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승희 - 우리의 아들’
세상이 충격에 휩싸였습니다. 한 사람의 마음 속에 있는 어둠이 이 세상을 그늘지게 한 것입니다. 미국 땅에 살고 있는 한국인들은 더욱 깊은 마음의 그늘을 안게 되었습니다. 미국인들의 의한 보복적인 인종 차별을 걱정해서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조승희’라는 우울과 좌절이라는 항아리에 갇혀 웅크리고 있던 한 청년의 이야기가 실은 이 땅에 살아가는 모든 이민 가정의 자녀들의 이야기일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가슴이 아립니다. 그의 고민과 아픔이 전해집니다. 그의 부모의 눈물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의 절망적인 분노에 희생당한, 두려움 속에 죽어간 사람들을 생각해 봅니다. 그들과 가족들의 영혼과 삶에 그리스도의 평강을 기원합니다. 더욱 가슴이 아파옵니다.
어쩌면 조승희라는 한 개인의 절망적 선택은 예정되었던 일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절망을 알고 있었지만 아무도 그 절망을 만져주지 못했습니다. 아무도 그 속에 있는 깊은 그늘에 대해 그보다 깊은 사랑을 주지 못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만든 그늘 속에서 오랫동안 신음하며 마음의 질병을 키워왔습니다. 그 질병은 스스로 자라나는 힘이 있어서 결국 한 청년의 삶을 죽음으로 이끌었고, 많은 무고한 사람들의 삶을 빼앗아 갔고, 남은 가족들과 친구들과 사랑하는 사람들의 삶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으며, 함께 살아가는 세상에 두려움과 염려를 새겨 놓았습니다. 갇혀 있던 절망과 우울이 열린 세계에 대한 분노와 증오가 변화되어 세상 모든 사람 앞에 이글거리며 서 있는 것입니다.
미국 이민을 선택한 가정들에게 그 이유에 대해서 물어보면 70% 이상이 ‘자녀 교육’이라고 말합니다. 한국의 치열한 경쟁과 비인격적이 교육제도에 대해 환멸을 느꼈고 미국이라는 ‘선진화된 교육 시스템’을 가진 나라에서 보다 나은 환경을 제공하기 위해 부모가 ‘희생하기로 결정’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대답을 하는 가정의 자녀들 대부분이 23세의 청년 조승희가 지나온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부모는 한국과 다른 새로운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해서 일합니다. 한국에서 어떤 전문직종에서 일했던 간에 미국에서는 다시 일을 배워야 하고 언어와 문화에 적응해야 합니다. 적응 기간이 끝났다고 해도 할 수 있는 일은 대부분 노동집약적인 일로 정해져 있습니다. 우리가 다 아는 것처럼 세탁소나 식료품점, 네일 샆이나 미장원, 가발 가게나 옷 가게, 혹은 한국에서는 해 보지 않았던 건축 노동에 종사하기도 합니다. 거친 삶을 사는 다양한 인종들과 싸우며 살아가느라 마음이 황폐해지고 몸은 병들어 갑니다. 축 늘어진 몸과 마음으로 집에 돌아와 잠시 눈을 붙이고 다시 일터로 나가야 합니다.
영어 한 마디 못하는 자녀들이 학교에서 얼마나 놀림을 당하는지, 하루 종일 말 한마디 못하고 눈치만 보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 얼마나 큰 아픔인지 생각해 볼 겨를이 없습니다. 흑인이면 흑인, 백인이면 백인, 같은 아시안이면 아시안… 자신보다 먼저 미국땅을 살아가는 같은 나이의 아이들로부터 이방인 취급을 당하며 빨라야 2년, 늦으면 5년, 6년이 지나도록 귀머거리로, 벙어리로 지내는 것이 자녀들의 내면 깊은 곳에 얼마나 큰 상처로 자리잡게 되는 지 알지 못합니다. 자녀들이 부모는 왜 이런 삶을 선택했는지, 내가 왜 여기에 있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도 외면합니다. 그저 우리는 너를 위해 희생했고, 너는 우리의 기대와 소원을 만족시킬 의무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만 강조합니다. 자녀가 얼마나 행복하게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내고 있는지 관심을 가지기 보다 자녀가 얼마나 부모가 원하는 성적을 가져오는지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집니다.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자녀의 마음이 점점 병들어가고 있다는 사실보다 부모의 희생의 대가로 자녀가 좋은 대학에 가는 것에 만족해 합니다.
‘조승희’라는 청년은 우리들 모두의 아들입니다. 이미 공식 통계로만 200만을 넘고 있다는 미주 지역의 한인 가정 뿐 아니라 세계에 흩어진 한인 가정들과 한국에 있는, 자신의 내면에 불안과 염려의 단단한 벽을 짓고 그 속에서 날마다 증폭되는 분노와 증오를 키워가고 있는, 자기 속에 갇혀 있는 우리들의 자녀들입니다. 왜 그렇게 자녀를 방치했냐고, 왜 그렇게 어리석은 행동을 했냐고, 너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큰 피해를 보는 줄 아느냐고 손가락질 하기보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한 연약한 영혼을 세상에 혼자 버려둔 우리들의 죄를 먼저 고백하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먼저 눈물로 회개하며 같은 아픔을 나누기를 원합니다. 같은 시대, 같은 땅에 살면서 서로를 격리시키며 서로를 외면한 죄를 고백하기를 원합니다. 쓰러진 작은 자들에게 더 이상 손 내밀지 않았던 우리들의 이기적인 삶을 가슴 깊은 눈물로 회개하기를 원합니다.
“주여, 이 땅을 불쌍히 여기시며 소외 당한 상한 심령들 위에 십자가의 긍휼을 베풀어주소서. 주의 사랑을 입고서도 그 사랑을 나누지 못한 우리들의 이기적인 삶을 용서하여 주시고 우리도 주님처럼 이 땅과 이 시대에 대하여 함께 십자가를 지는 신앙적 결단을 내리게 하소서. 이 땅을 위로하시고 고쳐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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