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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를 지고 세상을 보다. / 1. 용서의 한계(눅 23:34) 김나래 2024-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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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누가복음23:34절 개역개정

34.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제공: 대한성서공회

 

 

십자가를 지고 세상을 보다. / 1. 용서의 한계(눅 23:34)

 

찬송가 / 85. 구주를 생각만 해도 [(구)85장],  250. 구주의 십자가 보혈로 [(구)182장]

  

           오늘 여러분께 소개하는 이 편지는 1996년 알제리에서 이슬람 과격주의자들에 의해 순교당했던 티버린(Tibhirine) 수도원장 크리스티앙 드 세르주(Christian de Cherge)가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남긴 것입니다.  그는 알제리를 떠나라는 권고에 응하지 않고 자신의 수도원과 성도들을 지키기를 원했고, 결국 3년간의 투옥생활을 거쳐 참수당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는 편지를 쓰면서 자신의 헌신의 가치를 위해 기도해달라고 부탁합니다.  특히 그는 자신의 죽음이 그가 사랑했던 이슬람 세계의 평범한 사람들 모두를 비난하는 사건으로 악용되는 것에 대해 경계했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은 말로 유언장을 끝맺고 있습니다.

 

“분명 나의 죽음은 나를 순진하거나 이상적이라고 치부했던 모든 사람들의 의견을 정당화시킬 것입니다.  “지금 그의 생각을 말해보게 하라.”라고 하겠지요.  하지만 그런 사람들은 나의 죽음이 내 가장 뜨거운 열정을 만족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면 결국 나는 그분이 이슬람의 자녀들을 보시는 것처럼 그들을 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삶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이 삶은 전적으로 제 것이었고, 또한 전적으로 그들의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삶에 많은 시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쁨으로 가득 차길 원하셨습니다.  감사는 제 삶에 대한 모든 것을 담고 있습니다.  이 감사의 대상에 현재와 과거의 친구들, 내 어머니와 아버지 옆에 있을 친구들, 형제 자매들을 포함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 마지막 순간을 함께 하는 나의 친구들에 대해서도 감사합니다.  비록 지금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에게도 이 감사의 말, “아듀~”를 전합니다.  그분의 형상이 그들에게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신다면 행복한 강도들처럼 우리도 천국에서 만날 수 있겠지요.  주님은 우리 모두의 아버지이시니까요.  아멘!  인샬라!” 

 

1. 십자가는 첫 번째 계단입니다.

 

가끔 우리는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거나 일반적인 상식의 수준을 넘어서는 대단한 일을 발견했을 때 ‘신비’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내가 경험하고 있는 이 일이 우리의 보편적인 이성과 상식을 넘어서거나 반대편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단어를 성경이 십자가에 대해 사용할 때 조금 다른 뜻이 있습니다.  비슷한 말로 성경은 ‘비밀’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특히 바울이 이 단어를 많이 사용했는데, 그는 골로새서 1장 27절에서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골 1:27)라고 했습니다.  또한 에베소서 장 3장 4절에서는 “그것을 읽으면 내가 그리스도의 비밀을 깨달은 것을 너희가 알 수 있으리라”(엡 3:4)라고 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비밀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감추어져야 하는 것일까요?  드러나야 하는 것일까요?  단어가 가진 원래의 뜻은 감춰지고 숨겨져야 하는 것인데, 바울이 문맥을 통해서 의도하고 있는 것은 증거되고 나눠져야 하는 것입니다.  즉, 비밀이라는 단어가 가진 원래적인 의미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가진 독특함이 강조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신비(神秘)라는 단어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풀 수 없고 알 수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다만 성경이 말하는 십자가의 신비는 그것에 대해 알면 알수록 더 깊은 의미가 발견되고,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너머에 새로운 의미들을 생각하게 하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샘과 같은 것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의 신비’로 들어가는 첫 번째 계단입니다.  십자가를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없습니다.  십자가를 알지 못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알 수 없습니다.  십자가를 알지 못하고 우리의 구원과 사랑을 알 수 없습니다.  십자가를 이해하면서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게 되고,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을 만나면서 우리는 사랑의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깊은 샘으로 들어가는 첫 계단,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2.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일반적으로 십자가 위에서 일곱 마디의 말씀을 하셨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 일곱 마디의 말씀은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신이 가장 잔혹한 형틀인 십자가 위에서 죽임 당하면서 우리에게 남긴 말씀입니다.  당연히 복음의 진수가 숨어 있고, 신이 인간에게 남긴 진심이 숨어 있습니다.  과연 완전한 신인(神人)으로서의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이 세상에 대해 어떤 말씀을 남기셨을까요?  먼저 일곱 마디의 말씀을 시간 순서대로 정리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1)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2)  "진실로 내가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3)

3)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요19:26-27)

4)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27:46)

5)  "내가 목마르다!"(요19:28)

6)  "다 이루었다!"(요19:30)

7)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부탁하나이다!"(눅23:46)

 

십자가를 하나님의 사랑의 신비로 들어가는 첫 번째 계단으로 이해한다면 십자가 위에서 주님이 하신 말씀은 그 사랑의 길로 들어서는 열쇠와도 같습니다.  예수님은 위에 있는 이 일곱 마디를 통해서 우리를 향한 복음의 핵심을 보여주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번 주 수요일부터 일곱 주간 동안 주님이 십자가 위에서 하신 말씀들을 차례로 묵상하고자 합니다.  그 말씀들을 통해서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마음을 깨달을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3. 첫 번째 말씀 - 지식과 믿음의 경계선에서

 

1) 예수님의 용서에 대하여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말씀은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입니다.  이 말씀은 가장 먼저 ‘용서’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용서는 사랑에 근거한 것이고, 죽음의 자리에서 원수에 대해서도 실현되는 용기 있는 결단과 실천입니다.  우리는 쉽게 용서에 대해 말하지만 용서하기로 결단하지 못하고 수많은 결단을 하지만 그것을 실천으로 옮기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고 가르치시고 눈물과 땀으로 기도하며 결단하시고 실천하시는 분입니다.  

 

2) 지식, 그리고 믿음

 

하지만 예수님의 용서에 우리가 주목해야 할 표현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못박는 사람들에 대한 용서를 부탁하면서 그들을 위해 변호하시는 말씀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이 지금 자신이 하는 일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르고 짓는 모든 죄는 용서의 대상일까요?  물론 아닙니다.  어느 정도 상황이 고려될 수는 있겠지만 의도하지 않았거나 몰라서 저지르는 것도 엄격한 범죄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그들의 무지에 대해 변호하시는 것은 그것이 그들의 용서에 대한 합당한 이유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이 말씀은 그 후 2000년, 나아가 200년부터 우리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까지 존재하는 모든 교회와 성도들을 위한 말씀입니다.

 

4. 이 기도의 능력과 은혜 아래에서

 

이 말씀에 먼저 위로를 얻을 사람들은 우리 자신들, 오늘날의 교회와 성도들입니다.  우리는 늘 지식과 믿음의 경계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어디까지가 우리의 신앙의 범위인지를 우리는 잘 알지 못합니다.  예수를 믿는데, 믿음으로 사는 삶의 경계를 잘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옳은지, 어떤 선택과 판단이 옳은지를 알 수가 없습니다.  마치 2000년 전에 많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메시야를 십자가에 못박은 것과 같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을 향한 믿음은 있었지만 그 믿음이 오히려 메시야를 거절하고 못박았습니다.  그들이 믿음의 경계가 불분명했고, 그들의 지식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삶으로 연결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새로운 복음에 대해 그들은 무지했고 거절했고 결국 복음의 적대자로 살았습니다.  

 

때로 우리가 느끼는 막연한 두려움이 바로 이 부분에 근거합니다.  내가 믿는다고 하고, 바르게 산다고 생각하지만 혹 나는 나 자신의 틀에 갇혀서 잘 못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혹 나는 바른 길을 간다고 확신하고 잘못된 삶을 사는 사람은 아닐까…?  우리는 때로 이런 막연한 걱정을 합니다.  십자가 위에 주님께서 우리보다 훨씬 멀리 나가 있던 사람들, 예수님을 저주하고 못박던 사람들을 위해 용서의 기도를 하셨다는 것은, 따라서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됩니다.  막연한 죄책감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보다 더 무지하고 잘못된 신앙의 틀에 갇혀 있던 그들도 주님의 용서와 긍휼의 대상이었습니다.  우리 또한 주님의 긍휼과 사랑과 용서의 대상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친다면 여전히 십자가에서의 복음을 바르게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과 용서의 기도를 제대로 이해한다면 우리는 새로운 방식의 삶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서론에서 함께 읽었던 크리스티앙 드 세르주의 순교는 십자가의 사랑을 깨달은 사람의 새로운 삶의 방식입니다.  그의 죽음은 그리스도의 죽음의 연장에 있습니다.  그의 용서와 사랑은 예수님의 용서와 사랑의 연장입니다.  그는 자신이 선택한 방식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의 일부가 되었고, 그의 죽음 또한 예수님의 죽음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는 죽임 당하신 어린 양,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만이 용서와 사랑을 하나님께 요청할 수 있는 자격이 있음을 알았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예수님과 같은 삶의 자리에 있을 때 비로소 예수님의 그 사랑과 용서의 대상이 됨을 믿었습니다.  바로 그 자리에서 그는 예수님과의 일치를 경험합니다.  

 

이 땅에 살면서 예수님과 일치된 삶을 경험하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의 소원이자 목표입니다.  크리스티앙 드 세르주는 고민했고, 기도했고, 결단했고, 실천했습니다.  십자가 사랑의 용서의 대상이었던 그가 십자가 위로 올라가 죽임 당하신 예수님과 함께 사랑의 손길을 세상에 내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이 우리에게 전하기를 원하시는 새로운 방식의 삶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삶을 선택했던 한 사람을 소개했습니다.  바로 스데반이었습니다.  그가 스스로 십자가 위에 올라가 예수님과 함께 사랑과 용서의 삶을 살았을 때 교회는 사도 바울을 만날 수 있었고, 역사는 순교적 교회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용서와 사랑이 대상이기만을 소원하는 연약한 신앙에서 벗어나서 예수님과 함께, 스데반과 함께, 사도들과 함께, 역사에 존재했던 모든 순교적 교회와 함께, 크리스티앙 드 세르주와 함께 십자가 위에 설 수 있을까요?  십자가 위에서 주님이 하셨던 그 말을 우리의 가슴으로 받을 수 있을까요?  우리의 가슴에서 삶으로, 이웃에서 세상으로 전할 수 있을까요?  바로 그 때 세상은 또 다른 예수와 스데반과 크리스티앙 드 세르주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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