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하는 사람들 / 4. 아버지께서 주시지 않겠느냐! | 김나래 | 2024-01-2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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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누가복음18:1-8절 개역개정1.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2. 이르시되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장이 있는데 3.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4.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5.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6. 주께서 또 이르시되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7.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초대교회 수요예배 2024. 1. 24.
기도하는 사람들 / 4. 아버지께서 주시지 않겠느냐!(눅 18:1-8)
찬송 : 382. 너 근심 걱정 말아라 [(구)432장] / 400. 험한 시험 물 속에서 [(구)463장]
‘사귐의 기도’라는 좋은 책을 쓴 김영봉 목사는 ‘하늘의 보좌를 움직이는 기도’라는 책 혹은 구절에 대해 의문을 제기합니다. 그의 책을 옮겨오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늘 보좌를 움직이는 기도, 한국교회가 즐겨 사용하는 이 표현에는 하나님의 뜻을 움직일 수 있어야 능력있는 기도라는 생각이 내포되어 있다. '하늘에 상달되는 기도'라는 표현도 마찬가지다. 나 역시 꽤 오랫동안 이런 생각에 매여 기도로써 하늘 보좌를 움직이려고 애썼던 경험이 있다.
이런 맥락에서 '과부와 재판관의 비유'(눅 18;2-5)와 '못된 친구의 비유(눅 11;5-8)는 끈질긴 기도가 하나님의 뜻을 움직인다는 의미로 해석되어 왔다. 과부 혹은 손님을 맞은 친구처럼, 자신이 요구하는 것을 얻을 때까지 끈질기게 요청하라고 가르친다. 한국 교회 안에서 포기하지 않고 줄기차게 요청하는 것이 훌륭한 믿음의 증거인 것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이 해석은 예수님의 본의를 왜곡하는 것이다. 이 비유들이 끈질기게 간구하라는 권고라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성품을 이 불의한 재판관과 못된 친구와 같다고 보셨다는 말이 된다. 이 재판관이 어떤 사람인가? 그 과부의 억울함을 뻔히 알며서도 뇌물을 바라고 그녀의 요청을 외면한 악하디 악한 사람이다. 두 번째 비유에 등장하는 친구는 어떤 사람인가? 친한 친구가 딱한 사정에 빠졌는데도 그리고 꾸어줄 빵이 부엌에 있는데도 잠자리에서 일어나기 귀찮다는 이유로 거절한 사람이다. 이 두 사람은 타락한 인간성의 대표자들이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그런 못된 성품의 소유자로 생각하셨을까? 예수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셨다.
그렇다면 이 두 비유의 의미는 무엇인가? 여기서 예수님은 하나님을 가장 나쁜 인간과 대조시키신다. 그분이 하시려는 말씀은 이런 것이다.
"가장 악질적인 인간도 이렇게 강청하면 마음을 바꾸어 들어주지 않더냐? 그렇다면 하물며 가장 선하신 하나님은 너희의 기도에 얼마나 기꺼이 응답하시겠느냐? 그러니 하나님의 응답을 든든히 믿고 구하고, 구한 것은 이미 받은 줄 알고 감사하라!"
이것이 기도하는 자가 지녀야 할 자세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감사하는 마음으로 청원하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다. 주셔도 감사하고 주시지 않아도 감사하다. 그분이 어떻게 하시든지 그것은 결국 우리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김영봉 / 사귐의 기도 P 41-43)
1. 친구, 아버지, 재판관
예수님은 누가복음 11장과 18장에서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셨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이 사용하시는 세 가지 관계와 기도에 대해 생각합시다.
1) 친구 / 간청하라!
눅 11:5-8에서는 친구의 관계를 통해서 간청하는 기도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또 다른 친구의 늦은 방문으로 인해 친구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상황입니다. 늦은 밤 문을 두드리는 친구의 부탁에 대해 “비록 벗 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8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잘 아는 말씀으로 기도를 권면하셨습니다.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9절)
때로 우리의 삶에는 나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절박한 상황과 간절한 필요가 발생합니다. 예수님의 비유에서 이미 하나님과 나는 ‘벗’입니다. 친구의 요청은 그들의 관계의 정도를 넘어서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한 친구의 다른 친구를 위한 간청은 또 다른 친구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예수님은 기도의 의지를 가지고 간절히 기도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2) 아버지 /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예수님은 또 다른 비유를 통해서 기도에 대한 확신을 주고자 하십니다. 모든 아버지들은 모든 아들들에게 더 좋은 것을 주려고 합니다. 비록 그 아버지가 부족하고 악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교회와 성도를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설명하십니다. 하나님은 가장 좋은 것으로 기도하는 성도에게 주기를 원하십니다. 성도와 교회가 하나님과의 교통함을 통해서 얻어야 하는 가장 귀한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성령’이라고 말합니다. 아들의 필요와 소원이 아니라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고 싶은 것, 가장 귀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좋은 기도는 사람의 뜻이 전달되는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을 이해하는 기도이며, 사람의 필요와 소원이 해결되는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을 향한 뜻이 이루어지는 기도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기도하는 자에게 성령을 허락하시고 그 뜻대로 살게 하십니다.
3) 불의한 재판관 /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라!
예수님의 시대는 사람들의 평범하고 일상적인 소원과 기대가 거절되는 삶이 반복되고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재판관이나 관리들은 민중들의 서러움과 아픔을 보살피기보다 자신들의 욕망을 현실화하는 일에 급급했습니다. 예수님이 비유를 들어 말씀하실 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은 늘 소원하고 기도하지만 거절과 실패를 만났습니다. 기도하지만 응답을 기대하지 않았고, 기도하지 않는 것이 일상이 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기도하되 낙심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심지어 하나님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악한 재판관이 있습니다. 그에게 과부의 삶의 부당함 정도는 눈에 보이지도 않습니다. 과부는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할 그 어떤 대상도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그가 악하고 불의한 재판관인 것을 알지만 호소하기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재판관은 자신의 악함과 게으름을 넘어서는 결정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7절과 8절에서 ‘하물며~’라는 말로 기도를 권면하십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눅 18:7-8)
기도하되 낙심하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기도하면 하나님은 반드시 교통하시고 응답하십니다. 하지만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도 기도하는 일을 멈춘 사람들이 있습니다. 세상의 불의함에 이미 패배한 사람들입니다. 이미 마음과 생각을 세상에 맡겨버린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가장 연약하고 힘없는 한 과부가 낙심하지 않고, 세상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이미 패배하고 실패한 마음으로 절망하지 않고 계속 기도할 때 불의한 세상의 권력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기도하되 낙심하지 않아야 계속 기도할 수 있습니다. 비로소 불의한 세상을 넘어서서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습니다. 불의한 세상도 낙심하지 않고 기도하는 성도의 편에 선다면 ‘하물며’ 하나님은 어떠하겠습니까? 성도의 한숨과 눈물에 응답하지 않으시겠습니까?
2. 믿음을 보겠느냐!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8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기대하시는 믿음은 어떤 것입니까?
누가복음 11장에서 제자들은 왜 다시 기도를 배워야 했고, 예수님은 왜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고 말씀하신 것일까요? 그들은 이미 세상에 패배한 기도를 드리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두 가지 이유입니다. 첫째, 그들은 자신의 욕망과 필요를 기도했습니다. 삶은 점점 어려워가고 시대는 점점 악해져 갑니다. 그들의 소원과 필요는 점점 절박해지지만 응답과 성취를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둘째, 그래서 그들은 기도하되 낙심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응답을 기대하지 않는 독백의 기도를 드리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믿음의 기도를 드리는 법을 가르치셨습니다. 믿음의 기도는 첫째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기도이며, 둘째 자신이 드리는 기대에 대해 스스로 패배하거나 낙심하지 않는 기도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나라와 뜻을 향한 바른 길 위에 있을 때 하나님이 나의 모든 필요와 소원을 아시고 인도하신다는 믿음이 있어야 하고, 비록 오늘 악하고 두려운 시대를 살지만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 나라의 능력이 승리할 것임을 믿어야 합니다. 마지막 때에 예수님께서 보고자 하시는 믿음은 이런 것입니다.
3. 무엇을 움직일 것인가?
철학자 키에르 케고르는 기독교 실존주의자였습니다. 그는 “기도란 하나님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는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사귐을 통해서 우리 삶을 향한 우리 자신의 욕망을 제거해가는 과정입니다. 또한 기도는 내 삶의 모든 것을 하나님의 거룩하신 손에 맡겨드리는 과정입니다. 따라서 성도의 기도의 깊이는 하나님과의 사귐의 깊이에 비례합니다. 변화된 삶만큼 변화된 기도를 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의 초점을 내 뜻을 따라 하나님을 움직이는데 둔다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사람의 소원이 형상화된 우상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알아가는 가장 중요한 과정이며 하나님의 뜻을 따라 나를 변화시키는 과정입니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마음으로 들어가고 기도를 통해 순종의 과정을 밟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늘의 보좌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강퍅하고 굳은 내 마음을 움직이며 내 삶의 자리와 지향점을 변화시키는 동력이 됩니다. 나의 기도를 따라서 하나님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라면.... 내가 하나님보다 높습니다.
4. 기도, 신념이 아닌 신앙
때로 우리는 습관적으로 기도하다 보니, 혹은 급한 마음으로 기도하다 보니 내가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지, 무엇을 고민하고 있는지, 무엇을 간구하는지 망각하기도 합니다. 입으로는 부지런히 기도했는데 그 기도에 하나님과의 교감(communication)을 전혀 느낄 수 없는 기도가 있습니다. 아담 클라크(adam clark)는 “기도에 필요한 것은 입술이 아니라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성도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깨달아가고 같은 뜻을 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성도의 마음과 하나님의 마음이 만나는 곳이며, 성도의 삶과 하나님의 뜻이 섞이는 장소입니다.
“하나님이 응답하실 때까지” 같은 기도를 수없이 반복하는 기도 행위에 대해 고민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에 당장 응답하시지 않는 이유는 우리의 기도가 일정한 횟수를 채우지 못해서가 아닙니다. 우리를 아시고 상황을 이해하고 계신 하나님께서 우리가 요청한 것보다 더 좋은 것을 준비하고 계시든지 혹은 우리가 잘못 알고 필요 없는 것을 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믿음의 행위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우리의 영적인 행복을 원하고 계시고 우리에게 늘 선한 것을 준비하신다는 확신이 필요합니다. 그 확신 가운데 기도하는 사람은 기도가 응답될 때까지 반복하는 사람이 아니라 기도했으므로 하나님께 맡기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우리를 의탁하는 기도, 하나님의 뜻 가운데 우리를 드리는 기도는 우리의 삶에서 끊임없이 반복해야 할 기도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유혹 가운데 있고 하나님의 뜻보다는 우리 자신의 소원을 이루려는 시도를 계속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굴복시키고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는 기도를 드리지 못하고, 하나님을 굴복시켜 우리의 소원을 이루겠다는 기도를 반복하는 것은 믿음이 아닌 불신이요, 신앙이 아닌 신념에 불과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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