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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하는 사람들 / 1. 하나님과의 사귐에 들어가다.(시 131) 김나래 2023-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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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시편131:1-3절 개역개정

1.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

2.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3.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제공: 대한성서공회

초대교회 수요예배                                                       2023. 12. 27. 

 

기도하는 사람들 / 1. 하나님과의 사귐에 들어가다.(시 131)

 

  찬송가 / 366. 어두운 내 눈 밝히사 [(구)485장] / 362. 주여 복을 주시기를 [(구)481장] 

 

감리교를 시작한 요한 웨슬리에게는 그의 삶을 설명할 때 빠뜨릴 수 없는 또 하나의 이름이 있습니다.  그의 어머니인 ‘수잔나 웨슬리’입니다.  그녀는 19명의 자녀를 낳았고, 9명은 성장하는 과정에서 죽었습니다.  10명의 자녀를 믿음과 말씀으로 잘 키운 일로 유명합니다.  그녀에게는 자녀 양육의 원칙이 있었는데 오늘날까지 큰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그녀의 자녀양육의 원리 중 하나는 기도입니다.  그녀는 기도하는 사람이었고, 9명의 자녀를 먼저 하나님의 품으로 보내는 일과 남은 10명의 자녀를 양육하는 모든 일에 하나님과의 교통함을 제1원칙으로 삼았습니다.  그녀의 기도 한편을 묵상하면서 오늘부터 기도에 대한 말씀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오, 하나님! / 기도를 통해 아버지께 나아가기 전 / 저의 생각을 정리하고 안정시킬 수 있게 해 주십시오. / 우주의 주님이신 주님께 드리는 말씀드리는 영광스러운 자리에 들어가기 전 / 제 영혼이 안정된 상태에 이르러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고 / 마음을 정돈할 수 있는 조심성을 제게 주십시오.

 

아버지는 우리가 함부로 대할 수 없이 지극히 크신 분이며 / 거짓 헌신을 가지고 나아갈 수 없이 지혜로운 분이며 / 진정한 마음이 담겨 있지 않은 제사를 가증하게 보시는 분입니다.

 

아버지의 완전하심을 느낄 수 있도록 저를 도우시며 / 냉랭하고 형식적인 의식에 빠지지 않게 도와 주십시오. / 아무 준비 없이 갑작스럽게 기도를 시작하지 않도록 하시고 / 어떤 즐거운 일을 하기 위해 기도를 중단하고 / 기도했던 기억을 망각해 버리는 일이 없도록 도와주십시오. 아멘

 

그녀는 먼저 기도하기 전에 자신의 마음과 삶이 하나님과 교통하기에 가장 적절한 상태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잠잠한 영적 상태를 유지하려고 했습니다.  다음 단계로 하나님에 대한 고백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자신은 하나님께 어떤 삶으로 살아야 하는지를 고백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되 자신의 소원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사모합니다.  오늘 소개하는 그녀의 기도는 여기까지입니다.  이 기도의 특징을 한 마디로 요약하라고 하면 그것은 하나님과의 사귐으로 들어가는 기도라는 겁니다.  그녀는 기도의 본질이 무엇인지 너무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일상의 치열하고 격렬한 삶의 상황이 하나님과의 사귐을 결정하지 않도록 노력했습니다.  하늘의 평강과 은혜가 기도의 흐름이 되고, 하나님의 뜻이 기도의 목적이 되었습니다.  자신이 기도했던 내용을 잊지 않을 수 있도록 간구하는 그녀의 기도를 함께 읽으며 우리의 기도를 생각합니다.  

 

1. 얍복강의 일사각오(一死覺悟)

 

일제 시대 신사참배를 반대하고 신앙을 지키려다가 투옥을 당했던 주기철 목사님의 기도에 대한 일화가 있습니다.  주목사님을 투옥시켰던 일본 경찰들은 어떻게 하면 그의 마음을 좀 연약하게 해서 굴복시킬 수 있을까 고민했습니다.  그들은 주목사님을 잠시 석방시켜서 가족들을 만나게 하기로 결정합니다.  자신의 생명을 바칠 수 있지만 사랑하는 아내와 자녀들을 만나고 오면 그의 마음이 좀 연약해져서 타협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 것입니다.  하지만 교회와 가정으로 돌아온 주목사님은 성도들과 가족들 앞에서 자신의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그가 사용했던 단어가 바로 ‘일사각오’입니다.  죽음을 각오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는 말입니다.  ‘죽으면 죽으리라’는 책을 썼던 안이숙 여사의 고백도 마찬가지입니다.  에스더의 기도와 헌신을 생각하면서 그녀는 죽음을 각오하고 믿음과 삶을 지키려고 했고, 옥중에서도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를 잊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신앙 또한 ‘일사각오’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도 ‘일사각오의 정신’으로 기도했던 사람이 있습니다.  얍복강가에서 몸을 다치면서까지 하나님의 사자와 씨름했던 야곱입니다.  그의 기도에는 뚜렷한 특징이 있습니다.  하나는 그가 만난 삶의 문제 중심의 기도였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의 소원에 기반한 기도였다는 것입니다.  그는 정말 절박한 위기 가운데 기도했고, 간절한 소원으로 기도했습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기도하려면 얍복강의 야곱처럼 기도해야한다고 배웠습니다.  기도원 뒷동산의 나무뿌리 몇 개 정도는 뽑아야 하고, 한 두 개의 기도의 토굴을 파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왜 한국교회는 기도에 대해 이런 이미지를 가지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우리 민족이 오랫동안 생활로 익숙해진 전통신앙에서 ‘정성’을 쌓는 것과 하나님에 드리는 기도의 개념이 섞여 있기 때문입니다. 전통적으로 한국에서 성장하는 종교들은 사람들에게 일정 정도의 정성과 희생을 요구했습니다.  간절한 소원이 있는 사람들은 새벽마다 일어나 정한수를 떠놓고 기도해야 하고 산에 올라가 목욕재개하고 기도해야 했습니다. 고행, 혹은 수행은 고유의 미덕으로 인정되었습니다. 나아가서 100일, 혹은 1000일 동안 치성을 쌓는 것, 최선을 다해 헌금을 하고 자신의 정성을 바친 후 소원을 비는 것은 자신이 믿는 신앙에 대한 기본적인 자세로 인정되었습니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가 한국에 들어온 후 한국적 심성의 바탕 위에 성장하는 과정 가운데 이런 요소들이 함께 스며들어 있음을 부정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치성을 드리는 일과 기도하는 일은 전혀 다른 일입니다. 

 

2. 치성(致誠)으로 드리는 기도 vs. 하나님이 들으시는 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무슨 문제가 될 것이 있겠습니까? 최선을 다해 기도하고 간구하면 하나님이 들으신다고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문제는 이런 기도가 기도자의 상태를 고려하지 않는다는데 있습니다.  치성의 기도는 기도자가 어떤 목적으로, 어떤 영적 상태에서 치성을 드리는지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구하는 것’에만 초점이 있습니다.  치성을 드리는 사람에게 있어서 그의 기도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는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약 4:2-3을 봅시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욕망과 필요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라면 하나님께서 교통하시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혹은 어떤 사람이 욕망과 필요를 따라 기도한 것이 그대로 이뤄진다 한들.... 그것은 축복이 아니라 재앙이 될 수도 있습니다. 

 

아빌라의 테레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엄위하신 하나님 앞에서 말하는 사람이 마치 노예에게 말하듯 하고, 말하는 태도가 부주의하고, 마음에 떠오르는 대로 말하고, 아무 생각 없이 말을 반복한다면, 나는 그것을 기도라고 볼 수 없다. 하나님, 아무도 이렇게 기도하지 않게 해주십시오.”

 

3. 기도는 ‘사귐’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기도, 참된 기도는 무엇입니까? 존 웨슬리는 ‘은혜의 수단’이라는 설교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우리의 진심을 하나님 앞에 토로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은 기도는 모두 위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할 때에 하나님과의 사귐을 유일한 목적으로 삼고 우리의 마음과 정성을 하나님께 모두 드려야 합니다.” 

 

요한 웨슬리는 기도의 본질이 하나님과의 사귐에 있음을 강조했습니다.  여기서 사귄다는 것은 마음을 열고 인격적으로 교제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귐의 일차적은 결과는 무엇입니까?  서로 교통하고, 서로를 알게 되고, 그리고 서로를 서로 닮아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귐의 관계가 지속되어 가면서 성도는 하나님을 점점 닮아가게 됩니다. 그 생각과 성품에서 닮아가고 삶과 비전에서 닮아갑니다. 무엇인가 요청하고 요구하는 것은 그 다음의 일입니다. 하나님과의 사귐을 통해 자신의 변화를 확인하고 자신의 열망과 의지가 하나님의 뜻 가운데 조율된 다음 우리는 비로소 입을 열어 무엇인가를 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능력 있는 기도는 하나님의 뜻과 관없는 일을 하나님께 이루어줄 것을 강요하는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이 내 삶에 이루어지기를 소원하는 기도입니다. 사귐의 은혜가 없이 기도의 능력이 있을 수 없습니다.

 

4. 어머니 여호와

 

오랫동안 하나님은 ‘아버지’즉 남성신의 이미지로 상상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남성이실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신으로서의 하나님의 성을 사람이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남성 중심의 문화에서 하나님을 설명하기에 가장 적절한 역할과 표현이 아버지였고, 하나님은 자신을 설명하고 계시하실 때 그 단어를 선택하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여성성, 즉 어머니의 이미지 또한 가지고 계십니다.  얍복 강가에서 그의 삶의 격렬한 문제와 간절한 소원으로 계속 도전하는 야곱과 씨름하시는 하나님은 지극히 남성정입니다.  진노하시고 책임지시고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임하시는 하나님 또한 남성적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시편에서 시인은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자신의 신음과 숨소리에 같은 마음으로 품으시는 어머니와 같은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시편 131편에서 시인은 얍복강가에서 야곱과 씨름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이미지가 아닌 어린 아기를 품으시고 젖 먹이시는 어머니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다윗은 이 시에서 자신의 마음의 상태를 보여줍니다. 그는 지금 위대한 업적을 이루려고 하지 않습니다. 능력에 넘치는 일을 하게 해 달라고 조르지도 않습니다. 그의 마음은 마치 젖을 막 뗀 어린 아기가 엄마 품에 안겨 잠들어 있는 것처럼 평온합니다. 엄마와 아기는 많은 말로 요구하지 않아도 서로의 기쁨이 되며 평안의 근원이 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이런 영적인 상태가 가능합니까? 그것은 다윗의 고백대로 ‘오직 하나님께만 희망을 두고 하나님만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께서 어린 아기의 모든 것이 되는 어머니처럼 기도하는 성도와 교회를 품으시고 다독거리시고 사랑으로 인도하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성도와 교통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과의 사귐의 첫걸음은 기도를 통해서 이뤄지며 사귐의 깊이 또한 기도를 통해서 이뤄집니다.  하나님이 성도와 교회에게 허락하신 가장 큰 은혜를 우리에게 기도의 문을 열어주신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담대하게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오늘도 하나님과의 복된 사귐으로 나아가는 성도와 교회가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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