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King's way 14. 만민을 위한 길(막 11:11-18) | 이응도 | 2019-08-21 | |||
|
|||||
초대교회 수요 예배 마가복음 King's Cross 14. 만민을 위한 길(막 11:11-18) 예수님의 자기 선언 중 하나는 ‘길’입니다. 'One Way Jesus'라는 구호 또한 예수님의 의미를 ‘길’이라는 관점에서 선언하고 있는 것이라 보겠습니다. 그 길은 어떤 길이며 누가 걸어야 하는 길일까요? 누구에게 열려 있고, 누구에게 닫힌 길일까요? 1. 나귀를 타시다. 마가복음 11장은 오랫동안 준비하셨던 예루살렘 입성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장면은 다소 충격적입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상징하는 것은 군마(軍馬)가 아닌 나귀였습니다. 의도적인 것이고, 이스라엘이 당연히 그 의미를 알고 있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나귀입성은 스가랴에서 이미 예언되었기 때문입니다. “나귀 새끼를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어 놓으매 예수께서 타시니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또 다른 이들은 들에서 벤 나뭇가지를 길에 펴며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 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막 11:7-10)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슥 9:9) 유대인들은 왜 예언된 메시야의 나귀 입성을 보면서 예수님이 메시야임을 받아들이지 못했을까요? 그것은 그들이 듣고 싶은 것, 상상하고 싶은 것, 그들의 소원과 관련된 것들만 받아들이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메시야 복음에 대해 열려 있었다면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는 사건을 예언의 성취로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하지만 구약에 정통했던 당시 종교 정파들은 모두 예수님의 입성을 각각의 이유로 외면했습니다. 바리새인이나 서기관, 제사장들이나 장로들, 그리고 열심당원들이나 헤롯당원들뿐만 아니라 심지어 세례요한의 신앙적 전통이 깃들어 있는 광야 중심의 엣세네파도 침묵했습니다. 그들은 모두 그들의 소원과 소망으로 해석된 메시야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있었고, 예수님의 나귀입성은 그들의 기대와 충돌했습니다. 하지만 성경의 의도는 분명합니다. 스가랴의 예언과 마가복음에서의 예언의 성취는 요한 계시록에서 장차 오실 메시야로 다시 예언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은 예수님의 나귀입성과 맥락을 같이 합니다. “장로 중의 한 사람이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겼으니 그 두루마리와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한 어린 양이 서 있는데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그에게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들은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계 5:5-6) 계시록에서 예수님은 두 동물로 상징됩니다. 하나는 사자입니다. 다른 하나는 죽임당한 어린 양입니다. 사자가 만왕의 왕으로서의 메시야를 상징한다면 죽임당한 어린 양은 메시야가 이 땅에서 사역하시는 방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백성을 위해 죽임 당하신 왕’의 모습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의 내용이자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는 예수님의 ‘마음그림’입니다. 2. 만인을 위한 성전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이 가장 먼저 찾으신 곳은 성전입니다. 헤롯의 왕궁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왕권’이 무엇을 지향하는지 잘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전에 들어가사 모든 것을 둘러보시고 때가 이미 저물매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베다니에 나가시니라”(막 11:11) 성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차근히 둘러보신 예수님은 베다니로 물러가십니다. 다음 날 다시 성전을 찾으신 예수님이 하신 일이 있습니다. 성전을 깨끗하게 청소하시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성경은 이 사건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며 아무나 물건을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매”(막 11:15-17) 당시 예루살렘 성전의 경내로 들어가면 ‘이방인의 뜰’이 있었습니다. 이방인들은 이곳까지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성전 전체로 보면 가장 넓은 곳이면서 성소가 있는 유대인의 뜰로 가려면 반드시 이곳을 지나야 합니다. 마가복음 11장에서 예수님이 청결케 하신 장소는 바로 이곳입니다. 유대인들이 제사를 드리기 위한 모든 준비와 매매가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이곳에는 짐승을 사고파는 수십개의 노점상들과 환전소가 있었고, 수천명이 짐승들의 울음소리와 함께 와글거리는 곳이었습니다. 고대 역사가 요세푸스는 당시 유월절 주간에 성전의 뜰에서 255,000마리의 양들이 거래되고 제물로 드려졌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의 뜰’을 자신들의 제사의 편의를 위한 매매의 장소로 바꾸고 그곳을 지나 유대인들만의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곳을 청소하시면서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하여 중요한 선언을 하십니다. “내가 곧 그들을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을 나의 제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사 56:7) 예수님은 이 말씀을 인용하여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다!”고 선언하셨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그들이 소망하는 메시야가 도래하면 이 세상의 모든 이방인들을 청소하고 오직 이스라엘만 하나님의 영광의 나라로 세워질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방인들의 구원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이사야서에서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는 중요한 예언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듣지 않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성전의 뜰을 더럽히는 유대인들을 청소하시고 ‘만인이 기도하는 집’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만민’이라함은 이스라엘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방인의 뜰에서 장사하는 유대인을 내쫓으시고, 그곳이 이방인들로 가득 차게 될 것이며, 심지어 성소와 지성소에까지 이르러 그들이 하나님과 교제하게 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예언만으로도 그들이 예수님을 죽일 수 밖에 없었던 충분한 이유가 됩니다. 3. 불의 칼 어떻게 이방인들이 이방인의 뜰을 넘어서 성소로 들어갈 수 있을까요? 창 3:24에서 범죄한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후 다시 그들이 에덴으로 돌아오는 길을 막으셨다고 했습니다. 그 막으신 방법이 ‘두루 도는 불 칼’입니다.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창 3:24) 이것은 단순히 불타는 칼로 사람이 가는 길을 막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범죄한 인류가 에덴, 즉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으로 다시는 나갈 수 없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이 자신의 능력과 자격으로 하나님과의 교제를 회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잃었습니다. 다만 하나님은 은혜와 긍휼을 베푸셔서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을 그림자로 맛볼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막이었고, 성전이었습니다. 그 한 가운데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지성소가 있었습니다. 대제사장이 1년에 한번 대속죄일에 짐승의 피를 뒤집어쓰고야 비로소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인류의 죄로 말미암아 발생한 이 장벽은 엄격했고 견고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통해서 여러 번 이 장벽이 허물어지고 새로운 길이 날 것을 예언했습니다. 이사야와 하박국은 하나님의 영광이 온 세상과 모든 민족에게서 드러날 것을 시적으로 예언했습니다.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사 11:9)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함이니라”(합 2:14)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그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온 세상에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이방인들의 구원을 상징하는 장면입니다. 성전의 벽에 갇혀 있는 지성소가 아니라 물이 바다를 엎는 것처럼 온 세상에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이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일이 모든 민족에게 일상적으로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어떤 민족, 어떤 나라에서도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기도하는 모든 곳은 하나님과의 교제가 일어나는 지성소가 됩니다. 아담과 하와 앞에서 하나님께로 회복되는 길을 막고 있던 불의 칼은 이제 의미가 없습니다. 어떻게 이런 놀라운 일이 가능합니까? 예수님께서 불의 칼을 막아주시는 방패가 되시기 때문이고, 모든 장벽을 넘어서는 길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민족의 구원을 위한 길이 되십니다. 만민을 위한 생명의 길, 오직 예수입니다. 4. 열매 맺는 성도와 교회가 됩시다. 예수님의 첫 번째 성전 방문과 두 번째 방문 사이에 우리는 베다니에서 독특한 한 사건을 만납니다. 그것은 무화과나무를 마르게 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다소 당황스럽기도 합니다. 팀 켈러 목사는 이 사건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일반적으로 중동의 무화과나무는 두 가지 열매를 맺습니다. 무화과가 열리기 전 봄에 나뭇잎이 나기 시작하면 가지마다 요깃거리로 꽤 괜찮은 작은 혹들이 생깁니다. 나그네들은 이 혹을 먹곤 했습니다. 지금 예수님이 성전을 찾으시는 유월절 정도에 기대할 수 있는 열매는 무화과 자체가 아니라 가지마다 맺히는 혹이었습니다. 만일 봄철 무화과나무에 이 혹을 찾을 수 없다면 그 무화과나무는 속병이 든 것입니다. 예수님은 철이 아직 아닌 나무에 대고 화를 내신 것이 아니라 봄철 유월절의 시기에 나그네들이 먹던 혹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이 나무가 병들어 있다는 진단을 내리신 것입니다. 이 사건은 당시 유대인들과 제자들은 이해할만한 상황이었습니다. 이 사건을 예수님의 첫 번째 성전 방문과 두 번째 방문 사이에 둔 것은 매우 상징적입니다. 아직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 그때가 임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때를 위해 지금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완전한 무화과 열매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그네를 쉬게 하고 요기하게 했던, 불완전할지라도 때가 되었을 때 탐스러운 무화과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과정으로서의 성장과 변화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병든 무화과나무와도 같은 유대인들과 성전을 청소하십니다. 잎사귀만 무성하고 그 성장과 변화의 시기에 합당한 결과를 만들지 못하는 그들을 책망하십니다. 그 책망은 오늘 우리들에게도 유효합니다. 예수님의 성전 청결 사건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나아가는 길을 가로막고 있는 유대인들의 편견과 아집을 청소한 사건이며, 자신을 낮추어 모든 민족이 구원과 생명의 길을 걸을 때 기꺼이 그들에게 밟히는 길이 되시는 사건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 길 위에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그 길에 합당한 삶의 열매를 맺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잎사귀만 무성한 무화과나무가 아닌 우리의 왕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삶에서 열매로 맺히는 성도와 교회를 기대합니다.
|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