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King's Way 16. 아버지의 원대로(막 14:32-36) | 이응도 | 2019-08-21 | |||
|
|||||
초대교회 수요 예배 마가복음 King's Cross 16. 아버지의 원대로(막 14:32-36) 서머나 교회의 감독이었던 폴리갑(Polycarp)을 예로 들어보자. 죽기 직전 폴리갑은 총독에게 끌려가 화형을 당할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마지막으로 한번 더 기회를 주겠다. 기독교를 버리면 형 집행을 취소하겠다.” 총독의 말에 폴리갑은 이렇게 대답했다. “당신이 붙인 불은 기껏해야 한 시간쯤 타다가 꺼질 뿐입니다. 당신은 다가올 심판의 불이 얼마나 맹렬한 지 모르고 있습니다. 왜 망설이십니까? 어서 당신의 뜻대로 하십시오.” 1555년 영국 옥스퍼드에서 믿음 때문에 화형을 당한 니콜라스 리들리(Nicholas Ridley)와 휴 래티머(Hugh Latimer)는 또 어떤가? 나란히 묶이고 발에 불이 붙자 래티머가 말했다. ”니콜라스 선생, 남자답게 당당히 죽읍시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영국에 엄청난 불길을 일으킬 거요. 이 불길이 절대 끝나지 않으리라 굳게 믿소.“ 악법도 법이라고 말하면서 독약을 담담하게 마신 소크라테스의 이야기는 유명합니다. 어쩌면 그렇게 죽음 앞에 당당할 수 있을까요? 말라기 이후의 유다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마카베오1,2서에는 하나님의 택하신 나라 이스라엘을 구하기 위한 용사들의 영웅적 투쟁이 묘사됩니다. 그들은 정열적이고 대담하게 목숨을 던집니다. 사지가 찢기면서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모습이 그려집니다. 초대교회의 순교자들의 모습 또한 그렇습니다. 몸이 불타오르는 중에 하늘을 바라보았고, 십자가에 매달려 죽어가면서도 용서하고 찬양했다고 전합니다. 그들은 꽤 의연하고 멋있는 죽음을 선택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그들의 믿음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놀라고 슬퍼하고 죽을 지경에 이르기까지 고민하셨습니다. 연약한 제자들에게 기도를 부탁하셨습니다. 복음서에서 제자들은 십자가 처형을 앞두고 있는 예수님을 다양한 각도로 묘사했습니다. 담담하게 자신의 죽음을 거듭 예언하시고, 그 죽음에 반대하는 제자들을 꾸짖기도 하십니다. 죽음이 준비된 예루살렘으로 자원하여 가시고, 원수들이 기다리는 성전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에서 예수님의 행동이 아닌 내면의 이야기는 조금 다릅니다. 언제나 당당하고 의연하셨던 예수님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고민하고 있습니다. 십자가 사건을 앞두신 예수님의 내면 -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이며 성경은 왜 우리에게 이 장면을 보여주고 있는 것일까요? 1. 놀라고 슬퍼하고 고민하다. ‘심히 놀라다’는 표현은 좀 생경합니다. 놀라는 일은 우리가 잘 모르는 일을 갑자기 만났을 때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고난의 내용이나 정도를 모르셨을까요? 예수님의 마음을 표현하는 두 번째 단어를 만나면 좀 이해가 됩니다. ‘슬퍼하다’라는 표현은 ‘공포에 사로잡히다’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이 막연한 미래가 아닌 직접 대면하여 만나는 현실이 되었을 때 생기는 정서적 반응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신앙의 모티브가 되는 신의 죽음, 자신의 구체적인 고난을 만나는 예수님은 이렇게 고뇌하시고 아파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면서 깨닫고 보게 된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예수님은 왜 이렇게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와 같이 십자가 앞에서 흔들리고 있었을까요? 감당해야 할 십자가의 고통이 그렇게 두려운 것이었을까요? 2. 잔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예수님의 기도의 핵심은 ‘잔’에 있습니다.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예수님은 괴롭게 한 것은 곧 다가올 육신의 고난이 아닌 이 ‘잔’이었습니다. 물론 이 잔은 육신의 고난을 통해서 실현됩니다. 예수님은 왜 십자가의 고난을 ‘잔’에 비유하실까요? 구약에서 ‘잔’은 인간의 악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상징했습니다. 인간이 만든 불의한 삶의 조건에 대한 하나님의 정의를 의미했습니다.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깊고 크고 가득히 담긴 네 형의 잔을 네가 마시고 코웃음과 조롱을 당하리라 네가 네 형 사마리아의 잔 곧 놀람과 패망의 잔에 넘치게 취하고 근심할지라 네가 그 잔을 다 기울여 마시고 그 깨어진 조각을 씹으며 네 유방을 꼬집을 것은 내가 이렇게 말하였음이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겔 23:32-34) “그러므로 너 곤고하며 포도주가 아니라도 취한 자여 이 말을 들으라 네 주 여호와, 그의 백성의 억울함을 풀어 주시는 네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비틀걸음 치게 하는 잔 곧 나의 분노의 큰 잔을 네 손에서 거두어서 네가 다시는 마시지 못하게 하고 그 잔을 너를 괴롭게 하던 자들의 손에 두리라 그들은 일찍이 네게 이르기를 엎드리라 우리가 넘어가리라 하던 자들이라 너를 넘어가려는 그들에게 네가 네 허리를 땅과 같게, 길거리와 같게 하였느니라 하시니라“(사 51:21-23) 잔은 하나님이 패역한 세대에 대해 부으시는 진노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잔이 예수님 앞에 놓여 있습니다. 이 잔을 마시는 방법은 예수님이 십자가의 제단에 제물로 드려지는 것입니다. 만일 이것이 거룩한 희생일 때... 아름답게 포장할 수 있습니다. 의로운 선택일 때... 위대해 보일 수 있습니다. 만인을 위한 고통일 때... 존경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죽음을 앞두고 발견한 십자가에 대한 진리는 이것이 바로 범죄하고 타락한 피조물인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잔이라는 사실입니다. 거룩하고 아름다운 말로 포장할 수 있는 헌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되는 삶을 선택해온 인류의 모든 죄와 악에 대한 책임이 넘실거리는 잔에 불과하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무엇에 대해 흔들리고 놀라고 두려워하고 고민했을까요? 당하실 십자가의 고통일까요? 그 고통은 완전한 사람으로 오셨던 예수님의 선택보다 컸을까요? 예수님의 고민은 그 고통에 있는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이미 그 낮아짐과 고통에 대해서는 충분히 제자들에게 설명하셨고 마음으로 준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고민의 핵심은 ‘잔’에 있습니다. 3. 분리 저는 좀 늦게 군에 들어갔습니다. 27세의 나이, 대학원을 마치고 약혼을 한 상태에서 입대를 하게 되었습니다. 전날까지 사람들을 만나고 먹고 즐겼습니다. 그리고 공군교육 사령부로 가는 버스에서까지 마음은 좀 무거웠지만 견딜 만 했습니다. 당시 약혼을 했던 아내와 교회 청년들이 동행했습니다. 진주 금산 공군 교육 사령부 후문에서 버스를 내렸고, 입소하는 청년들이 쭈뼛쭈뼛 모여들었습니다. 공군에서 제공하는 버스에 올라타고 사회와 군의 경계를 넘어서는 철문을 지나는 순간을 잊지 못합니다. 돌아보니 청년들이 손을 흔들고 있었고 아내는 울고 있었고.... 그리고 저 역시 울컥하고 있었습니다. 군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까...? 오랫동안 고민했었고, 공군장교라는 꽤 좋은 옵션이 나타났고, 그래서 지금 버스를 타고 있는 것인데.... 뛰어내려서 돌아갈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마음에 준비하지 않은 것 아니고, 이 현실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었지만, 조금 전까지 만나고 웃고 이야기하던 사람들을 뒤로 하고 이미 내릴 수 없는 버스를 타고 보니 느낌과 생각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마음에 마치 위산이 정말 과하게 과다분비되는 듯 한 느낌을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마신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분리를 의미합니다. 하나님과 분리된다는 것은 예수님의 하나님으로서의 자기 존재와 정체성을 부정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이신데 하나님의 진노의 잔, 심판의 잔을 마시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부터 분리되고 죄의 결과인 영원한 진노와 심판을 경험하게 됩니다. 사흘 만에 부활하실 것이기 때문에 잠간의 고통만 견디면 된다고요? 하나님의 시간개념을 이해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사람에게는 현재와 미래와 과거가 구별됩니다.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하십니다. 하나님의 한 시점은 영원과 통하고 영원한 한 시점과 통합니다. 인류의 죄와 악, 그리고 그 결과로서 감당해야 할 하나님의 진노의 잔은 그것을 마시는 순간.... 하나님의 영원이 됩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그 진노의 잔을 마신, 하나님과의 분리된 상태로 영원을 경험하십니다. 시간 속에 허락하신 인류의 구원의 모든 계획이 마칠 때까지, 그래서 시간이 사라질 때까지 하나님 안에 진노의 잔이 존재합니다. 심판과 구원이 함께 존재합니다. 구원은 성도와 교회에 대해 존재한다면 심판은 하나님 자신에 대해 존재합니다. 예수님의 심히 놀라심과 공포와 고민은 이미 예상했던 하나님과의 분리가 현실이 되는 상황에서 만나는 자신의 모습입니다.
4. 아버지의 원(願)대로 예수님의 고통에 대한 가장 큰 오해는 ‘고통에 대한 신적 초월’입니다.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능력으로 초월하실 수 있었을까요? 만일 그렇다면 예수님의 성육신은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 잔이 지나가기를 간구하셨습니다. 사람이 느낄 수 있는 육체적, 심리적 고통보다 훨씬 깊고 고통스러운 잔이었습니다.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지 않습니까? 이 잔을 옮길 수 있을까요?” 고통을 부정하거나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고통은 현실이면서 직접적입니다. 예수님은 혹시 다른 길이 있는지 물으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상황을 자신의 의도와 뜻으로 바꾸지 않으셨습니다. 자격이나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순종하셨기 때문입니다. 상황에 대한 통제권을 내려놓고 자신의 욕구를 하나님의 뜻 앞에 복종시켰습니다. “나의 소원이 아닌 하나님의 소원”에 초점을 맞춥니다. 일반적으로 우리의 삶에서 가장 격렬한 욕구가 진정한 욕구일 때가 많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이 가장 격렬하게 정서적으로 반응하고 있는 욕구는 바로 ‘잔’을 피하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를 경험하는 순간입니다. 신으로서의 자기를 부정하고 죄에 대한 책임만 온전히 감당해야 합니다. 이 길이 아닌 다른 길을 찾을 수 있을까요? 예수님의 고민하는 마음은 진실되고 솔직한 욕구의 표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욕구를 넘어서는 믿음의 힘을 보이십니다. 자신의 욕구가 아닌 하나님의 뜻이 승리하는 삶을 선택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택하시고 보이셔야 하는 가장 소중하고 가치있는 욕구는 ‘하나님의 뜻과 나라가 이 순간 임하는 것’입니다. 이 순간이 예수님의 영원과 소통하고 예수님의 영원은 이 순간 하나님의 뜻과 나라로 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순종은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넘치게 채우고 그것을 은혜의 강물로 바꿀 수 있는 사랑과 능력의 샘이 됩니다. 자신의 욕구를 이루려 하거나.... 보다 나은 가치를 위해 욕구를 부인하거나.... 보다 고상한 길로 가기 위해 감정을 부정하거나.... 상황을 바꾸므로 내 욕구를 정당화하거나.... 예수님은 이 어느 방법도 선택하지 않으셨습니다. 고난의 중심에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그 길을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를 위해 잔을 드신 예수님을 묵상하면서 하나님의 뜻으로 사는 오늘을 소망합니다. 그 길 위에 우리가 있습니다. |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