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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視線) na kim 2016-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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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요한복음21:20-23절 개역한글

20.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여 주를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러라

21.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삽나이까

22.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23. 이 말씀이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제자는 죽지 아니하겠다 하였으나 예수의 말씀은 그가 죽지않겠다 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하신 것이러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2016. 4. 17.

● 본 문 : 요한복음 21장 20-23절 말씀

● 제 목 : 시선(視線)

 

지난 주에 제게는 의미가 있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한 일이 하나 있었습니다. 혹시 윤정용 목사라고 기억하십니까? 약 3년 전에 저희 교회에서 말씀을 전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를 개척할 때 함께 했던 좋은 친구입니다. 올해 텍사스 달라스에서 교회를 개척했고, 우리 교회가 돕고 있습니다. 그리고 작년에 제직수련회에서 말씀을 전했던 장홍석 목사 기억하시지요? 역시 교회를 개척할 때 함께 했었습니다. 2001년 6월에 나이가 비슷한 세 친구 목회자가 함께 같은 뜻으로 교회를 시작했었습니다. 그리고 1년 반 만에 처절한 실패를 인정하고 헤어지기로 결정했었습니다. 좋은 뜻으로 모였고, 좋은 목표를 세웠었지만 작은 교회에서 함께 목회를 한다는 것이 정말 어려운 일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팀이 무너진 것이 꼭 누구 탓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지금 달라스에 있는 윤목사는 피해의식이 좀 있습니다. 그동안 장목사와 제가 자기를 원망하거나 책망하지 않는데도 의식적으로 거리를 두고 먼저 연락하는 일이 잘 없었습니다. 그런데 헤어진 후 처음으로 윤목사가 우리 두 사람을 메시지 창을 통해서 불렀습니다. 나이가 드니까 함께 있었던 때가 그리고 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사랑한다... 뭐 이런 메시지도 보냈습니다. 오~~ 어쩐 일이냐고... 간지럽게 왜 이러느냐고... 서로 핀잔도 주고 농담도 주고 받았지만... 실은 저도 좋았습니다. 생각해보면... 거룩하고 좋은 뜻으로 모이기는 했는데, 헤어질 때는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로 헤어졌습니다. 팀 목회, 은사와 사역의 나눔, 서로를 섬기는 목회.... 참 좋은 말들만 골라서 자신있게 시작했는데 헤어질 때는 서로 원망하는 마음이 많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1. “나를 따르라!”

사실 저희들의 갈등은 늘 아주 사소한 일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교회를 위한 결정이나 비전에 대한 생각을 나눌 때는 문제가 없었습니다. 많은 갈등이 우리 자신에게서가 아닌 성도들이 우리를 대하는 방식의 차이에서 왔습니다. 팀 목회를 한다고 했고, 세 사람이 목회적 권위에서 순서나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역할의 차이만 있다고 공포했지만, 아마도 성도들이 받아들이기는 그렇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우리를 조금 다르게 대하면... 잘 참지 못했습니다. 내가 받아야 할 목회자로서의 관심과 사랑을 빼앗긴 것 같은 느낌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교역자 회의를 하는 월요일이 되면 자주 그런 문제로 다투게 되고, 감정이 상해서 합의하고 결정한 일들을 안하겠다고 선언하고... 그런 일들의 반복에 서로에 대해 지치게 되고.... 결국 헤어지기로 결정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집중할 때 우리는 함께 할 수 있었는데, 시선이 성도들에게 옮겨졌을 때 우리는 분열했었습니다.

 

가끔 그때를 생각합니다. 왜 그랬을까? 왜 좀 더 참지 못했을까? 왜 좀 더 양보하고 보살펴주지 못했을까? 왜 좀 더 받은 사명에 집중하지 못했을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지금 다시 모이면 할 수 있을까... 생각하기도 합니다.

 

  오늘 말씀은 지난 3주간의 말씀과 연관해서 이해하시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만난 제자들은 많이 당황합니다. 믿음이 없었고, 부활의 신앙으로 살지도 못했습니다. 갈릴리로 낙향해서 바다에 그물을 던지다가 다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나를 사랑하느냐?”고 묻습니다. 그리고 사명을 주십니다. “나를 사랑한다면 그 사랑으로 교회를 섬기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나를 따르라!”(요 21:19)고 명령하셨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비슷한 장면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부였던 베드로를 부르시는 장면입니다. 마태복음 4장 19-20절에서 예수님을 베드로를 부르셨고 그는 응답했습니다.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마 4:19-20) 베드로는 옳다고 생각하면 즉각 반응하는 사람입니다. 3년이 지나 베드로는 다시 갈릴리 바닷가에서 다시 그 명령을 듣습니다. 그는 반응합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이 명령을 하시고 일어서서 길을 떠난 것 같습니다. 20절을 보십시오.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님 주님을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더라”(요 21:20) 베드로가 돌아보니 요한이 예수님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즉 19절과 20절 사이에 생략된 장면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고, 베드로는 일어나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따르다가 베드로가 문득 뒤를 돌아보니 요한도 예수님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가 예수님께 묻습니다. “예수님, 내가 어떻게 십자가를 져야 하는지, 어떻게 죽어서 나의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는지는 잘 알겠습니다. 그런데 주님, 지금 우리 뒤를 따르는 요한은 어떻게 됩니까?”

 

  2. 넘어지는 이유

 

예수님은 그에게 다소 차갑게 느껴지는 대답을 주십니다.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요 21:22)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이것을 23절에서 다시 한 번 반복합니다. 성경이 이 장면을 기록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요한복음 21장 15절 이하의 말씀은 성경의 역사와 교회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부활의 신앙에 대해 거듭 실패하고 있는 제자들을 찾아오셔서 그들에게 사명을 주시고 있습니다. “나의 사랑으로 내 양을 먹이라!” 이것은 목회의 명령이면서 교회를 향한 명령이기도 합니다. 이제 이 명령을 받은 모든 성도와 교회는 자신의 생명을 십자가라는 제단 위에 드리면서 이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베드로는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명령에 3년 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일어나서 뒤를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3년 전과 지금은 다릅니다. 3년 전에는... 예를 들어 예수님을 만난 지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에는... 그야 말로 아무 것도 모르고 예수님이 좋아서 따를 때에는 예수님만 보였습니다. ‘사람을 낚는 어부’라고 하는 사명만 보였습니다. 배와 그물과 가족과 정든 바다를 버리고 예수님의 뒤를 따랐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뭘 좀 압니다. 이미 예수님은 내가 했던 신앙의 고백을 반석으로 삼아서 교회를 세우겠다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비록 배신을 거듭했지만 나를 찾아오셔서 나의 사랑을 확인하셨고, 그 사랑의 고백 위에 다시 교회를 향한 사명을 주셨습니다. 이제 다시 한번 결단하고 주를 위해 십자가를 지고 뒤를 따르면... 가장 사랑받는, 가장 좋은 제자가 될 것 같습니다. 내가 뭔가가 된 것 같고.. 이룬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보이는 것이 많습니다. 자신이 받을 영광도 보이고, 명예도 보립니다. 그 뿐만 아닙니다. 뒤를 돌아보니 다른 제자가 보입니다. 그 제자는 수제자로서 인정과 사랑을 받았던 자신과는 달리 또 많은 사랑과 아낌을 받았던 제자입니다. 자신은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갔지만 그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십자가를 지켰습니다. 예수님과 마지막 만찬을 할 때도 예수님과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았던 제자입니다. 내가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뒤를 따르고 교회를 섬기고 생명을 바치는 것은.... 잘 알겠는데... 그런데 요한은 뭐지...?라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가 예수님께 묻습니다. “요한은 어떻게 됩니까?”

 

  3. 각자 받는 사랑, 각자에게 허락된 사명이 있습니다.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해서 베드로에게 두 가지 메시지를 주십니다. 첫 번째 메시지는 각자가 받는 사랑이 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늘 가장 많이 사랑받는 사람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누가 예수님을 제일 사랑하는지, 누가 예수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는지, 누가 천국에서 제일 큰 제자인지를 늘 논쟁했습니다. 예수님이 자기 아닌 다른 제자를 사랑하면 그만큼 자신의 사랑을 잃는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같은 생각이 마르다의 논쟁에서도 나옵니다. 예수님이 베다니의 나사로의 가정을 얼마나 사랑하셨고, 얼마나 큰 은혜를 부어주셨습니까? 죽었던 나사로가 다시 사는 놀라운 은혜가 있는 가정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마르다에게는 부족한 것처럼 보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가 일을 하고 있을 때 마리아가 예수님 가까이에서 말씀을 듣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빼앗기는 것 같습니다. 내게 집중되어야 할 관심과 사랑이 분산되는 것 같습니다. 그녀는 달려가서 예수님과 마리아 사이에 섭니다. 그녀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각자 받은 은혜가 있고 각자 받는 사랑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은혜와 사랑으로 각자 섬길 일들이 있습니다. 자신의 일에 충실하고 만족하라고 권면하십니다.

 

베드로에게 주시는 두 번째 메시지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성도 각자에게 사명을 주십니다. 서로 비교하거나 경쟁할 일이 아닙니다. 베드로에게는 베드로의 사명이, 요한에게는 요한의 사명이 있습니다. 내가 대단한 일을 한다고 해서 다른 성도의 일을 뺏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성도가 사역에 크게 인정을 받는다고 해서 내가 받은 사명이 손상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그의 일이, 나는 나의 일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어떤 사랑을 받고 어떤 사명으로 사는가 하는 것은 그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결정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마치 베드로가 자신의 사랑과 사명을 결정할 때 요한의 영향을 받지 않았던 것처럼 말입니다.

 

4. 시선집중 그리스도

 

지난 금요일 신은희 권사님의 부친이신 고 신순석 장로님의 천국환송 예배가 있었습니다. 세 교회가 협력해서 예배를 드렸는데, 저는 하관예배에 말씀을 전했습니다. 말씀을 준비하고 묵상 하는 중에 제 마음에 깨닫는 바가 많았습니다. 본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1-2)

 

증인... 이 본문에 증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법정에 가보면 증인 혹은 증거라는 말이 얼마나 중요한 지 알 수 있습니다. 자... 여러분! 우리가 하늘 법정에 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평가하십니다. 그때 누가 우리의 증인이 되어줄까요? 히 12:1에서는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우리들에게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우리의 믿음과 삶을 증언해주는 증인들일까요? 생각해보니... 아닙니다. 나도 그들을, 그들도 나를 모릅니다. 증언해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왜 그들이 증인일까요? 우리가 잘 아는 히브리서 11장 1-2절에 답이 있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히 11:1-2) 그들은 다른 누구의 증언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믿음이 그들의 증거가 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면, 다른 사람이 아닌 우리 자신의 믿음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증언해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히 12:2에서 권면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님께 집중하자!”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 세상의 부와 명예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 성공이나 성취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에 집중해야 합니다. 베드로가 주님의 뒤를 따르기로 결단했으면 주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 믿음이 우리를 증거할 것입니다. 주님만을 바라보는 시선과 삶이 우리의 증거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뒤를 따르는 베드로에게 요한이 보입니다. 곧 시험에 빠집니다. 넘어집니다.

 

  전에 제가 발레의 훼떼(fouette)라는 동작에 대해 설명드린 적이 있습니다. 간단하게 다시 설명하면 발레리나가 같은 자리에서 30-40회 회전을 합니다. 그런데 어지럽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바로 spotting이라는 기술 때문입니다. 발레리나가 돌면서 허공의 한 지점에 시선을 고정합니다. 발레리나의 머리는 가장 늦게 돌고 가장 빨리 그 자리로 돌아옵니다. 시선을 고정하기 위해서입니다. 30-40바퀴를 빠르게 돌아도 어지럽지 않은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명령과 함께 초대교회를 시작하는 베드로와 제자들입니다. 어이없게도 교회의 반석인 베드로가 교회를 시작하기도 전에 가장 먼저 넘어집니다. 왜요? 바로 동료인 요한을 보고 시선이 흔들렸기 때문입니다. 어지러워졌습니다. 각자 받은 은사와 사랑으로 서로를 섬기고 하나님의 아름다운 교회를 함께 세워나가야 할 사람들이 서로에게 걸림이 되고 스스로 걸림이 되는 어리석음이 충분히 우리 안에 가능한 일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권면하십니다. 각자 받을 사랑이 있고, 각자에게 허락된 은사와 사명이 있습니다. 모든 성도와 교회는, 그러므로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는 명령에 집중해야 합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는 명령에 집중해야 합니다. 내가 허락하신 은혜와 주신 사명... 우리 앞에서 놓인 십자가에 집중해야 합니다. 우리보다 앞서 걸어가시는 주님께 시선을 고정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성도 여러분! 흔들리고 어지러운 세상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춤, 가장 헌신된 삶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초대교회와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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