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적 교회 | na kim | 2016-04-3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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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마태복음28:19-20절 개역한글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2016. 4. 24 ● 본 문 : 마태복음 28장 19-20절 말씀 ● 제 목 : 선교적 교회
지난 주 재미있는 칼럼을 하나 읽었습니다. 호주에서 한인 구세군 사역을 하시는 한 목회자의 글이었습니다. 그는 우리시대의 교회를 두 종류의 교회로 분류했습니다. 첫째는 ‘선교적(宣敎的)인 교회’이고 둘째는 ‘선교(宣敎)의 적(敵)인 교회’입니다. 다소 말을 비틀어놓은 느낌은 들었지만 생각할수록 맞는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떤 교회가 선교적일까요? 어떤 교회가 선교의 적인 교회일까요? 과연 믿음을 가진 성도들의 모임이 교회인데... 교회가 선교의 적이 될 수 있을까요? 이와 비슷한 말씀은 이미 성경에 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그리고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 보라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빌 3:17-18) 사도 바울은 지금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있고, 성도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데... 그들의 삶이 십자가의 원수로 행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성도가 십자가의 원수로 행한다.... 가능할까요? 네... 가능한 것 같습니다. 빌립보서에서 하나님은 바울을 통해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 사이의 분쟁에 대해 언급하고 있고, 성도 간의 갈등에 대해 경고하고 있습니다. 빌립보서 1장에는 바울의 고난과 투옥을 오히려 기뻐하는 성도들이 있다고 말하고 있고, 순전하지 못한 다툼으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했습니다. 빌립보서 4장에는 유오디아와 순두개라는 여인들이 나오는데, 아마도 이들은 교회를 향한 열심이 지나쳐서 공동체의 하나됨을 해친 것 같습니다. 그래서 빌립보 교회를 향해서 같은 마음으로 서로를 섬기고 교회를 섬기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런 면을 보면 교회 안에 있다는 이유,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 성도라고 불린다는 이유만으로 내가 교회 안에서 하는 모든 판단과 결정이 선하다고 주장할 수는 없겠습니다. 성도와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와 뜻에 순종할 때 선교적 교회가 될 수 있지만, 교회에 복음이 사라질 때 선교의 적이 되고 방해가 되는 교회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4주간의 말씀을 통해서 주님께서 부활하신 이후 교회가 어떻게 준비되고 있는지를 생각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든 관심은 교회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오늘날 세계교회는 예수님의 이러한 관심이 실현된 결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고민합니다. 예수님의 관심과 열매로서의 교회가 복음을 생명력있게 증거하는 선교적인 교회가 되면 좋겠는데... 그렇지만은 않은... 오히려 선교의 적이 되는 여러 가지 일들이 발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번 주일부터 약 6-7주 정도, 하나님이 허락하신 교회에 대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허락하신 가장 큰 선물 중에 하나입니다. 이 선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을 증거해야겠습니다. 1. 교회, 부르심을 받아 모인 사람들 신약 성경에서 ‘교회’라는 말을 누가 가장 먼저 사용했을까요? 예수님은 마태복음 16장 18절에서 오늘날 교회로 번역되는 한 단어를 사용하십니다. 바로 ‘에클레시아’입니다. 이 단어는 ‘밖으로 불러내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또 내가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마 16:18)라고 말씀하셨을 때 “.... 내가 너와 같은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들을 세상으로부터 불러내어 나의 교회를 세우리니...”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원래 ‘에클레시아’란 헬라 사람들이 어떤 사무적인 일을 처리하기 위해서 함께 모여 의논하던 모임을 말하는 단어입니다. 사람들을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모여서 문제를 해결하고 사무를 처리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교회를 설명하시면서 이 개념을 사용하신 이유는 분명합니다. 베드로를 부르시고 요한을 부르시고 다른 모든 제자를 그들의 삶의 영역에서 불러내셨던 것처럼 이제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사람들을 불러내셔서 하나님 나라의 귀한 사명을 감당하는 공동체로 만드시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따라서 교회는 모여야 합니다.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나라의 일을 의논해야 합니다. 일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초대교회를 섬기는 성도들을 격려하면서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히 10:2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 교회, 흩어진 사람들 그런데 교회는 ‘에클레시아’만으로는 설명되지 않습니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는 부지런히 모였지만 흩어지지 않으면 안되는 시기를 맞이합니다. 교회의 흩어짐은 두 가지 방식으로 이뤄집니다. 첫 번째 이유는 ‘교회를 향한 박해’입니다. 사도행전 8장에 보면 모이는 교회가 흩어지지 않으면 안되었던 중요한 이유를 설명합니다. “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행 8:1) 여러분, 그래서 교회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모여야 하는 교회가 흩어졌으니 교회는 이제 사라지는 것일까요? 8장 4절에서는 열심히 모였던 예루살렘 교회가 경험하지 못했던 일들이 흩어진 성도들의 삶의 현장에서 실천되고 있음을 설명합니다.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이 말씀을 전할새...”(행 8:4)라고 했습니다. 모여야 교회인 줄로 알았는데, 흩어진 그들의 새로운 삶의 현장에서 복음이 증거되고 새로운 교회가 시작되고 있습니다. 이 교회를 ‘디아스포라’ 교회라고 말합니다. ‘디아스포라’라는 말은 많이 들어보셨을 겁니다. 오늘날 한 민족이 세계의 여러 타지역으로 흩어져 살아가는 현상을 보편적으로 ‘디아스포라’라고 통칭합니다. 성경에서의 디아스포라는 이미 구약에서 실현됩니다. 이스라엘은 나라를 근동지방의 열강들에게 빼앗겼고, 여러 나라에 흩어져서 살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시대 이후에 로마의 의해 예루살렘이 무너지면서 다시 한번 디아스포라의 시대가 열립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민족적인 상황과 함께 초대교회 또한 흩어지는 교회, 즉 디아스포라 시대의 교회를 경험하게 됩니다. 디아스포라 교회는 위에서 말씀드린 대로 박해의 결과입니다. 그런데 초대교회는 디아스포라의 또 다른 이유 하나를 만듭니다. 그것은 바로 선교적 디아스포라입니다. 행 9:31을 보면 박해 받는 중에도 하나님의 교회는 든든히 서 갑니다.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행 9:31) 많은 성도들이 흩어졌지만 예루살렘 교회는 여전히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흩어진 교회를 통해서 새로운 경험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베드로에게 로마의 군인이었던 고넬료를 통해서 이방인들에 대한 구원의 가능성에 대한 비전을 보여주십니다. 또한 박해를 통해 흩어졌던 성도들을 통해서 이방인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게 됩니다. 행 11장 19-21절은 교회 역사에 매우 중요한 장면입니다. “그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행 11:19-21) 그들은 박해의 결과가 오히려 선교의 열매로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랍니다. 처음에는 그 지역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했는데... 같은 지역에 살게 된 헬라 사람들에게도 복음을 전했더니 믿더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성령 하나님의 강력한 역사하심을 경험합니다. 그 결과 22절에서 예루살렘 교회는 중요한 결정을 합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헹 11:22) 여러분, 이 결정이 왜 중요할까요? 이전에 디아스포라는 수동적이었습니다. 박해하니까 흩어졌습니다. 그런데 이제 능동적인 디아스포라가 되어야 하는 이유를 발견합니다. 그것이 바로 선교적 디아스포라입니다. 선교를 위해, 복음을 전하기 위해 성도와 교회를 파송하는 일이 시작된 것입니다. 박해를 피해 흩어지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복음을 들고 세상으로 흩어지는 성도들과 교회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바나바는 고향인 다소에 내려고 있던 바울을 소환하고 안디옥으로 내려가서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는 일을 시작합니다. 교회의 새시대가 열립니다. 흩어지는 교회, 선교적 교회의 시대가 열립니다. 3. The Great Commission이 실현되다. 그렇다면 여러분, 이 흩어지는 교회는 우연한 결과일까요? 박해를 받고 흩어져서 살다보니 복음을 전하게 되고 세계로 선교하게 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실 알고 보면 흩어지는 교회는 이미 주님의 계획 안에 있습니다. 본문을 보십시오. 흩어지는 교회는 우리 주님께서 명령하신 교회입니다. 우리는 The Great Commission이라고 불리는 주님의 명령을 잘 알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함께 읽어 봅시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19-20) 그런데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은 아마도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는다’는 말씀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복음을 전하고 예루살렘을 방문한 각 지역의 사람들에게 방언으로, 즉 유대인들이 사용하던 아람어로 전도를 해도 각 지방, 각 나라의 말로 들리는 놀라운 능력으로 전도를 했지만... 그것으로 만족했습니다. 각각 다른 언어로 소통하게 되었다는 놀라운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잘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저 함께 모여서 예배하고 찬양하고 성도의 교제를 누리면서 천국의 기쁨에 취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가.서.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고민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박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스스로 흩어지지 않았던 교회는 박해에 의해서 흩어지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정든 고향을 떠나 이방으로 피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새롭게 정착하는 바로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삶이 뿌리내리는 곳에 그들을 통한 복음이 함께 뿌리내리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사는 모든 곳에 교회가 서고 교회를 통해 복음이 증거됩니다. 교회가 이것을 계획하고 준비하지 않았는데 성령 하나님은 이 일을 이루어가십니다. 이 일을 목격하고 경험한 교회는 이제 하나님의 보여주신 이 뜻에 순종하여.... 박해에 의한 흩어짐의 시대가 아닌 복음을 들고 산을 넘고 강과 바다를 넘는 능동적인 흩어짐의 시대를 열어갑니다. 주님이 교회에 허락하신 거룩한 대사명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4. 선교적 교회, 선교적 성도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 교회는 선교적인 교회일까요? 선교의 적인 교회일까요? 여러분과 저는 선교적인 성도일까요? 선교의 적인 성도일까요? 당연히 우리 교회와 성도들은 모두 선교적이겠지요. 선교의 적일 수는 없지 않습니까? 다만 조금 부족할 뿐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부족함을 채워서 주님 오시는 날까지 선교적인 교회와 성도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저는 두 가지를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먼저 오늘 본문에서 주님이 주신 대사명(The Great Commission)을 받기 전에 먼저 우리가 기억해야 할 대계명(The Great Commandment)이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주신 대계명이 무엇인지 기억하십니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37-40) 대계명과 대사명은 서로 어떻게 조화될 수 있을까요? 대계명은 당연히 성도와 교회의 신앙과 윤리의 대강령입니다. 우리가 지켜야 할 기본입니다. 대사명은 성도와 교회가 이땅을 살면서 감당해야 할 일입니다.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주님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두 번째는 마 28:19-20의 본문과 조금 전에 보신 행 1:8에 보면 ‘세상 끝 날까지’와 ‘땅 끝까지’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세상의 끝은 언제이고 땅의 끝은 어디입니까? 바로 지금이 현재 시간의 끝입니다. 우리는 지금 시간의 끝을 살고 있습니다. 땅의 끝은 어디입니까? 오늘날 사람이 사는 모든 곳에 땅의 끝이면서 우리가 사는 이곳이 땅의 끝입니다. 선교적인 삶, 선교적인 교회가 되고 싶으십니까? 선교는 오늘 바로 지금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시작됩니다. 주님 오시는 날까지 우리의 삶의 모든 현장에서 복음의 증인으로 살겠다는 엄중하고 아름다운 결단이 오늘 여러분과 제게 있기를 소망합니다.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까지 하나님을 사랑하며 이웃을 사랑하며 우리에게 허락하신 복음을 이 세상의 모든 이웃에게 증거하는 초대교회와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땅 끝, 대계명과 대사명이 만나다. 사도행전의 첫 번째 장에는 초대교회에 주님께서 맡기신 거룩한 사명이 다시 한번 강조됩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이 말씀은 내용적으로 마 28:19-20의 말씀과 같습니다. 결국 교회는 세상 끝날 까지... 그리고 땅 끝까지 복음을 증거하며 살아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오늘날 세상의 땅 끝을 어디로 볼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말씀 드린 대로 The Great Commission 즉, 대사명이라고 불리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The Great Commandment, 즉 대계명이라고 불리는 말씀이 있습니다. 어떤 말씀인지 기억하십니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37-40) 대계명과 대사명은 서로 조화되는 개념일까요? 반대되는 개념일까요? 당연히 서로 조화됩니다. 둘 다 교회에 주신 우리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사랑하고 섬겨야 하는 이웃과 모든 민족은 전혀 다른 대상을 말하는 것일까요? 우리가 복음을 들고 가야 하는 열방과 우리와 함께 사는 이웃은 전혀 다른 대상일까요? 아닙니다. 현대교회가 선교적인 사명을 가지고 고민하는 내용이 바로 이것입니다. 어디를 땅 끝으로 보고 누구를 모든 민족으로 볼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당연히 땅 끝과 모든 민족은 아직 복음이 증거되지 않은 지역과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리고 땅 끝은 우리들의 이웃들,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이 필요한 모든 이웃들을 말합니다. 교회의 증인되는 삶은 예루살렘과 유다를 구별하지 않고 사마리아와 땅끝을 구별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그 모든 지역과 사람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섬겨야 할 이웃으로 선택합니다. 오늘날 모이는 교회와 흩어지는 교회는 1. 부르심, 교회의 시작(마 22:1-14) 2.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고전 1:2) 3. 변화의 시작(엡 2:19-22) 4. 세상으로 가다.(요 20:21, 마 28:18-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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