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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에 두신 소원 na kim 2016-0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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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빌립보서2:13절 개역한글

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제공: 대한성서공회

 

 

2016. 2. 28.

 

본 문 : 2:13

제 목 : 우리 안에 두신 소원

 

혹시 '히말라야'라는 영화 보셨습니까? 오늘은 이 영화에 대해 좀 말씀 드릴 것이 있습니다. 이 영화는 산악인 엄홍길씨 고 박무택씨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엄홍길은 2000년 히말라야에서 세 번쩨로 높은 카첸중가라는 산을 오를 팀을 모집합니다. 박무택은 팀의 막내로 합류하게 됩니다. 두 사람은 가장 절치한 동료이자 형제처럼 지내면서 짧은 기간 동안 8000m 이상의 히말라야 고봉 중에 4개를 더 등반합니다.

 

2004, 박무택에게 좋은 기회가 찾아옵니다. 자신이 등정대장이 되어 최고봉인 에베레스트를 등정하게 된 것입니다. 8850m의 정상 등정에 성공한 후 하산하는 길 8750m 지점에서 박무택과 함께 정상에 올랐던 정민은 탈진하게 됩니다. 설상가상으로 정민을 돕던 박무택은 설맹’(雪盲)에 걸려서 앞으로 보지 못하게 됩니다. 박무택은 산악인의 원칙을 지킵니다. 자신은 이미 가망이 없으므로 후배에게 혼자 내려갈 것을 명령합니다. 정민은 울면서 하산합니다. 박무택은 이제 혼자 산이 되어야 합니다.

 

베이스캠프에서는 난리가 났습니다. 원정팀에서는 세계 각국에서 온 산악인들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모두 거절합니다. 이미 밤이 오고 있고, 폭풍이 몰아쳐서 2차 조난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너무 높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연하고 합리적인 판단입니다. 한 때는 동료였던 다른 한국 원정대조차도 구조를 거절합니다. 이때 6400m 지점의 베이스캠프와 정상 사이에서 2차 캠프를 치고 정상 공격팀의 하산을 기다리고 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영화에서는 박정복이라는 이름으로 나오지만 실명은 백준호라는 인물입니다. 박무택과는 대학에서부터 함께 산을 타던 동료였습니다. 간절하게 애타게 도움을 청했지만 아무도 돕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는 자신이 혼자 구조등반을 하겠다고 말합니다. 베이스켐프에서 안된다고 말리자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영상1)

 

형님, 입장을 바꿔 놓고 생각해 봅시다. 무택이가 여기에 있고 우리가 위에 있다면 말입니다... 무택이는 우리를 꼭 데리러 왔을 겁니다. 나는 올라갑니다.... 형님, 복잡하게 생각하면 아무 것도 못합니다. 나는 그냥 올라 갈랍니다.”

 

그가 박무택을 향해 출발한 시간이 저녁 6, 그리도 박무택을 발견했다고 무전이 온 것은 다음날 새벽 5시였습니다.

 

형님, 무택이 발견했습니다. 그런데 무택이가 동상이 많이 걸렸네요. 좀 어렵겠습니다. 그리고 저도 좀 힘들겠습니다.”

 

백준호는 박무택이 임종할 때까지 자리를 지킵니다. 그리고 시신이 유실되지 않도록 빙벽에 잘 묶어두고 자신은 하산합니다. 먼저 하산했던 정민도, 백준호도 결국 산이 되었습니다.

 

1. 1 99, 그리고 목자의 선택

 

영화의 주인공인 엄홍길 대장에 대한 평가가 다양하고 사실관계에 대한 분분한 의견이 있기는 하지만 적어도 저는 이 영화를 볼 가치는 두 장면에서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첫 장면은 이미 소개했습니다. 모두가 상식을 말하고 모두가 안전한 선택을 할 때, 에베레스트의 8750m를 혼자 죽어가는 친구를 위해 얼음보다 차갑고 죽음보다 어두운 밤길을 한걸음씩 올라가는 한 사람의 모습... 참 좋았습니다. 그리고 영화의 뒷 부분이 엄홍길씨의 인터뷰 장면이 나옵니다. 물론 배우 황정민이 대신합니다. 기자들이 묻습니다. “한국 산악 역사에 가장 위대한 산악인은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혹시 자신입니까?” 그러자 엄홍길은 눈시울을 적시면서 말합니다. 2004518일 길고도 차가웠던 밤, 에베레스트 8750m지점을 올랐던 고독한 산행있었다고 말입니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고, 아직도 돌아오지 못했지만 그 내가 그 자리에 있고, 그 친구가 내 자리에 있었더라도 그 친구 또한 같은 선택을 할 것임을 믿으면서 묵묵히 산을 올랐던 한 사람이 있었는데, 나는 그 사람을 최고의 산악인으로, 그의 산행을 최고의 산행으로 생각한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바보같지 않습니까? 죽을 것이라는 것이 너무 뻔한데 왜 올라가며, 왜 그것을 미화하는 것입니까? 그런데 그런 바보 같은 이야기들이 정말 아름답게 기록된 책이 있습니다. 바로 성경입니다.

 

아마 굳이 성경을 찾지 않아도 99마리의 양을 들판에 두고, 길을 잃은 한 마리 양을 찾아 다니는 목자 이야기(15:3-7)를 잘 아실 겁니다. 성경은 이런 목자를 선한 목자라고 말합니다. 선한 목자는 양떼를 위해 목숨을 버린다는 겁니다.(10:11)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 목자는 과연 선한 목자일까요? 지혜로운 목자일까요? 한 마리를 잃었다고 아흔 아홉 마리를 들판에 내버려두고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두루 다니는... 이런 어리석은 목자가 있을까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이 목자로 대입하신다는 겁니다. 왜 예수님은 이렇게 어리석은 목자의 모습에 자신을 투영하고 있는 것일까요?

 

2. 예루살렘으로 가는 한 사람

 

마태복음 16장은 복음서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왜 그럴까요? , 첫째는 사도들의 최초의 신앙고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고백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도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16;16) 두 번째 중요한 이유는 바로 다음에 나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칭찬하시고 교회의 기초가 이 신앙 고백에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16:21) 무엇을 말씀 하셨다구요?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향해 가실 것입니다. 그곳에는 고난과 죽음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삼일만에 살아나야 합니다. 이 말을 들은 제자들이 수용할 수 있을까요? 천만에 말씀, 만만에 콩떡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만류합니다.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16:22) 그런데 예수님은 베드로를 엄하게 꾸짖으십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16:23)

 

, 예수님은 어떤 선택을 했을까요? 예루살렘, 고난과 핍박과 죽음이 기다리는 곳으로 갔을까요? 너무 분명하게 다가올 고난을 잠시 피해서 다른 곳으로 갔을까요? 예수님은 참 어리석게도 예루살렘으로 가셨습니다. 결과는 무엇입니까? 십자가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왜 예수님이라는 목자는 예루살렘, 선지자의 무덤으로 갔을까요? 그것을 1차적으로 예루살렘이 바로 잃어버린 양이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목자를 외면하고 해치고 십자가에 못박지만, 그러나 회복해야 하고 돌이켜야 하는 양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3. 하나님의 소원

 

그리고 또 하나 더 생각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도 바울을 통해 빌립보 교회에 편지를 보내시면서 예수님의 사역을 이해하는 중요한 틀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면 하나님은 교회와 성도 안에 소원을 두셨다고 했습니다. 그것도 억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위해서 그랬다고 합니다. 교회와 성도 안에 하나님의 소원을 두다.... 이해가 되십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소원이 여러분과 제게 들어와 있다고 합시다. 그것... 이룰 수 있으십니까? 이룰 능력, 이룰 자신, 이룰 상황이 되십니까?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선하신 소원을 이룰 어떤 자격도 능력도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소원을 두셨을까요? 그것도 기쁨으로 말입니다.

 

빌립보서 2:5-11는 성경에 나온 예수님의 생애를 요약하는 말씀 가운데 가장 시적이고 아름다우면서 완벽한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이 말씀을 통해서 성도와 교회가 어떻게 하나님의 소원을 이룰 수 있는지 힌트를 주십니다. 함께 읽으실까요?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2:5-11)

 

우리가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 먼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 바로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 어떤 마음입니까? 하나님과 같지만 하나님처럼 세상에 오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을 비우고 종의 모습으로, 사람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자신을 낮추셔서 죽기까지 하나님의 뜻에 복종했습니다. 결국 십자가에 죽었습니다. 이 마음, 이렇게 할 수 있는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목자이되, 길을 잃은 양의 심정을 가진 목자입니다. 두려움과 외로움에 울음 우는 양의 마음을 체휼하는 목자입니다. 가장 연약한 양의 모습이 되어 자신을 제물로 기다리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선한 목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마음을 품을 수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4. 다시 예루살렘으로 가는 한 사람

 

예수님이 예루살렘 입성 이후 약 25년이 지났습니다. 그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지중해 연안 곳곳에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사도 바울은 3차까지 전도여행을 마쳤습니다. 그런데 밀레도라는 지역의 교회에서는 지금 큰 소란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미 연로한 사도 바울이 가장 친밀한 교제를 나눴던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을 불렀습니다. 바울은 그들 앞에 고별설교를 합니다. 설교의 핵심은 2022-25절입니다. 읽으실까요?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보라 내가 여러분 중에 왕래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였으나 이제는 여러분이 다 내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할 줄 아노라”(20:22-25)

 

바울은 무슨 말을 하고 있습니까? 나는 예루살렘으로 간다는 겁니다. 그곳에는 분명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립니다. 그런데 그곳으로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나의 사명입니다. 여러분을 다시 보지 못하게 될 것 같다는 겁니다. 모두가 울음바다가 되어 만류합니다. 왜 뻔한 결과가 기다리는데 뛰어드냐고 말합니다. 심지어 예언의 능력이 있는 사람이 자신의 몸을 묶고 나타나서 당신이 예루살렘에 가면 이렇게 결박당할 것이라고 외쳐도 바울은 오히려 그들을 꾸짖습니다. 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21:13)

왜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일까요? 그곳에 핍박이 있고 결박이 있고 감옥이 있고 죽음이 있는데 말입니다. 그의 심장에 하나님의 소원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어떤 소원을 주셨습니까?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입니다. 바울이 이 일을 잘 할 수 있을까요? 아니요... 못합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못합니다. 그런데 할 수 있습니다. 누구의 마음을 품으면 이 모든 소원을 이룰 수 있을까요? ,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입니다. 그 마음으로 받은 사명을 감당하려고 했더니 그의 삶이 너무 예수님과 닮아있지 않습니까? 그의 가는 길에 예수님이 함께 하심이 보이지 않습니까?

 

성도 여러분! 우리가, 우리의 자녀들이 이 세상에서 잘... 사는 사람으로 사는데 필요한 것은 지식과 능력일 것입니다. 적당한 양심과 신앙도 양념이 되면 좋습니다. 충분히 계산했고 잘 따져봤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사는 세상에는 히말라야가 없습니다. 더 높은 이상이 없습니다. 철저하게 이 땅의 논리로 살아갈 뿐, 하나님 나라의 영적 쾌감을 맛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서 우리들에게 소원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마음으로 그 소원을 이루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우리가 품는 순간, 우리는 가장 낮아져야 하고, 겸손해야 하고, 서로를 섬겨야 하고, 나를 먼저 희생해야 합니다. 산소가 모자라는 산기슭에서 죽어가는 사랑하는 친구의 타는 심장의 고통과 절망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그 친구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되어 우리를 구하신 예수님처럼 그 친구가 되어 그 친구를 구하는 것입니다. 복음이 없이 죽어가는 이웃들을 보며 내가 그들의 불행을 가슴으로 느껴야 합니다. 고통받는 양의 심정으로 들판을 헤매고 계신 선한 목자되신 예수님의 마음... 그 마음으로 서로를 섬기며 우리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거룩한 소원을 함께 이루어가는 사랑하는 초대교회와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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