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시작 | na kim | 2016-06-27 | |||
|
|||||
[성경본문] 누가복음7:36-50절 개역한글36. 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시기를 청하니 이에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을 때에 37.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으셨음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38.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39.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이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더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 4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하시니 저가 가로되 선생님 말씀하소서 41. 가라사대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42.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저를 더 사랑하겠느냐 43.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제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가라사대 네 판단이 옳다 하시고 44.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오매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었으며 45.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46.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47.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48. 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 사함을 얻었느니라 하시니 49. 함께 앉은 자들이 속으로 말하되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 하더라 50.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 2016. 6. 26.
* 본 문 : 누가복음 7장 36-50절 말씀 * 제 목 : 새로운 시작
켄터기 주 루이빌에 있는 Southeast Christian church에서 목회하고 있는 Kyle Idleman 목사는 그의 책 ‘The End of Me'의 서문을 쓰던 중에 전화를 받게 됩니다. 자신을 브라이언이라고 소개한 한 남성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18개월 된 아들이 몇 주 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Idleman 목사 역시 아들을 자녀를 둔 아버지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긴 침묵이 흘렀습니다. 브라이언이 다시 말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 제가 후진하다가 아들을 쳤어요.” 아들이 아빠를 따라 문을 열고 집 밖으로 나온 줄을 몰랐다고 했습니다. 다시 한참 침묵이 흐른 후, Idleman목사는 브라이언이 오늘 전화를 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조심스럽게 왜 전화를 하게 되었는지를 물었습니다. 브라이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그 날 이후 예수님을 비로소 발견하게 되었어요..... 목사님, 이상하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모든 것을 잃은 것 같은 이 순간, 난생 처음으로 예수님의 실체를 만났어요.”
브라이언은 아주 가끔 교회 출석하는 성도였습니다. 전화를 끊고 난 다음 Idleman목사는 깊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그리고 페이스북에 들어가서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습니다. 아래 문장을 완성해보세요.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때 나는 예수님의 실재를 만났다.” 짧은 시간에 수백 개의 답글이 올라왔습니다. 아내가 가정을 떠났을 때, 암을 발견했을 때, 직장에서 쫓겨났을 때, 남편이 자동차 사고로 세상을 떠났을 때, 초음파 검사로 태아의 심장박동이 멈춘 것을 확인했을 때, 아버지의 총을 손에 쥐고 방아쇠를 당기기 직전에.... 사람들은 각각의 기가 막힌 사연들을 통해서 예수님을 만났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Idleman 목사는 그 모든 대답을 요약하는 한 답글을 발견합니다.
“나의 끝이 이르렀을 때 비로소 예수가 나의 실재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성공하기를 원합니다.. 어려운 삶이 싫습니다. 높아지기를 원합니다. 낮은 곳에서 다른 사람을 올려보는 것은 참으로 괴로운 일입니다. 그런데 많은 신실한 성도들이 고백하는 것은 그들이 예수님의 실재를 만난 때는 ‘낮고 / 비우고 / 고통스럽고 / 핍박 당하고 / 잃어버리고 / 눈물흘릴 수 밖에 없을 때’입니다. 주님은 그때 그들에게 찾아오셨고, 말씀하셨고, 함께 하셨고, 인도하셨습니다. 그 끝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새 삶이 시작됩니다. 여러분은 삶의 끝을 만나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리스도와 함께 새로운 삶의 시작을 결단해보신 일이 있습니까? 누가복음 9장에서 예수님은 자기 부인과 십자가, 그리고 새생명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눅 9:23-24) 우리의 끝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는 주님과 함께 새 삶을 시작했습니까? 준비되어 있습니까?
1.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눅 6:20)
복음서에서 소개되는 예수님의 설교의 절정은 산상수훈이라고 일컬어지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산상수훈 가운데서 핵심은 바로 소위 8복이라고 불리는 마태복음 5장 3-10절의 말씀입니다. 제일 처음에 소개되는 복이 무엇인지 기억나십니까? 예,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다른 복음서에서는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성경이 사용하는 ‘가난하다’는 표현이 오늘날 ‘파산하다’라는 말로 번역되는 말과 같다는 것입니다. 앞서 속한 카일 아일드만 목사는 이 부분을 번역하기를 “심령이 파산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했습니다. 마음에 팍 와 닿습니다. 삶이 파산하고 심령이 파산한 사람... 파산해서 자신의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사람, 영적으로도, 정서적으로도 파산해서 더 이상 자신을 주장할 수 없는 사람 ... 왜 그런 사람이 복이 있는 사람일까요? 예수님은 왜 천국이 그런 사람들의 것이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만나는 두 사람을 통해서 이 말씀에 접근해 봅시다.
2. 시몬의 집에서
유대인들은 손님을 맞이할 때 일정한 예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특히 예수님이 지금 초청받은 만찬같은 경우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먼저 주인은 손님의 손에 입을 맞춥니다. 손님과 같은 편이며 존중한다는 표시입니다. 먼지가 많은 지역이기 때문에 발을 씻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주인은 손님의 발을 직접 씻어주든지, 종들을 시켜서 씻기든지, 주인이 아주 높은 사람일 경우 손님들에게 스스로 발을 씻을 수 있는 물과 대야를 준비해주어야 합니다. 특별한 손님에게는 하나 더 준비하는 것이 있습니다. 좋은 향유를 사용해서 그 머리에 부어주거나 발라주는 것입니다. 정말 사랑하고 존경한다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을 초대한 바리새인 시몬은 누가복음 7장 44-46절에 의하면 이중에 무엇을 했습니까? 예, 아무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발을 씻을 물조차 주지 않았습니다. 몰랐을까요? 아닙니다. 그는 바리새인입니다. 유대의 율법에 정통한 사람입니다. 의도적으로 예수님을 모욕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한 여인이 그 집에 들어왔습니다. 이 여인은 좀 문제가 있습니다. 37절을 봅시다. “그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아 계심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눅 7:37)라고 했습니다.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인’이라는 말은 실은 당시에 공공연했던 매춘을 에둘러서 표현한 말입니다. 그런 여인이 종교지도자의 집으로 들어왔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아 계심을 알고 왔다고 했습니다. 그것도 향유를 들고 왔습니다. 당시에는 은밀하게 그러나 공공연하게 매춘이 행해지고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몸을 파는 여인들은 향유병을 가지고 다녔습니다. 거래가 이뤄지고 몸을 팔게 되면 여인들은 향유를 한 방울 자신의 몸에 뿌립니다. 청결하지 못한 시절이었기 때문에 향유로 남성을 유혹하는 것입니다. 시몬의 집, 남자들이 모여 있는 그 집에 한 여인이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그녀의 손에 향유를 담은 옥합이 들려있습니다. 이런 상상은 좀 위험합니다만.... 혹시 그 자리에 앉아 있던 많은 남성들 중에서 가슴이 덜컹했던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거리에서 몸을 파는 것으로 알려진 여성이 향유를 들고 자신을 아는 척을 한다는 것은 바리새인으로서는 치명적인 불명예입니다. 아무도 그 여인을 막지 못했습니다. 이 집과 사람들에게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 한 사람, 그 여인에게 모든 시선이 집중됩니다.
3. 향유를 붓다.
여인이 예수님의 뒤로 가서 섰다고 했습니다. 웁니다. 그녀의 눈물이 예수님의 발을 적십니다. 씻지 못해서 먼지가 가득한 발입니다. 얼마나 많이 울며 눈물을 흘렸던지 예수님의 발이 씻겨 질 정도였습니다. 머리를 풀어서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깁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머리털은 그 사람의 존엄을 상징합니다. 남성이 수치를 당할 때 머리를 밀었고, 여성은 사랑하는 남자 앞에서만 머리를 풀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 여인은 머리를 풀고 그 머리털로 발을 씻깁니다. 발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리고 향유가 들어있는 옥합을 열었습니다. 그 향유는 그 여성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입니다. 그런데 여인은 모든 향유를 예수님께 부었습니다. 더 이상 그 향유로 남성을 유혹하고 생계의 수단으로 자신의 몸을 사용하지 않겠다는 표시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건이 있기 얼마 전, 누가복음 6장20절에서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눅 6:2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 5:3의 말씀과 같은 말씀입니다. 파산한 사람, 그 삶과 마음과 존재가 무너진 사람이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오늘의 본문에서 바리새인 시몬과 죄 많은 여인 중에 누가 그 심령과 삶이 파산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당연히 여인입니다. 그녀는 무너지고 깨진 모습으로 예수님께 왔습니다. 오직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 아니 예수님 앞에 눈물 흘리기 위해서 감히 들어올 수 없는 집으로 들어왔습니다. 그 집으로 들어오다가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오직 예수님만 보고 들어왔습니다. 어떤 말도 하지 않습니다. 눈물 흘립니다. 할 수 있는 일과 말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저 자신의 죄를 마음으로, 눈물로 고백합니다. 그리고 새 삶을 결단합니다. 향유를 버리기로, 더 이상 과거의 삶을 살지 않기로 결단합니다. 눈물과 머리털로 씻긴 예수님의 발에 그 향유를 부었습니다. 그 집에 있는 사람들이 웅성이기 시작합니다. 여인이 자신들을 향해 온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비난합니다. 더러운 죄를 지은 여인의 접근을 허용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초대한 시몬에게 말씀을 시작하십니다. “이르시되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눅 7:41-42) 시몬은 당연히 크게 빚진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다시 말씀하십니다. “그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올 때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닦았으며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눅 7:44-47) 예수님이 여인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죄 사함을 얻었느니라!”(눅 7:48)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셨으니 평안히 가라”(눅 7:50)
4.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성경에서 이야기를 만날 때 우리는 늘 고민합니다. 내가 이 이야기 속에 들어간다면 나는 누구일까? 여러분은 누가복음 7장의 시몬의 집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좀 애매하시지요? 그런데 이 질문보다 더 중요한 질문이 있습니다. 이 속에서 내가 누구인가보다 더 본질적이고 중요한 질문은 내가 누구이기를 원하는가?에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시몬의 집에서 여러분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만일 주님께서 우리에게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다면 여러분은 시몬이 되고 싶으십니까? 여인이 되고 싶으십니까? 유대 민중들이 식민지의 삶을 살고 있을 때 나는 종교적인 권위와 사회적인 기득권을 누릴 수 있는 능력 있고 위엄 있는 삶이 매력적이지 않습니까? 우리 중에 누가 거리에서 몸을 파는 여인의 무너지고 깨진 삶을 원하겠습니까? 하지만 초점은 그들이 어떻게 살아왔는가? 어떻게 살고 있는가? 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 앞에 그들이 어떤 모습으로 서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은 세상의 모든 것을 가진 사람으로 서 있습니다. 감사도 없고 기쁨도 없습니다. 그는 예수님으로부터 필요한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아니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 그의 삶에 다가오신 것이 부담스럽고 불만스럽습니다. 관심이 있어서 초대는 했지만 환대하지 않습니다. 그는 지금 예수를 집에 모시고 자신의 삶에 예수가 얼마나 필요없는지를 증명하고 싶습니다. 한 사람은 파산한 심령, 무너진 삶으로 주님의 뒤에 섭니다. 눈물로 섭니다. 감히 얼굴과 얼굴로 보지 못하고 뒤에 서서 눈물로 발을 적시고 엎드려 머리털로 발을 씻습니다. 더럽고 수치스러운 생계의 수단... 오랫동안 자신을 상징해왔던 향유의 옥합을 깨드립니다. 주님의 발에 붓습니다. 다시는 이렇게 살지 않겠습니다. 이제 주님의 뒤를 따르겠습니다. 다만 나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여인은 마음으로 울며 삶으로 고백합니다. 그녀는 무너진 자신의 삶의 끝에서 생명의 주님을 만났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어떤 삶을 살고 싶어 할까요? 오늘 성경은 마태복음 5장 3절을 가장 정확하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그 마음과 삶이 파산한 사람에게 복음이 선포됩니다. 삶의 끝에서 주님을 만날 수 있는 사람, 그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다가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무너진 마음으로 오직 주님만을 소망하는 사람에게 허락되는 은혜요 복입니다. 우리가 그 복을 소유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