorf)는 19세가 되던 해 학업을 목적으로 유럽의 다양한 수도원들을 방문하고 있었습니다. 좋은 스승들과 유적들을 통해서 배우기를 원했습니다. 어느 날 뒤셀도르프(Dusseldorf)에 있는 미술관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그림 한 점 앞에서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 그림은 도메니코 페니(Domenico Feti)가 그린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였습니다. 그 그림 아래에는 화가가 써놓은 글귀가 함께 있었습니다. “나는 너를 위해 이 모든 일을 했는데 너는 나를 위해 무엇을 하려느냐?”(This have I suffered for you; now what will you do for me?) 원래 "Ecce homo"라는 말은 본디오 빌라도가 예수님을 채찍질하고 가시관을 씌운 후에 군중들 앞에 세워두고 한 말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가시관을 쓰고 자색 옷을 입고 나오시니 빌라도가 그들에게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이로다 하매”(요 19:5) 이 말을 화가는 다른 의미로 해석하고 그림을 그린 것입니다. 이 그림과 글은 그의 삶의 방향을 바꿔놓았습니다. 그는 평생 교회와 이웃을 섬기되 원래 성주로서 부유했던 그의 집안의 재산이 거의 바닥이 날 때까지 도왔습니다. 보다 근본적인 신앙을 고민하며 발버둥치다가 모라비안 형제회를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18세기 유럽의 경건주의 운동을 주도했고, 감리교의 시작에도 영향을 미쳤으며, 주로 성경에 대한 묵상과 영적 교제를 통한 영성을 추구했습니다. 이들이 감리교를 시작한 존 웨슬리를 만난 이야기는 재미있습니다. 1736년 북미 원주민들에게 전도하러 가던 존 웨슬리는 대서양 한 가운데서 폭풍우를 만납니다. 두려움에 어쩔 줄 몰라하는 중에 찬양하는 소리를 듣습니다. 신앙의 자유를 찾아 신대륙을 향하던 모라비안 성도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폭풍우가 몰아치는 중에 오히려 시편을 통해 하느님을 찬양하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지를 묻는 웨슬리에게 그들은 예수를 당신의 그리스도로 믿느냐고 묻습니다. 목회자로서 신대륙에 있는 성도들에게 복음을 전하러 가고 있는 자신에게 던져진 이 질문 앞에 그는 깊이 고민합니다. 자신의 믿음이 구체적인 삶에서 아무런 능력을 발휘하지 못함에 부끄러워하면서 영국으로 돌아옵니다. 자신의 신앙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 모라비안 형제회로 들어가서 함께 생활하면서 그는 이후 감리교회 운동의 모티브를 얻습니다. 1. 죽음을 말씀하시다. 마가복음 8장과 9장, 10장에서 예수님은 거듭 죽음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각각 같은 것 같지만 다른 내용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물으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매 이에 자기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경고하시고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매” (8:29-32) “그 곳을 떠나 갈릴리 가운데로 지날새 예수께서 아무에게도 알리고자 아니하시니 이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또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이더라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두려워하더라”(9:30-32)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예수께서 그들 앞에 서서 가시는데 그들이 놀라고 따르는 자들은 두려워하더라 이에 다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자기가 당할 일을 말씀하여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겠고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니라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가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10:32-35) 위의 세 말씀에는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습니다. 공통점은 당연히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음에 대해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도 공통점 중 하나입니다. 차이는 십자가 죽음에 대한 내용이 점점 구체화된다는 것에 있고, 제자들의 반응에 있습니다. 8장에서 베드로가 항변합니다. 그 결과 예수님께서 그를 크게 꾸짖으십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의 일이 아닌 사람의 일을 생각하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인지 9장에서 말씀하실 때 제자들은 두려워할 뿐 묻지도 못했다고 했습니다. 10장에서 제자들과 그 외 따르는 무리들은 이미 두려움이 사로잡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다시 가장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35절에서 야고보와 요한의 반응은 뜻밖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랐던 가장 중요한 이유를 더 이상 마음 속에 숨길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이 불안했던 이유, 분노했던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그들이 결국 원했던 것은 예수님과 함께 지고 가는 십자가가 아닌 그들 자신의 영광이었습니다. 2. 인자가 세상에 온 이유 예수님께서 짧은 시간 안에 죽음을 세 번이나 언급하시고 가르치셨다는 것은 ‘죽음’이 예수님 사역의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이 땅에 오신 이유와 목적을 10:45에서 설명하십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10:45) ‘인자가 온 것’이라는 표현은 예수님의 십자가는 수동적인 고난이 아닌 능동적이고 의지적인 선택이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섬기려 하고 대속물로 주려한다는 표현에서도 예수님의 거룩한 의지가 표현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우리를 구원하는 길로 선택하셨습니다. ‘신의 죽음’ 외에 다른 길은 없었는가?에 대한 많은 질문이 있었습니다. 사랑을 표현하는 데는 다양한 방식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정말 상처 많고 못나고 부족한 사람을 사랑하기란 정말 어렵습니다. 사랑받을만 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모든 약속과 의무를 저버리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때문에 절망적인 대상을 사랑하기 위한 단 한 가지 길은 바로 ‘희생’입니다. 스스로 변화의 가능성이 전혀 없는, 스스로 진리와 구원에 다가설 수 있는 어떤 능력도 없는 존재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완전한 희생이 필요합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나님의 사랑하심과 약속, 그들의 배반과 몰락의 반복이었습니다. 스스로는 그 어떤 구원의 가능성도, 회복의 가능성도 없음을 하나님은 택하신 백성 이스라엘의 황폐함을 통해 보여주셨습니다. 그들을 구원하시는 유일한 방법은 그들이 책임져야 할 죄와 어리석음을 완전하게 감당하는 것이었고, 그것은 신의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이었습니다. 3. 우리는 알고 있을까? 우리는 마가복음 10장에서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했던 요청과 제자들의 반응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들 모두는 영광의 보상을 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거듭 십자가와 죽음에 대해 말씀하셨지만 그들의 관심과 고민은 다른 곳에 있었습니다. 들리지 않았고,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반응에 늘 조소하고 비판합니다. 좋은 설교의 주제이고, 우리는 그들과는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과연 그렇습니까?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인류에게 보이신 신적인 영광이 몇 장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실 때입니다. 천군천사들이 찬양하며 영광을 돌렸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4) 짐승들의 우리에서 태어난 메시야,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갓난아기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셨습니다. 또 다른 장면은 세례를 받으실 때입니다. 하나님께서 요단강에서 사람의 손에 세례를 받으신 것입니다. 삼위 하나님께서 처음으로 같은 자리에 임재하셨습니다. 성부 하나님의 기뻐하심과 성령 하나님의 운행하심이 성자 예수님 위에 충만했습니다. 마지막 장면은 변화산에서 기도하실 때입니다. 삼위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놓고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예수님이 어디에서 무엇을 할 때 나타났습니까? 낮고 겸손하고 헌신하며 희생할 때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섬김을 통해서 가장 크게 영광받으셨습니다. 따라서 십자가는 예수님의 영광의 길의 절정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십자가 없는 영광, 죽음이 없는 영생을 원했습니다. 예수님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10:4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너희’는 제자들만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을 읽는, 십자가를 외면하고 영광을 사모하는 우리들 모두를 향한 말씀입니다. 4. 참된 미덕의 본질(The Nature of True Virtue) 2007년 1월 7일 뉴욕 타임즈에는 ‘행복의 기본’이라는 기사가 떴습니다. 이 기사에는 행복의 조건을 심리학의 한 갈래인 ‘긍정 심리학’을 통해서 설명했습니다. 이 분야의 전문가들이 경고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자신에게 즐거운 일을 하면 행복해진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긍정 심리학자들은 즐거운 일만 하려고 하다 보면 ‘쾌락의 쳇바퀴’에 빠진다고 말합니다. 즐거움에 중독되어 자꾸 더 자극적인 즐거움을 추구한다는 것입니다. 더 추구해야 할 즐거움이 있다고 생각하는 이상 참된 만족이나 행복은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인생의 행복 증진에 가장 좋은 방법은 ‘이타적인 마음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더 깊은 인간적 관계와 사랑, 삶의 목적과 의미의 나눔 등을 통해서 인간안 보다 나은 행복을 경험하게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간과하는 것이 있습니다. 보편적으로 이기적으로 사는 삶보다 이타적인 삶이 나은 것은 동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행복해지기 위해 이타적으로 사는 것은 결국 이기적인 동기의 다른 얼굴에 불과합니다. 내가 행복하기 위해서 남을 돕는다는 것은 남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더욱 간절하게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기적인 동기로 이타적인 삶을 사는 것 - 이것이 진정한 행복을 가져올 수 있을까요? 신앙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복을 받고 천국에 가고 영생을 누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좌의 좌우에 앉기 위한 충성과 헌신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참된 신앙적 동기라고 볼 수 없습니다. 우상의 자리를 하나님의 자리로 바꿔 놓는 것일 수 있습니다. 나를 위한 하나님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설교자이며 신학자인 조나단 에드워드(Jonathan Edward)는 ‘참된 미덕의 본질’(The Nature of True Virtue)라는 책에서 이 문제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성도가 선한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는 의무감이나 도덕적 우월감에 있지 않습니다. 그 정도는 다른 종교나 철학에서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천국에 갈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도 아닙니다. 우리의 선한 삶이 천국으로 가는 길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혹 죄책감이나 부채의식도 곤란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부정적인 감정을 사용하여 영광을 얻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자존감을 높이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성도와 교회가 추구하는 참된 미덕의 본질은 ‘십자가’입니다. 우리에게 허락하신 은혜에 대한 감사와 감격이 내면의 동기가 됩니다. 우리를 위해 사람이 되시고 십자가에서 죽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나의 내면에서 역사하고 있습니다. 나는 순종하고 따르고 헌신합니다. 이것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는 참된 미덕의 본질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 땅에 내려온 것은 신이자 메시야로 섬김을 받고자 함이 아니다. 나는 오직 섬기러 왔다. 나의 생명을 너희들을 위해 내어주기 위해서 왔다. 나의 죽음이 너희들의 죄의 대가를 치르고 너희를 아버지께로 인도할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물으십니다. “나를 믿느냐?” 우리는 마음으로 대답해야 하고, 입술로 대답해야 하고, 삶으로 대답해야 합니다. |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