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King's Way 17. 입맞춤(막 14:43-49) | 이응도 | 2019-08-2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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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 수요 예배 마가복음 King's Cross 17. 입맞춤(막 14:43-49) 플로리다 대학의 역사학 명예교수인 존 서머빌(John Sommerville)은 학생들에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먼저 상황을 제시합니다. 한 밤 중입니다. 아주 작은 체구의 할머니 한 분이 눈에 띄게 큰 지갑을 들고 거리를 걷고 있습니다. 많은 돈이 들어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 할머니를 보고 있는 나는 거리를 떠도는 홈리스입니다. 먹을 것을 구하지 못한 지 몇일이 지났고, 편히 잘 곳을 찾지 못한 지도 오래되었습니다. 나는 그 할머니에게 지갑을 빼앗을까요? 내가 아니라도... 이 부도적한 거리를 떠도는 부랑자들이 저 할머니의 지갑을 강탈할 것인데... 차라리 내가 빼앗아 버리는 것이 낫지 않을까요? 학생들은 대부분 그래도 할머니의 지갑을 빼앗지는 않는다는데 손을 듭니다. 서머빌 교수는 그 이유를 묻습니다. 대답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뉩니다. 첫째 약자를 괴롭히거나 힘으로 재화를 강탈하는 일은 나쁜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회적인 지탄을 받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괴롭습니다. 명예롭지도 자랑스럽지도 않습니다. 가난하게 살지언정 수치스럽게 살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서머빌 교수는 이런 생각을 자기중심적 가치에 근거한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자신과 자기 주변의 사람들의 명예와 평가를 중요하게 여기는 판단이라고 합니다. 둘째 강도를 만난 할머니가 얼마나 힘들고 괴로울까를 고민하는 것입니다. 저 할머니에게는 손에 움켜쥐고 있는 가방이 전부일 수 있고, 저것이 없으면 할머니뿐만 아니라 할머니를 기다리는 손주들까지 배고플 수 있을거야.... 라는 상상을 하는 것입니다. 정말 나 개인의 삶의 비루함과 고통이 절정에 도달하고, 명예나 자부심도 너덜너덜해질 때.... 내 속에 동물적인 본성만 남아 있는 것 같을 때에도.... 내가 다른 사람의 고통을 전제하는 만족을 얻지 않겠다는 판단이라고 합니다. 서머빌 교수는 첫 번째 대답을 명예 중심의 윤리 체계라고 말합니다. 이 윤리의 체계는 자기중심적입니다. 두 번째 대답은 관계 중심의 사고입니다. 이것은 이타적인 윤리에 중심을 둡니다. 명예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회에서는 겸손보다는 자부심을, 섬김보다는 지배를, 평화보다는 용기를, 수수함보다는 영광을, 만인에 대한 존중보다는 권력에 대한 충성을, 평등보다는 관대함을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또 다른 가치를 만나거나 자기 윤리의 한계를 만나면 쉽게 무너집니다. 명예도 윤리도 결국 자기만족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넘어서는 가치가 도전하면 무너지게 됩니다. 오늘의 미국 사회가 그렇습니다. 매우 수준 높은 교양을 갖춘 것처럼 보이지만 차별적이고 폭력적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 근동지방을 지배하던 그리스 로마 사회의 문명적 가치가 그랬습니다. 수준 높은 시민 사회의 가치를 개발하고 있었지만 노예를 소유했고, 전쟁과 수탈이 그 사회를 지탱하는 힘이었습니다. 이런 생각은 오늘날 우리도 모르는 사이 교회와 성도들의 가치 체계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현대 사회를 지탱하는 상식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1. 가치 리스트 요즘 한반도를 둘러싼 정세가 만만치 않습니다. 현대 국가는 대부분 투표를 통해서 정부를 선택합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정부를 구성하겠다고 주장하는 정치 집단을 선택합니다. 그들은 일정한 가치의 체계를 가지고 국민을 설득하고 표를 얻어서 국가를 운영할 자격을 얻습니다. 요즘 한국과 일본의 갈등관계 속에서 현 정부의 입장과 제일야당의 입장은 명확하게 갈립니다. 물론 그들로 대표되는 국민들의 의견 또한 갈립니다.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는가? 국가의 미래를 어떻게 상상하고 있는가? 그러므로 누구의 손을 잡고 누구와 벽을 세울 것인가? 모든 결정을 그 정부를 구성하는 정치 집단과 그들을 지지하는 국민이 가진 가치의 체계에 답이 있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세상에 전하신 하나님 나라의 가치체계와 예수님의 눈에 비친 세상의 가치체계를 비교합니다. 누가복음 6장에서 가치 리스트를 비교해 봅시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이르시되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인자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그들의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눅 6:20-23)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그들의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눅 6:24-26)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와 이 세상을 비교한 가치리스트의 차이가 보이십니까? 23절과 26절, 예수님이 언급하시는 마지막 말씀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유대인의 조상들이 선지자들과 거짓선지자들에게 어떻게 대했는지를 구별하십니다. 오늘 세상이, 이 세상의 문화와 권력이 교회를 어떻게 대하고 있습니까? 복음으로 살기를 원하는 교회와 성도들에게 세상은 거울이 되어 되돌아보게 합니다. 2. 입을 맞추다. 신약성경이 기록되던 시기, 근동지방은 남성문화가 지배적이었습니다. 남성들 간에 가장 친밀한 관계와 존경의 확인으로 서로 입맞춤을 했습니다. 스승과 제자, 형제들, 그리고 친구들 사이에서 가능한 행위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여러 교회에 보내는 서신에서 ‘거룩한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할 것을 권면했습니다.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모든 형제에게 문안하라”(살전 5:26) “너희가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그리스도의 모든 교회가 다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롬 16:16) 고전 16:20과 고후 13:11에도 같은 표현을 사용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 또한 서로에게 존경과 사랑을 표현하는 입맞춤은 이상한 행위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우리는 거룩하지 않은, 가장 악한 입맞춤의 장면을 봅니다. 그것은 악한 의도로 계획되었으며, 속이는 행위이고, 이전의 모든 신뢰와 존경의 가슴이 칼을 꽂는 행위였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제자 중 한 사람이 예수님께 했던 배반의 칼날이었습니다. 그것은 세상이 끊임없이 교회에 대하여 내미는 유혹과 시험이며 도전입니다. 공존할 수 없는 두 가치가 충돌하는 현장이면서 평화를 가장한 잔인한 폭력이 자행되는 현장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주권에 순종하는 스승과 이 세상의 논리와 힘에 양심과 신앙을 맡겨버린 한 제자가 각자 자기 안에 있는 가치의 체계로 서로를 만나는 현장입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에게 입을 맞췄습니다. 3. 강도 vs. 성경 ‘강도’로 번역되는 이 단어는 원래 기존 정치체제를 전복하고 새 정치질서를 세우기 위해 폭력적인 방법을 사용하는 운동을 의미합니다. 정치적으로 해석하자면 ‘혁명’에 준하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꾸짖으신 말씀을 이런 관점해서 해석하면 다음과 같이 서술할 수 있습니다. “너희는 내가 세상의 권력을 원하는 줄 알고 무기를 들고 나를 잡으러 왔구나. 그러나 나는 오랫동안 세상을 다니면서, 성전에서 가르친 바와 같이 세상의 권력을 원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성경이 말하는 대로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하기 위해 이 세상에 왔다. 나는 너희들이 가진 질서의 머리가 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질서를 전하고 있다.” 두 세계의 질서가 충돌하는 현장에서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몇 가지 대조점이 있습니다. 첫째는 질서를 획득하고 유지하는 방법입니다. 예수님은 유다와 함께 온 유대의 병정들의 손에 들고 있는 검과 몽치를 지적하십니다. 그것은 세상의 권력을 획득하고 유지하는 수단이 됩니다. 그들이 그것을 들고 예수님을 찾은 이유는 그들의 세계관 속에는 예수님 또한 그것으로 자신들과 다툴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둘째 제자들의 반응입니다. 세계관의 충돌은 예수님과 유대의 권력 사이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가룟 유다는 이미 세상의 권력에 마음과 삶을 정복당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들의 내면을 전쟁터로 내어주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칼을 빼어들었습니다. 아무리 예수님께서 말씀하여 가르쳐도 그들의 본능은 유대의 권력과 닮아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질서에 맞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여전히 마음과 삶을 세상에 내어주고 있었던 제자들은 결국 도망치고 맙니다. 마가가 잊지 않는 한 장면,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잡히신 예수님을 따라가다가 병정들에게 잡히자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을 친 제자도 있습니다. 세상의 권력에 길들여지고 그 방법을 포기하지 못한 제자들은 패잔병이 되어 세상의 한 구석에 숨어들고 말았습니다. 셋째 예수님의 방법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오르십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았던 세상이 왜 예수님에게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유혹할까요? 세상이 예수님에 대해 시작한 싸움, 예수님이 세상에 대해 벌여놓은 전쟁은 ‘가치’에 관한 것입니다. 그것을 누가 소유하는가에 대한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정하신 세상을 구원하시는 방법, 신의 죽음을 통한 구원의 길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눈물과 땀과 피를 쏟으며 기도하실 때, 고난의 잔을 피할 수 있는지를 기도하셨던 예수님은 그것이 하나님의 뜻일 때 그 잔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그 잔을 품고 십자가를 오르셨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의 방법은 하나님의 나라의 질서 속에 있는 것이고, 목적이 하나님의 나라일 때 방법 또한 하나님의 나라임을 증명하여 보여주고 있습니다. 4. 승리하고 있습니까? 오늘 우리는 매일 가치의 충돌을 경험하며 삽니다. 우리는 가룟 유다이며 베드로이며 마가입니다. 우리의 삶에는 패배한 가치의 잔재들이 여기저기 남아 있고, 승리한 가치가 마음의 주인이 되어 삶을 움직이고 있습니다. 살아가는 겉모양은 비슷한 것 같지만 삶의 목적과 방향은 엄청난 차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이스라엘의 1대 왕인 사울과 2대 왕인 다윗은 그 출발이 비슷합니다. 그들의 왕위는 혈통적 계승이 아닌 하나님의 택하심과 기름 부으심에 있었습니다. 평안할 때 그들의 차이는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왕권을 행사하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전쟁에 나가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예배했습니다. 하지만 위기가 찾아왔을 때 그들 속에 있는 질서가 드러납니다. 사울의 위기는 오히려 전쟁에서 승리했을 때 찾아옵니다. 그는 모든 백성과 장로들 앞에서 높아지기를 원했습니다. 아직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로부터 지지를 받는 왕은 아니라고 스스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거짓말을 했고, 자기를 높이는 제사를 드렸고, 선지자를 겁박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아닌 자신의 영광을 위해 왕권을 행사했습니다. 가치의 전쟁에서 그는 이미 패배했고, 그가 선택한 가치는 그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끌고 갔습니다. 다윗의 위기는 곳곳에 있었습니다. 그는 왕이 되기 전에 이미 수많은 위기 속에 살았습니다. 스스로 고백하기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녔고, ‘원수의 목전’에서 먹고 마셔야 했습니다. 그가 그 모든 위기 가운데 살아남았고, 결국 하나님이 원하시는 왕권을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동행하시는 삶’에 대한 확신 때문입니다. 그의 마음에 빛나는 보석과도 같았던 이 믿음이 그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패배에서 승리의 삶으로 인도하는 길이 되었습니다. 비록 그가 실수 많고 때로 죄 가운데 헤매고 있었을지라도 그의 마음과 삶이라는 전쟁터에서 그는 말씀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십니다. 우리의 가치가 되며 기준이 되며 생명의 길이 됩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세상이 눈앞에 펼쳐져 있습니다. 끊임없이 우리를 유혹하고 시험하고 위협합니다. 우리와 싸움하려 합니다. 우리는 패배하고 또 승리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세상과 하나님 나라에서 시작한 가치들의 전쟁터요 우리의 삶에는 승리의 노래와 부숴진 깃발들이 가득합니다. 세상은 갈고 닦은 그들의 가치를 들고 성도와 교회에게 다가와 입맞춤을 합니다. 싸움이 시작됩니다. 우리 안에 있는 예수, 하나님의 나라의 질서가 세상을 만납니다. 우리가 싸우는 싸움, 믿음의 싸움에서 우리는 승리하고 있습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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