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하는 사람들 : 2. 간구하는 교회, 주시는 하나님 | 김나래 | 2024-01-1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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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누가복음11:9-13절 개역개정9.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10.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11. 너희 중에 아버지 된 자로서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12. 알을 달라 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13.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초대교회 수요예배 2024. 1. 10. 기도하는 사람들 / 2. 간구하는 교회, 주시는 하나님(눅 11:9-13) 찬송가 / 299. 하나님 사랑은 [(구)418장], 363. 내가 깊은 곳에서 [(구)479장] 현대 문학을 상징하는 소설가이면서 사상가인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리나’, ‘부활’ 등의 소설을 썼고, 50세기 신앙을 고백한 후 ‘고백록’, ‘교리신학연구’, ‘신의 나라는 네 안에 있다’ 등의 신앙과 사상에 대한 글을 썼습니다. 그가 자신의 신앙의 여정을 고백적으로 서술한 ‘나의 신앙은 어디에 있는가?’라는 책에는 그의 신앙의 고백이 정확하고 분명하게 서술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주어진 평화의 계명은 단순명료한 것으로, 불화의 모든 경우를 예견하고 그것을 예방하는 것이며, 이 지상에 하나님의 왕국을 계시하는 것이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는 정확히 메시아다.” 그는 제정 러시아의 귀족이면서 대지주로 태어나 민중들의 고통스러운 삶의 대척점에서 살면서 자신이 가진 사회 경제적 기반과 자신의 양심과 신앙 사이에서 깊은 갈등과 고민을 계속했습니다. 그의 소설과 글들에서 진정성 있는 한 시대의 사상가요 지식인의 깊이 있는 고민과 성찰을 함께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는 같은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대해 논의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어떻게 내가 가장 단순명료하고, 의심할 바 없이 이해 가능하고, 또 모든 사람들에게 향해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이해했는지, 어떻게 그것이 내 영혼을 변화시켰고 내게 평안과 행복을 주었는지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한다.” 그는 당시 제정 러시아의 부패와 타락을 부추기고 더 깊은 부정의 구렁텅이에서 헤매고 있던 러시아 정교회를 비판하면서 성경을 일부 자신들의 이익에 맞게 발췌하고 편집하여 교회권력과 국가권력의 방패막이로 사용하는 현실을 통탄했습니다. 그는 이 책에서 단 한 가지의 주장만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여,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라. 그리하면 하나님의 왕국이 이 땅에 세워질 것이다.... 현재 그러한 사람들이 많든 적든 간에, 어떠한 것에도 정복당하지 않을 바로 이 교회로 모든 사람이 합류할 것이다.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그는 그것만이 이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삶을 사는 영생의 길이라고 주장했습니다. 1. 하나님을 만나는 일 그가 자신이 경험한 하나님과의 만남을 문학적으로 표현한 구절이 있어서 소개합니다. 그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은 마치 바다에 내려진 그물과 같다고 했습니다. 그물이 바다에 잠겨 있는 동안 그물은 바닷물을 담고 있습니다. 하지만 물고기를 건지기 위해서 그물을 들어 올리면 그 그물 안에 바다는 남아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현존 안에 잠겨 있을 때 하나님은 우리 안에 계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찾았다고 생각하고 생각의 그물을 건져 올리면 하나님은 사라져 버립니다. 하나님을 참되게 알고 사귀기 위해서 우리의 전 존재를 우주에 충만하신 하나님의 영의 바다 속으로 던져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깊은 바다에 드리워졌던 그물을 들어올려 하나님을 만나는 일은 두려운 일이었습니다. 베드로는 눅 5:1-11에서 자신이 하나님의 영광을 만났을 때 두려워 떨면서 나를 떠나달라고 고백했습니다. 왜 사람은 하나님의 현존 앞에 두려워하게 될까요? 첫째는 자신의 죄성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현존을 경험했던 모든 사람들의 첫 마디는 “나는 죄인입니다.”였습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영광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치 밝은 빛 앞에서 우리가 눈을 뜨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유입니다. 하나님의 현존이 상징하는 영광의 광채는 피조물이며 죄인이며 연약한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존귀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만나는 일이 두려웠던 또 하나의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난 모든 사람은 삶의 변화를 만들어야 했습니다. 변화는 늘 두려운 것입니다. 안전을 확인할 수 없습니다. 기도는 결코 우리에게 더 안전하고 더 편안한 삶을 보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만났을 때, 하나님을 알았을 때 혹은 믿었을 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신을 벗어야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방식이 아닌 하나님의 뜻대로 새 삶을 시작해야 했습니다. 40세의 모세와 80세의 모세가 이스라엘을 구원하고자 하는 것은 같은 것처럼 보이지만 내면의 동기와 선택하는 길이 전혀 달랐습니다. 모세는 고민합니다. 이제 그는 자신이 살았던 삶과 다른 삶을 살아야 합니다. 기드온이 그랬습니다. 베드로가 그랬고, 바울이 그랬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만났을 때 하나님은 그들의 마음과 삶의 변화를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만났으면 변화는 그 만남의 증거가 되었습니다. 2. 주도기문과 기도하지 않는 교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2절)는 말씀과 함께 기도문을 주셨습니다. 왜 제자들은 기도를 가르쳐주시기를 요청했고, 예수님은 기도문을 그들에게 주셨을까요? 이전에 제자들은 기도하지 않았을까요? 1절에서 제자들은 세례요한과 그의 제자들의 기도에 자극을 받았습니다. 그들이 드리는 기도는 당시 유대사회가 실천하던 기도와는 무엇인가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유대사회가 드리는 예배와 기도를 여러 가지 상황 속에서 비판하셨습니다. 예수님보다 먼저 활동을 시작한 세례요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죄사함을 받는 회개의 세례를 선언했고, 요단강에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삶과 믿음에 대해 증거했습니다. 그가 자신의 제자들과 함께 드렸던 기도가 어떤 내용인지 성경은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가 추측할 수 있는 것은 그의 기도는 그의 사역과 같은 맥락 가운데 있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요청 앞에서 요한의 기도를 부정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것은 첫째는 기도문을 그들에게 주신 것이고, 둘째는 기도하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5-8절의 말씀은 소위 ‘강청기도’의 근거로 사용되는 구절입니다. “비록 벗 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8절)는 말씀에서 ‘간청함’이 마치 ‘벗 됨’의 관계를 넘어서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유대사회는 지극히 종교적인 사회였습니다. 그들은 나면서부터 신앙과 종교 안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기도는 그들의 생활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기도는 하나님을 대면하여 만나지 못하는 기도였습니다. 마치 모세가 80세 되었을 때 비로소 하나님과의 교통함을 경험하고 삶의 변화를 기도로 시작하는 것과 같은 이유입니다. 종교화되고 제도화된 삶 속에서 그들은 기도하되 들리지 않는 기도, 간구하되 응답을 기대하지 않는 기도, 부르짖으나 대답이 없는 기도를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기도하고 있던 그들에게 기도문을 주시고 기도를 명령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3.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 때로 우리의 기도는 공허하게 여겨질 때가 있습니다. 제자들 또한 같은 느낌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기도는 해왔는데 마치 깊은 허공이나 단단한 절벽에 외치는 느낌이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그들의 기도의 전제는 친구의 간청을 외면하는 친구, 혹은 억울한 과부의 사연을 외면하는 판관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혹은 이미 자녀와의 관계가 깨진 악한 아버지일 수 있습니다. 기도하되 이미 ‘기도의 대상에 대한 관계를 포기한 세대’에 대해 예수님은 먼저 기도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기도하되 이전과는 다른 중심으로 다른 방법으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눅 11:8의 말씀을 좀 다른 방식으로 읽으면 오늘 본문을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비록 깨진 관계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8절) 기도문을 주신 이유가 이것이며, 기도를 명령하신 이유가 이것입니다. 헨리 나우웬은 기도에 대해 설명하면서 산타클로스를 기다리는 어린 아이들에 대해 말합니다. 아이들은 성탄절에 산타클로스를 기다립니다. 하지만 아이들이 정말 기다리는 것은 산타가 아닙니다. 그들의 관심은 산타 전설에 진실성에도 있지 않습니다. 아이들의 관심은 오직 산타에게서 오는 선물에 맞춰져 있습니다. 선물을 얻으면 산타 할아버지가 돌아가는 길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썰매는 전세계의 모든 아이들에게 다 돌아다닐 만큼 튼튼한지에 대해 관심이 없습니다. 그리고 다시 1년 동안 산타를 기다립니다. 그 산타는 아이들이 원하는 것을 알고 그것을 만족시켜 주는 고마운 산타이며, 선물 꾸러미에 선물을 가득 들고 있는 산타입니다. 기도를 요구하는 것(asking)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은 아이들이 산타를 대하듯 하나님을 대합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사귀며 하나님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이 주시는 선물에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나아가서 그 하나님이 나의 1년의 생활에 개입하고 나를 변화시키는 것은 원치 않습니다. 다만 내가 원하는 선물을 손에 쥘 수 있으면 만족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요청하시는 기도는 ‘선물’에 대한 기도가 아닙니다. 그것은 관계의 회복을 위한 기도입니다. 이미 무너지고 깨어진 관계와 신앙의 회복이 그들에게 필요하고 제자들과 교회는 회복을 위하여 요구하고 찾고 두드려야 합니다. 4. 하나님이 주시는 것 예수님은 기도에 대한 가르침의 핵심을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약속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13절을 봅시다. 그것은 ‘성령’입니다. 예수님은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기도의 제목이 무엇인지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 앞으로 나오는 성도들의 심령 가운데 무엇이 있는지, 어떤 아픔이 있는지, 어떤 소원을 원하는지가 기도의 핵심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기도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 심령 가운데 성령 하나님을 만나고 모시는 것, 그리하여 기도 후에는 성령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는 것이 참된 기도인 것입니다. 악한 부모도 자녀에게는 선한 것을 준다 했습니다. 우리의 완전한 아버지되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장 귀하고 가장 아름다운 것을 준비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함께 하시는 것, 우리 안에서부터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소원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과의 무너진 관계가 회복되고 하나님의 뜻 안에서 사는 삶이 회복될 때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필요를 아시고 채우십니다. 우리의 갈 길을 인도하시고 지키십니다. 노위치의 줄리안(julian of norwich)이라는 수사는 다음과 같이 기도했습니다. 이 기도가 우리의 기도에 선한 영향을 미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당신의 선하심을 따라 당신 자신을 저에게 주십시오. 저에게는 당신만 있으면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아닌 다른 것을 당신만큼 값있다고 생각하고 구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만일 제가 당신 아닌 어떤 것을 구한다면 저는 늘 부족함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오직 당신 안에 있을 때 저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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