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 '프로셀라베토' | na kim | 2016-05-0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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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로마서15:5-7절 개역한글5. 이제 인내와 안위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6.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7. 이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2002. 2. 24. * 본 문 : 로마서 15 장 5-7 절 말씀 * 제 목 : 교회 - ‘프로셀라베토’
제가 신학교에 다닐 때 히브리어를 가르치셨던 교수님이 있었습니다. 학생들을 좋아하셨고, 가르치는 일에 열정도 많았던 분입니다. 히브리어라는 관문을 통과하는 일이 쉽지 않아서 학생들은 대부분 교수님을 어려워했지만 그분이 가진 순수한 열정에 대해서만은 모두가 인정했었습니다. 그런데 이 분이 노년에 ‘성령론’에 필이 꽂혔습니다. 한국의 신학교는 대부분 교단을 중심으로 운영되고 그 교단 신학의 근간이 되는 기본 사상이 있기 마련인데, 그 교수님의 성령론은 교단의 입장과 다른 면이 있었습니다. 당시 저희 교단으로서는 생소했던 성령세례를 주장하셨고, 성령의 역사하심의 방식에 대한 입장의 차이가 있었습니다. 치열한 논쟁이 있었고, 결국 그 교수님은 더 이상 강단에 설 수 없었습니다. 제가 유학을 오고 난 다음 한국에서 좋지 못한 소식이 들렸습니다. 총장 후보로 거론되던 두 동기 교수님이 있었습니다. 한 교수님의 연약한 점이 동기이자 친구였던 다른 교수님에게 알려지게 되었는데... 감싸주는 것처럼, 보호하는 것처럼 해서 모든 것을 알고 난 다음.... 교단에 공개해서 다시는 돌아올 수 없도록 만들었습니다. 교단에서는 이분의 의도와 행위가 옳지 않다고 판단해서 그 분 또한 다시는 학교로 돌아올 수 없다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저희들은 스승 두 분을 한꺼번에 잃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얼마 전에는 교단의 역사에 대한 두 역사 신학자들의 의견의 차이가 있었습니다. 두 분 다 교단에서 키운 기독교 역사학자로 많은 지지를 받았고, 학문적 성과도 많았던 분들입니다. 그런데 한 분이 그런 상황을 견디기 힘들어했습니다. 편법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평소 우리가 알고 있던 그 분이라면 도저히 그런 일을 하지 않을 것 같았는데, 너무 엉뚱하고 비상식적인 일에 휘말렸습니다. 결국 그 한분은 학교와 교단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제가 신대원 2학년 때 한국 교회사에 대한 저만의 시각으로 과제를 제출하면서 F를 맞을 각오를 했었는데, 오히려 그런 저를 칭찬하시면서 좋은 시각이라고 좋은 목회자가 되라고 격려하셨던 분이었는데...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여러분, 저는 조금 전에 저를 가르쳤던 네 분의 은사들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제가 신학교에서 만났던 교수님들의 거의 절반에 해당합니다. 개인적으로 만나면 참 좋은 분들이고, 많이 고민하고 흔들렸던 저의 신학교 생활에 잊을 수 없는 분들이었지만 신학교에서는 더 이상 이분들의 흔적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들이 젊은 날을 바쳤던 학교와 교단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안타깝고 아쉽습니다. 왜 그들은... 왜 교단은... 이런 결정을 서로에 대해서 할 수 밖에 없었을까요? 차이가 발생했을 때... 그 차이를 좁히고 이해하고 해결할 수 있는 길은 없었을까요?
1. 사도 바울의 고민 오늘 본문의 배경이 되는 로마서 14장을 보시면 사도 바울이 깊은 고민 가운데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의 고민은 “진리란 무엇인가?” “복음을 어떻게 전할까?” “교회를 어떻게 세울까?” 하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바울의 고민은 바로 로마 교회와 성도들 사이에 존재하는 여러 가지 차이들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특히 스스로 믿음이 있고, 바르게 서 있다고 생각하는 교회의 중요한 일군들에게서 발견되는 차이와 그 차이가 만들어내는 관계의 어려움은 바울의 근심거리였습니다. 바울의 고민의 이유가 되었던 그들의 차이는 크게 두 가지에 관한 것입니다. 하나는 음식물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절기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유대인과 헬라인, 각지에서 많은 민족들이 함께 모인 로마교회는 그 민족의 수만큼이나 다양한 풍습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오랫동안 먹던 음식, 지켜오는 절기가 각각 달랐습니다. 특히 유대인이면서 예수를 믿은 성도들이 이방인으로 예수를 믿는 성도들에 대해 많은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그들은 다른 문화권의 생활 방식과 문화를 이해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복음은 받아들였지만 아직 삶이 변화되지 못한 이방 성도들에게 있어서 유대주의적인 음식문화와 절기를 온전히 받아들이기란 힘든 것이었습니다. 또한 유대인 기독교인들은 그들이 지켜오던 음식문화와 절기 등이 과연 예수 그리스도의 새로운 복음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들이 오랫동안 지켜왔으므로 다른 민족들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복음과 신앙의 차이가 아닌 음식과 절기의 문제로 다투고 분열하게 되었습니다.
2.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사실 이 문제는 로마 교회뿐만 아니라 많은 다른 지역의 교회들이 경험하고 있는 문제였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을 통해서 답을 주셨습니다. 문제는 복잡했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답은 단순하고 분명했습니다. 로마서 14장 5-8절의 말씀을 봅시다. “어떤 사람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으로 확정할지니라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5-8) 어떤 음식을 먹으며 어떤 절기를 지키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살고자 하는 중심이 중요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는 먼저 말씀드린 제가 공부한 신학교에서 있었던 논쟁 또한 같은 맥락에서 해결할 수 있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생각의 차이는 하나님을 더욱 알아가는 과정에서 발생한 문제이고 더 잘 섬기고 더 잘 전하기 위한 노력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중심에 동일한 고백이 있고, 소원이 있을 때... 우리에게서 발견되는 모든 차이는 극복가능한 것이어야 합니다.
3. 네 가지 질문 그런데 그것이 쉽지가 않은 모양입니다. 그런 문제가 내게 발생하지 않을 때에는 누구나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그 문제 속에 있을 때... 우리는 쉽게 그 문제를 극복하지 못하고 우리의 차이 때문에 서로를 정죄하는 일이 많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 어리석음과 연약함을 극복할 수 있을까요? 사도 바울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다음의 4가지 질문을 교회에 던집니다.
1) 너는 누구인가? (롬 14:4)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그가 서 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있으매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롬 14:4) 바울은 종에 대한 판단과 모든 권한은 오직 주인에게 있으므로 아무도 주인의 허락없이 종을 판단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연약한 종이 오히려 주인의 사랑을 받을 수 있고, 몸이 불편한 종도 주인을 위해 신명을 바칠 때 주인에게 귀하게 여김을 받을 수 있습니다. 다른 성도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비난하는 성도에게 우리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그래, 나의 아들은 부족해... 모자라... 그래서 그 아들은 나의 사랑이 더 많이 필요하단다. 나는 더 많은 은혜와 사랑을 내 아들을 위해 준비하고 있단다. 그런데 내 사랑하는 아들의 연약함을 비난하는 너는 누구냐?” 2) 누구를 위한 것인가? (14:6-8) 두 번째 질문은 과연 그 모든 논쟁이 무엇을 위하고 누구를 위한 것인지에 관한 것입니다. 가끔 우리는 목적과 수단을 혼동할 때가 있습니다. 아까 읽었던 6-8절을 다시 봅시다.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14:6-8) 우리가 다음 주일에는 직분자를 세우기 위해 공동의회를 합니다. 직분자를 세우기 전에 우리 자신에게 먼저 던져야 할 질문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를 위해 직분자를 세우는가? 우리는 왜 교회로 모이는가? 우리는 왜 헌신하고 수고하는가? 우리는 누구를 위해 예배하는가?” “우리가 왜 절기를 지키는가?” “우리가 왜 음식을 구별하는가?” 우리는 때로 본질을 잃고 나의 의를 증명하기 위해, 내가 옳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끝까지 다툼을 선택합니다. 바울이 8절에서 무엇이라 고백했습니까?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3) 왜 판단하는가? (14:10) 바울은 10절에서 세 번째 질문을 던집니다. “왜 네 형제를 판단하는가?” 여기서 말하는 판단이란 잘잘못에 대한 생각, 견해를 말하는 소극적인 의미는 아닙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을 내가 가진 생각으로 평가하고 정죄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게 할 수 없는 이유를 바울은 바로 밝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 모두를 평가하고 판단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서로를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내가 대신하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롬 14:10 하) 이 믿음이 있다면 지금 우리의 모든 차이를 좀 견디면 좋겠습니다. 때로 차이는 하나님의 풍성한 성품과 은혜를 드러내는 통로가 될 것이요, 그 차이가 의와 불의의 차이라면 결국 하나님이 판단하시지 않겠습니까?
4) 살게 할 것인가? 죽게 할 것인가? (14:15-16) 마지막으로 생각할 것은 때로 내가 가진 선한 의도가 지혜롭지 못한 방법으로 전달되어 선한 의도는 사라지고 어리석은 전달만 남을 때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럴 때 대부분 한쪽은 자신의 의도의 ‘선함’만을 주장하고 다른 한쪽은 전달의 ‘어리석음’만을 주장합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상처와 분열만 남습니다. 욥이 고난을 당했을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의 네 친구는 위로하기 위해 찾아왔고 진정으로 함께 슬퍼하며 위로합니다. 문제는 슬픔과 위로가 끝난 다음 그의 고난이 어디서 왔는지를 의논할 때였습니다. 그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욥을 판단하고 정죄합니다. 싸움이 되고 맙니다. 결국 하나님이 개입하시고 그들 모두를 책망하십니다. 그들에게 물어봅시다. 아마도 그들은 그들이 가진 선한 의도를 주장할 것입니다. 욥을 위로하고 어떻게 하면 회복할 수 있을지를 말해준 것에 불과합니다. 욥의 이야기는 무엇입니까? 그들의 그러한 평가와 판단이 상처가 되고 고통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15-16절을 봅시다. “만일 음식으로 말미암아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음식으로 망하게 하지 말라 그러므로 너희의 선한 것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라”(롬 14:15-16)
4. 교회 -‘프로셀라베토’ 하나님은 바울을 통해서 음식과 절기에 대한 논쟁을 정리하십니다. 권면의 핵심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에 대한 목적은 분명합니다. “이제 인내와 안위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롬 15:5-6) 여기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뽑아 보십시오.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서 같은 뜻과 마음과 입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를 본받는 교회와 성도, 같은 뜻과 마음과 입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교회와 성도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7절에서 어떻게 하면 그렇게 될 수 있는지 안내하십니다. “이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롬 15:7) 하나님은 우리가 음식이나 절기나 그 외에 어떤 이유로 서로 분쟁하고 다투어서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교회와 성도가 아니라 그 모든 차이를 사랑과 용납함으로 넘어서는 교회와 성도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때 영광 받으십니다. 그때 기뻐하십니다. 그때 은혜와 평강이 넘칩니다. 그리스도께서 연악하고 허물 많은 우리를 이 모습 이대로 받으심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셨던 것처럼 우리도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받으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서로 받으라!’는 말씀이 원문에서 ‘프로셀라베토’라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원래의 뜻은 “다른 사람의 약점을 위해서 서로 일하다”입니다. 서로 비난하고 정죄하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 용납하고 인정하는 관계가 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연약함에 대해 오히려 더 섬기고 헌신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교회는 ‘프로셀라베토’가 서로를 대하는 기본이 되고 상식이 될 때 하나님께서 그 관계를 통해 영광받으시고, 그 관계를 통해 역사하십니다. 오늘은 우리 다 함께 본문의 말씀을 다시 한번 읽고 말씀을 마칠까 합니다. “이제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한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롬 15: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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