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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King's Way 18. 피는 속일 수 없다.(막 14:50-72) 이응도 2019-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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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 수요 예배 마가복음 King's Cross

 

18. 피는 속일 수 없다.(14:50-72)

 

마이클 더글라스라는 미국 배우가 있습니다. 꽤 많은 영화의 주연으로 활동했습니다. 그에게 한 기자가 묻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연기를 잘하게 되었습니까?” 그가 여유있게 대답합니다. “It runs in the family."(우리 집안의 내력이죠.) 이 말은 ”It runs in my blood."라는 관용구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우리 집안 유전이지요.... 혈통이 그래요... 정도로 번역되겠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마이클 더글라스는 현재 102세로 장수하고 있는 커크 더글라스의 아들입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연기를 보고 자랐고, 배우가 되는 것이 자연스러웠을 수 있습니다. 한국의 대표적인 부자 배우인 박준규씨도 같은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개구장이라도 좋다. 튼튼하게만 자라다오!”라는 인기만점의 CF를 아버지 박노식과 같이 찍었습니다. 자신의 아들이 자신뿐만 아니라 할아버지와 식습관과 취향이 비슷하다고 말하면서 역시 피는 못 속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어릴 적 큰 형은 가끔 왜 자기가 다른 형제들과 다른지 질문을 하곤 했습니다. 작은 형과 저 역시 각각 다르게 생겼어도 다 외탁을 했습니다. 여동생이 친탁을 했지만 큰 형과는 느낌이 다릅니다. 큰 형은 나는 너그들이랑 참 안닮았다...그자...”라는 말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중고등부가 다 같이 해수욕장에 간 일이 있습니다. 형이 저의 허벅지에서 희멀건 무엇인가를 발견했습니다. 저의 허벅지 안쪽에는 자세하게 보지 않으면 발견할 수 없는, 이유를 알지 못하는 마크가 있습니다. 형이 대뜸 물었습니다. “응도 니 그거 언제부터 있었노?” 제가 아주 어릴 때부터 흰 자국이 있었고,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허벅지에 어려서부터 있었다는 오돌토돌하게 만져지는 마크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 재미있게도 큰 형에게도 허벅지 안쪽에 그것이 있었습니다. 우리 이야기를 듣던 작은 형도... “, 나도 그런 거 있는데...” 하면서 보여줬습니다. 우리는 그날 완전 형제애로 거듭났습니다. 특히 어려서부터 자기만 다른 형제와는 다르다고 생각해왔던 큰 형에게는 잊을 수 없는 날이 되었습니다.

 

1. 피는 못속이나보다....

 

큰 형은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결혼을 할 때 알았습니다. 자신의 생모가 생후 7일만에 산후중독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거제도의 한 마을에서 전도사로 교회를 섬기던 아버지는 출산한 아내를 두고 신학교에 공부하러 갔다가 비보를 들어야 했습니다. 그 교회 시무장로셨던 외할아버지는 갈 곳 없는 전도사 사모를 선산에 모셨습니다. 그리고 의도하지 않게 당신의 고명딸이 그 사모의 자리를 대신했습니다. 작은 형과 저와 여동생이 그렇게 출생했습니다.

 

큰 형은 자신이 어릴 적부터 느꼈던 차이를 비로소 이해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외모뿐만 아니라 성품도 많이 달랐습니다. 결혼했던 큰 형이 한참 방황하고 힘들어할 때, 형제들과 대화하기가 힘들었던 때가 있습니다. 큰 형님은 자신의 기억에 없는 생모의 무덤을 자주 찾았었습니다. 말리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런 일이 자주 일어나고 형제들 사이도 서먹해졌을 때.... 친척 어른 중에 한 분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피가 땡기는 갑다....” 동의할 수 없었지만 형님의 행동을 해석할만한 딱히 다른 이유를 찾기도 힘들었습니다.

 

각 문화권에서 혈통에 관한 많은 속담들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면 소위 에 대해서는 모두가 동의를 하는 것 같습니다. ‘부전자전’(父傳子傳/Like father, like son.), ‘모전여전’(母傳女傳/Like mother, like daughter.), ‘씨도둑은 못한다’(The apple doesn’t fall far from the tree. / Blood will tell.)라는 말들이 있습니다. 이런 말들을 부정할 수 없는 것은 가까이 자녀들을 통해서 확인되는 보편적인 사실들이기 때문입니다.

 

2. 부인할 수 있을까?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피를 부인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삶으로 피를 외면하기 전에 피의 의미에 대해 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특별한 만찬을 허락하시고 예수님의 피와 살을 나누셨습니다. “먹고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고 기념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행위를 특별한 예배의 행위로 가르치지 않으시고 먹고 마시는 일을 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특별한 날, 특별한 상황으로 기억하고 행해야 할 일이 아니라 먹고 마시는 일상의 삶에서 일어나야 하는 일입니다. 자신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부인할 수 없는 피가 흐르고 있다는 사실 말입니다.

 

피에 대해 가르치셨던 예수님이 유대의 병정들에게 잡혀갔습니다. 그들 속에는 이미 예수님의 대속의 피가 역사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제자들은 그 피를 부정합니다. 그들은 흩어지고 외면하고 숨어들었습니다.(14:50)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허락하신 믿음, 그들과 나누신 피와 살을 두려움의 땅에 묻어 둡니다. 마가복음 14:51-52에는 한 청년이 등장합니다. 그는 베 홑이불을 두르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당시 베 홑이불은 꽤 부유한 집안에서 잠옷처럼 사용하던 이불이었습니다. 열 두 제자들은 다 도망갔지만 그 제자에 속하지 않았던 한 사람이 호기심과 안타까운 마음을 어쩌지 못해서 잡히신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평소에도 예수님 주변에 있었던 그를 사람들이 쉽게 알아봅니다. 잡힐 위기에 처하자 그는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을 칩니다. 예수님의 피가 역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내면에 있던 두려움이 피를 이긴 것입니다. 예수님이 잡히시던 당시에 칼을 휘둘렀던 베드로 또한 예수님을 쉽게 떠나지 못했습니다. 했던 말이 있고 살아온 삶이 있었습니다. 그는 몰래 예수님의 뒤를 따릅니다. 법정까지 따라간 그는 예수님이 예언하신대로 3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합니다. 곧 수치스런 자신의 모습을 깨닫고 울음 울지만 돌이켜 함께 십자가를 지지는 못합니다.

 

안타깝게도 성경은 그들이 모두 예수님을, 십자가를, 그들을 위해 흘리신 피를 부인하고 외면했다고 증거합니다. 그들 중 누구도 그들을 위해 흘리신 피와 찢으신 살에 합당한 삶을 선택하지 못했습니다. 예수의 피는 그들에게 헛되고 예수의 살은 그들에게 무용한 것처럼 보입니다.

 

3. 본능이 아닌 의지

 

그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찾아오십니다. 죄로 말미암아 허물어진 그들의 본성은 두려움과 이기심에 젖어 있었습니다. 옳은 줄 알지만, 그렇게 하고 싶지만, 분노하지 않는 것 아니고 억울하지 않은 것 아니지만... 일단 살고 봐야 하고, 일단 숨고 봐야했습니다. 그들의 본성은 예수님의 피를 부인하고 외면하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본성을 따라 도망가고 도피했습니다. 믿음은 땅에 묻혔고 삶은 수치로 가려졌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찾아오십니다. 그들의 두려움을 만지고 수치심에 손을 넣어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모든 것을 이기신 주님의 십자가를 경험하라 말씀하십니다. “믿는 자가 되라!”는 말씀은 모든 제자들과 교회에 주시는 주님의 당부입니다. 우리가 죄와 허물의 본성이 아닌 믿음으로 얻은 영적인 의지를 사용해야 할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신앙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의지적인 선택이 없으면 그것은 땅에 묻힙니다. 우리의 두려움과 염려, 수치와 욕심을 의지적으로 넘어서려는 노력이 없다면 예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보혈은 그 아래 묻힌 기억일 뿐입니다.

 

피의 기억을 피하고자 하는 본성은 끊임없이 베드로를 괴롭힙니다. 그는 예수님의 빈 무덤을 보고도 부활을 신뢰하지 못했고, 예수님을 만나고도 갈릴리로 내려갑니다. 성령의 은혜를 체험하고 안디옥 교회를 시험에 들게 하기도 합니다. 죄와 악에 물든 우리의 변질된 본성은 예수님의 피를 속이라고 말합니다. 바울 또한 이 문제로 고민했습니다. 오호라...나는 참 피곤하고 힘든 사람이구나... 나의 죄악된 본성은 끊임없이 나를 공격하고 십자가의 능력을 부인하게 하는구나.... 그는 자신이 대해 탄식하고 절망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면전에서 저주하며 맹세하며 피를 부정했던 베드로는 결국 복음을 위해 삶을 바쳤고, 예수님처럼 십자가를 지는 삶을 선택했습니다. 자기 안에 두 가지 욕구가 있음을 깨달은 바울의 고백을 봅시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7:21-25) 바울은 자기 안에 흐르는 를 기억합니다. 그것은 본능이 아닌 영적인 의지입니다. 의지적인 선택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성경 가운데 가장 복음적인 장인 로마서 8장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8:16-18) 바울은 믿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며 예수님과 같은 피를 선물로 받았으며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함을 믿습니다. 그리고 생각합니다. 이 땅을 살면서 본성이 아닌 믿음으로 살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두려움과 욕망이 아닌 믿음과 소망으로 살아야 하는 이유는 그 열매가 비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삶이 하나님 안에서 옳기 때문입니다.

 

4. 피를 속이지 않는 사람들

 

예수는 믿는다는 것은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예수의 피에 순종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의 유전자, 예수의 본성, 예수의 삶을 따르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를 믿는데 예수를 증거하지 못하는 것은... 둘 중에 하나입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이거나 피를 속이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함부로 말하기 어렵겠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놓인 일이고, 하나님만이 아시는 영역입니다. 다만 피를 속이는 일에 대해서는 우리가 서로를 경계하고 격려해야겠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혈통에 대해서도 우리는 말하기를 좋아합니다. 각 문화마다 수많은 말들을 만들었고, 피는 속일 수 없는 것이라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를 믿음으로, 그의 성찬에 참여함으로 흐르는 예수의 피를 삶으로 부정할 때가 많습니다. 예수 닮은 삶을 포기할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인류의 역사에 나타난 지 2000년이 지나도 여전히 우리는 십자가와 부활 사이에... 두려움과 염려 사이에 우리의 신앙을 두고 피하고 숨고 외면하고 부인하는 삶을 선택할 때가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현대교회는 이 일에 대해 자유롭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보배로운 피가 우리에게 있다고 말하지만 삶의 선택은 외면과 부인일 때가 많습니다. 교회와 성도들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향기, 영원한 생명의 향기가 증거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욕망과 두려움의 악취가 있을 뿐입니다. 바울처럼 고민해야 합니다. 바울처럼 인정해야 합니다. 바울처럼 생각하고 또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선택해야 합니다.

 

피를 속일 수는 없습니다. 십자가의 능력을 부인하고 외면하는 삶을 선택하면서 내가 묻혀 있는 피를 통해 나의 믿음을 증명하려는 것은 어리석습니다. 도망갔던 제자들이 돌아오고 부인했던 베드로가 회개하고 고민하던 바울이 결단합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허락하신 은혜와 우리의 의지적인 선택이 만나는 지점입니다. 그 지점에서 우리는 속일 수 없는 예수의 피의 능력을 확인합니다. 우리의 연약하고 비겁한 본성이 아닌 예수님의 순결하게 붉은 피가 말하게 하고 선택하게 하고 역동하도록 해야 합니다.

 

연약한 본성으로 가로막고 가리는 성도와 교회가 아니라 함께 역동하고 증거하는 우리들이 될 수 있을까요? 피를 속일 수 없으니까요.... 피는 속일 수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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