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의 기도 - 5. 신의 갈증(요 4:13-14, 19:28) | 김나래 | 2024-05-0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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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5. 1. 초대교회 수요 성경 공부
십자가의 기도 - 5. 신의 갈증(요 4:13-14, 19:28)
95. 나의 기쁨 나의 소망 되시며 [(구)82장]298. 속죄하신 구세주를 [(구)35장]
중세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신성과 인성 사이에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어떻게 이 두 가지가 완벽하게 한 인격 안에 존재할 수 있을까....? 그들은 때로 영적 존재인 천사를 바늘 끝 위에 올려놓고 고민했고, 예수님의 고통과 눈물을 신적인 능력의 범위에서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논쟁하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통과 그 위에서의 일곱 마디의 말씀을 생각할 때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연약함과 고통의 표현에 대해 해석하고 설명하고 싶어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때문이지....”하면서 우리가 읽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위에서의 고통의 말들을 보다 경건하고 거룩한 말로 포장하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말들을 찾고 아름답게 설명하려고 해도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욕구를 표현하는 예수님의 말씀에 적절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목이 마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어떤 영적인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요?
신학자 Rowan Williams는 성도들이 가장 빠지기 쉬운 신앙적 유혹은 ‘하나님을 설명하려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자신의 신앙적 논리, 자신이 학습하고 알고 있는 신학과 교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생각과 뜻을 설명하려는 시도를 끊임없이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 이유는 아주 단순합니다. 우리들은 상식에 맞지 않는 일들을 만나면 쉽게 당황합니다. 예상을 벗어나는 일을 만나면 두려움에 빠지기도 합니다. “이게 뭐지... 왜 이런 일이 일어났지....” 그래서 우리들은 우리 주변에 있는 일들을 일반화시키고 체계화해서 소위 정상적인 것과 비정상적인 것들을 구별합니다. 그리고 비정상적인 일들이 발생할 때 그것을 사회적 관계나 법을 사용하여 정상적인 것으로 만들려고 노력합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본인의 생각에 맞게 정상적인 것으로 변하지 않으면 분노하고 파괴합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유대 사회가 보여준 반응도 이와 같습니다. 예수님을 처음 만난 그들은 열광했습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시는 이적과 선포하시는 메시지는 그들이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메시야의 증거였습니다. 하지만 곧 그들은 당황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일반화시켜 놓았던 메시야와 예수님을 통해서 나타나는 메시야가 다른 것입니다. 그들은 이미 신학적으로 메시야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만들어 놓았고, 예수님은 그들이 만들어 놓은 메시야가 아닌,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로서의 사명을 감당합니다. 결국 불안함은 두려움으로, 두려움은 분노로 바뀌고 그들은 메시야를 십자가에 매달고 맙니다.
Rowan Williams의 말대로 우리는 계속 믿음의 대상인 하나님을 우리의 상식과 논리의 범주 안으로 끌어들이고자 합니다. 설명되지 않는 하나님, 논리적이지 않는 하나님의 뜻에 불안해합니다. 그는 말하기를 “교리의 핵심은 우리를 침묵하게 만들고, 우리 내부에 하나님과 교통하는 깊은 샘을 만드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즉, 교리와 신학은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위해 있는 것입니다. 교리를 알고 신학을 공부함으로써 우리가 얻어야 하는 것은 더 많은 설명이 아닌 우리가 무엇을 모르고 있는가를 확인하고,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서는 일입니다.
1. 신의 육체?
“목 마르다!”라는 예수님의 본능적 탄식은 우리들을 고민에 빠지게 합니다. 삼위일체 가운데 한 분이신 하나님.... 충분히 십자가를 피하실 수 있었지만 기도와 결단으로 스스로 십자가에 오르신 예수님이 육신의 갈증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어야 할까요?
이 말에 대한 가장 직접적이고 쉬운 해석은 평범한 한 사람의 고통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완전한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은 사람으로 당하실 모든 고통을 우리와 같이 당하셨고, 목마름도 그 한 과정으로 보는 것입니다. 사람으로서 목이 말랐기 때문에 ‘목이 마르다’고 표현했을 뿐이라는 입장입니다. 동의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시는 과정에서 모든 고통을 일일이 다 말씀하지는 않았습니다. ‘목마름’은 예수님이 도저히 말하지 않고서는 참을 수 없었던 유일한 고통이었을까요? 채찍질을 당하시고 뺨을 맞으시고 침 뱉음을 당하시고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오르시고 십자가에 묶이고 못 박히시고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붉은 태양 아래 매달려 한 나절을 보내고 있을 때..... 그 모든 십자가의 과정에서 단 한마디도 자신의 고통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던 예수님이 왜 “목 마르다...”라며 갈증을 표현하신 것일까요? 따라서 사람으로서 느낄 수 있는 단순한 고통에 대한 표현으로 보는 것은 너무 쉬운 접근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말을 연약한 우리를 위한 예수님의 배려라고도 생각합니다. 완전한 신이신 예수님은 그의 신적인 능력으로 십자가 정도는 쉽게 감당하시지 않을까....? 라고 생각하는 어리석은 성도들을 위해서 예수님도 우리처럼 고통을 당하시고 갈증을 느끼신다는 것을 보여주기위해 이런 표현을 사용하셨다는 해석입니다. 이런 설명은 다소 위험합니다. 사람들은 때로 그렇게 하기도 합니다. 때로 어머니가 자녀들을 설득하기 위해 위장된 고통을 표현하고, 연인의 마음을 돌려놓기 위해 고통과 눈물을 사용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사람에 대해 그렇게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잘못된 신학은 하나님을 목적을 위해 거짓을 행하는 분으로 오해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2. 왜 하필 목마름일까?
여기에 중요한 질문이 하나 발생합니다. 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당하신 수많은 고통 가운데 하필이면 ‘목마름’의 고통을 표현하셨을까...? 하는 것입니다. 정확한 이유를 알 수는 없습니다. 다만 성경 속에서 가까운 답을 찾을 수는 있겠습니다.
이 말씀이 요한복음에 기록되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요한은 예수님이 언젠가 ‘목마름’에 대해 말씀하신 적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4장에서 예수님은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성의 한 우물터에서 한 여인을 만났습니다. 일반적으로 유대인은 사마리아 사람들과는 대화를 하지도 않고 물을 달라는 말은 더더욱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여인과 상식을 넘어서는 대화를 하시고, 결국 비현실적인 메시지를 전합니다. 그 내용은 이러합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3-14)
그리고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들어가셔서 같은 복음을 전하십니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요 7:37-38)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를 통해서 ‘목마름’에 대한 중의적(衆意的) 표현을 사용하셨습니다. 이 본문에서 목마름은 먼저 실제적이고 경험적인 갈증을 말합니다. 수가성의 여인은 자신의 갈증을 해결하기 위해 우물가로 왔습니다. 육신의 갈증이 그녀가 오물가로 온 이유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녀에게 영생의 샘물을 말씀하십니다. 욕망이 넘쳐나던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흐를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과 수가성 우물가의 여인의 대화는 육신의 갈증에서 생명의 강물로 흐르고 있습니다. 여인의 육신의 목마름에서 인류 전체의 영적인 목마름으로 연결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4장과 7장에서의 목마름에 대한 말씀을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갈증과 연결하면 우리는 좀 더 깊은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갈증 또한 여인이 느꼈던 갈증과 같이 첫째는 예수님의 육신의 목마름의 표현일 것입니다. 팔레스타인의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물과 피를 다 쏟으신 예수님이 당연히 느낄 수 있는 갈증입니다. 그리고 나아가 영적인 갈증을 말씀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에서 만나셨던 사람들의 목마름과는 다소 다른 목마름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갈증은 진리와 생명에 목마른 사람들을 향한 복음적 갈증입니다. 지금 복음에 목이 마른 사람들, 지금 마르지 않는 생명의 생수를 마셔야 하는 사람들, 지금 생명의 강물에 잠겨야 하는 사람들에 대한 갈증이 예수님의 표현하는 목마름입니다. 그 갈증은 이미 오래 전에 시작되었고, 십자가 위에서 처절하게 형상화되고 있습니다.
3. 잔을 들다.
그리고 또 하나, 예수님의 갈증과 관련된 이미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잔’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선택한 십자가의 길을 ‘잔’으로 비유했습니다.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마 26:39)
분명한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고통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조차도 참으로 감당하기 힘든 고통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자신의 고통보다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잔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잔을 마신 예수님이 갈증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마실수록 더 목마른 고난의 잔.... 십자가의 고통이 더할수록 우리를 향한 애타는 사랑의 정도는 깊어져 갑니다. 십자가 위에서 죽어가는 육신을 뒤틀며 모르고 거친 목소리로 들릴 듯 호소하는 음성.... 내가 나의 생명의 샘물, 영생의 강물을 마셔야 할 너희들에 대해 목이 마르다. 너희를 향한 나의 목마름을 해결하기 위해 아버지가 내게 주신 잔을 마시고 이렇게 십자가에 매달려 죽어가는데.... 나는 더욱 목이 마르다. 너희를 향하여 더욱 간절하게, 깊이 목이 마르다.... 예수님의 이 갈증은 나를 향한 사랑의 갈증이며 안타까움이며 마른 눈물입니다.
4. 목마름, 우리의 소원
시편 42편은 인생의 고달픈 고비에서 하나님을 간절히 사모하는 한 시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목 마른 사람이 시냇물을 찾듯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합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광야에서 목말라 죽어가는 사슴 한 마리가 간절히 샘물을 찾아 헤매는 것처럼 하나님 만나기를 소원한다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을 향한 소원이 생기면 우리는 그런 모습으로 하나님을 향한 갈급함을 호소할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성경은 정반대되는 현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죄 없는 한 마리 어린 양이 십자가라는 죽음의 골짜기에서 그 마지막 숨 한자락과 함께 내뱉는 신음 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내가 목이 마르다.”라는 말입니다. 주님은 우리들을 만나기를 그렇게 간절히 소원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마른 목을 축이는 것은 믿음으로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흐르는 교회와 성도들입니다. 우리를 간절히 기다리시는 주님을 향한 거룩하고 맑은 소원이 우리 안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어리석게도 우리는 다른 소원에 우리의 마음과 삶을 걸어두고 삽니다. 주님은 우리들에 대해 목말라하지만 우리는 주님에 대해 목말라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무엇에 대해 목말라하며 무엇을 그리워하며 살고 있는지, 무엇에 우리의 삶과 마음의 에너지를 집중하고 있는지 생각해야하겠습니다. 가장 깊은 갈증으로 우리를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며 다시 우리들의 목마름을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주님의 우리를 향한 부르심과 우리의 소원이 만나는 현장이 우리의 삶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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