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예배

  • 홈 >
  • 예배와 말씀 >
  • 주일 예배
주일 예배
"슬픔이 기쁨에게" na kim 2016-07-04
  • 추천 0
  • 댓글 0
  • 조회 1249

http://chodaepa.onmam.com/bbs/bbsView/82/5137841

[성경본문] 야고보서4:8-10절 개역한글

8.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

9.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

10.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2016. 7. 3.

 

* 본 문 : 야고보서 48-10절 말씀

* 제 목 : 슬픔이 기쁨에게

 

한국 MBC의 한 음악방송에서 지친 당신에게 가장 큰 위로가 되는 노래라는 제목으로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여러분에게 그 질문이 온다면 어떤 노래를 선택하시겠습니까? 20대에서 40대까지 고르게 1등을 한 노래가 있습니다. 그 노래를 먼저 들려드리겠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Mx_5SAaRPc0

 

이 노래는 원래 인순이의 노래가 아닙니다. 카니발이라는 2인조 그룹의 이적이 노랫말을 쓰고 김동률이 곡을 썼습니다. 물론 노래가 좋아서 그들이 부를 때도 인기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한 케이블 드라마에서 이 노래를 OST로 쓰면서 인순이에게 노래를 부탁했습니다. 드라마도 인기를 끌지 못했지만 인순이가 부른 이 노래가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노래가 원래부터 인순이의 곡인줄로 알 정도입니다.

 

물론 인순이가 노래를 워낙 열심히 잘 하는 가수이기는 합니다. 하지만 인순이가 부른 이 노래가 원작자보다 드라마보다 사람들의 마음을 깊이 움직인 이유가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이 노래에는 인순이의 삶이 보이고 눈물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인순이는 한 프로그램에서 자신이 너무 빨리 철이 들 수밖에 없었다는 말을 했습니다. 아버지가 있는 미국, 자신과 어머니를 책임지지 않고 떠난 아버지의 나라로 가지 않기로 어려서부터 결심했다고 했습니다. 쉬운 결심이었을까요? 이곳 한국에서 혼혈, 그것도 흑인 혼혈인이 겪는 어려움보다 자신을 버리고 간 아버지의 나라에서 받을 서러움이 더 크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어려운 성장의 과정을 경험했을 그녀를 보면서 거위의 꿈을 들으면, 그 자체가 감동일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전에도 한번 소개한 시가 있습니다. 오늘의 설교 제목을 그 시에서 가져왔습니다. 정호승 시인의 슬픔이 기쁨에게라는 시입니다.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로 시작하는 이시는 무관심한 너의 사랑을 위해 / 흘릴 줄 모르는 너의 눈물을 위해 / 나는 이제 너에게도 기다림을 주겠다. / 이 세상에 내리던 함박눈을 멈추겠다. / 보리밭에 내리던 봄눈들을 데리고 / 추워 떠는 사람들의 슬픔에게 다녀와서 /

눈 그친 눈길을 너와 함께 걷겠다. / 슬픔의 힘에 대한 이야길 하며 / 기다림의 슬픔까지 걸어가겠다.”로 끝이 납니다.

 

이 시를 처음 접할 때는 감각적인 감성이 돋보인다고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점점 알겠습니다. 시인의 말이 맞습니다. 슬픔에는 힘이 있습니다. 슬픔에는 지혜가 있습니다. 슬픔에는 자기 발견이 있고 고백이 있습니다. 슬픔에는 쉼이 있고, 비로소 이웃을 향한 시선과 이해가 있고, 이웃을 포용하고 섬길 수 있는 가슴이 있습니다. 슬퍼하는 사람이 변화될 수 있습니다. 슬퍼하는 사람이 변화시킬 수도 있습니다. 주님은 이 땅에 사는 우리들에게 천국의 복을 가르치시면서 슬퍼할 줄 아는 사람이 복 있다 말씀하셨습니다.

 

1. “__________________는 복이 있나니....”

 

그런데 실은 저는 인순이의 저 노래를 들으면서 고개를 갸웃 했습니다. 아니 노래보다는 노래를 부르기 전에 인순이의 코멘트를 들으면서 잘 동의가 되지 않았습니다. 꿈을 꾸면, 노력하면 정말 꿈이 이뤄질까요? 어쩌면 저 말은 정말 위험한 말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정말 꿈을 이룬 사람은 소수에 불과합니다. 세상은 평범한 사람들의 꿈을 지지하지 않습니다. 소수의 특별한 승리자와 대다수의 일반적인 패배자를 양산할 뿐입니다. 한국의 역사를 아시지 않습니까? 인순이와 같은 환경에서 태어나 차별과 수모를 겪으면서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많은 여성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인순이가 그런 환경 속에서 좋은 가수로 성장한 것은 박수 받아서 마땅한 일이지만, 열심히 꿈꾸고 노력하면 누구나 인순이처럼 될 수 있다....라고 말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사실이 아니거니와... 그렇게 극복하지 못하고 힘든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한 국가의 역사가 책임져야 할 국민에 대한 의무를 떠넘기는 것에 불과합니다. 당신이 이렇게 살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열심히 꿈꾸지 않아서 그런 것이고, 꿈을 이루기 위해 성실하게 노력하지 않아서 그런 것이다.... 라는 메시지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정리하면, 이 노래는 어렵고 힘든 환경 속에서 자신의 꿈을 찾고 이루겠다는 강한 의지를 표현하고 격려하는 노래일 수 있지만, 다른 한편 세상으로부터 꿈을 지지받지 못하고 세월이 갈수록 꿈을 빼앗기고 결국 꿈은 꾸기만 할 뿐, 이룰 수는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절망에 대해 전혀 공감하지 못하는 노래일 수도 있습니다.

 

지난 주일 우리는 심령이 가난한 사람에게 허락된 복에 대해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오늘은 팔복 가운데 두 번째 애통하는 사람에게 허락된 복에 대해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여러분은 슬퍼하고 눈물짓는 사람이 복이 있다는 말씀에 동의가 되십니까? 여러분은 이 복을 받기를 원하십니까? 이 복을 받기 위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슬픔의 세계로 초대할 때 기쁨으로 참여할 수 있습니까?

 

2. 무엇에 대해 애통할 것인가?

 

저는 우리가 마태복음 5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라는 말씀을 읽을 때 조금 다른 방식의 접근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애통하는입니다. 슬퍼하고 아파하는...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말씀을 슬픔을 당하고 고난을 당하는...’ 적 수동적인 의미에서의 애통함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슬픔을 선택하고 고통을 선택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로 보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실까요? 오늘이 7월 첫주일이니까... 벌써 2016년도 반이 지나갔습니다. 지난 반년, 여러분은 무엇에 대해 슬퍼하기로, 아파하기로 결정하셨습니까?

 

목사님, 저는 올해 별로 어려움이 없어요... 하나님이 은혜 가운데 한 해를 축복해주셔서 별로...슬퍼할 일이 없네요... 이 복은 제게 적용되는 복이 아닌가 봐요...” 혹시 여러분 중에 이런 분이 있으십니까? 감사한 일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바로 마 5:4를 수동적인 의미에서만 생각한 결과입니다. 우리는 애통, 슬픔을 내가 환경에 의해서 당하는 것으로만 생각했습니다. 애통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과연 그렇습니까?

 

어거스틴은 고백록에서 내 죄가 구제불능이었던 것은 나를 죄인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우리 삶에 슬픔과 애통의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스스로를 하나님의 시선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곳곳에서 하나님의 안타까운 시선과 사람의 자기만족적인 시선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내는 주님의 메시지를 보십시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3:16-17) 그들은 자신들의 영적인 현실을 깨닫지 못합니다. 슬퍼할 이유가 없습니다. 애통은 그들의 일이 아닙니다.

 

성도라면, 교회라면 우리의 죄성에 대해, 악한 본성에 대해 슬퍼하고 애통해야 합니다. 죄에 대해 내가 얼마나 연약한지, 악한 본성에 대해 내가 얼마나 강력한 원칙을 가지고 있는지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가난한 심령으로 엎드려야 합니다. 지난 주에 우리가 함께 만났던 한 죄많은 여인처럼 말입니다.

 

오늘날 심리학이 교회에 들어오고 난 다음 사람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고 높아졌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특히 죄에 대해서 그렇습니다. 성경이 기록될 당시 헬라어 성경은 죄에 대한 33가지 정도의 표현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인간의 죄성이 삶으로 나타날 때 아주 섬세한 차이를 구별하고 정확한 개념으로 표현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교회에서 라는 단어가 점점 사라집니다. 죄를 대신하는, 사람을 이해하는 듯 한 용어들을 적극적으로 사용하려는 경향이 많습니다. ‘연약함’ ‘상처’ ‘실수’ ‘선천적’ ‘안타까운 선택’ ‘마음의 병’ ‘어쩔 수 없는’ ‘중독 등의 용어입니다. 이런 용어들로 죄 가운데 있는 사람이 자기 안에 있는 죄성을 드러내는 일을 변호합니다. 그런 사람들을 환경의 희생자로 만들고 자신의 죄성에 대한 깊은 자각과 애통할 수 있는 기회를 빼앗습니다. 애통하지 않으면 변화되지 않습니다. 애통함과 변화가 없는 것 - 누가 이 일을 가장 좋아할까요?

3. 함께 고통을 슬퍼하다.

 

또 하나 성도와 교회의 애통함의 의무는 이웃과 세상에 대한 것입니다. 잘 생각해보십시오. 사람의 죄가 깊어지면 그 사람뿐만 아니라 관계에도 죄성에 드러납니다. 우리의 죄성은 능동적으로는 다른 사람을 해치는데서 드러나지만 수동적으로는 무관심과 무정함으로 나타납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죄가 들어오고 난 다음 그들은 서로에게 악한 일을 합니다. 그리고 서로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려 합니다. 적극적으로는 서로에게 죄를 행한 것이고 소극적으로는 서로의 죄의 결과를 책임지지 않으려 한 것입니다. 가인에게서는 어떻게 드러납니까? 적극적으로는 동생을 해치고, 소극적으로는 내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라는 말로 두 사람의 관계를 부정합니다.

 

1) ‘고통을 슬퍼하는 것이 애통입니다. 여러분! 내가 당하는 고통을 슬퍼하는 일이 뭐 그리 복된 일일까요? 내가 사회적인, 혹은 개인적인, 혹은 질병이나 관계에서 고통을 당할 때 그 고통 자체가 복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복은 내가 그런 고통 속에 있어도 하나님은 나의 주인이 되시며 아버지가 되시며 나를 구원하신다는데 있습니다. , 세상이 주는 고통 속에서 부숴지고 무너진 나를 하나님은 여전히 변함없이 사랑하신다는 사실, 내가 돌아갈 품이 있고 피할 요새가 있다는 것이 복입니다. 하나님이 위로하십니다.

 

2) 그런데 그보다 큰 복이 있습니다. 내 삶에 감각할 수 있는 고통이 없는 것 같은데... 내가 내 안에 있는 죄의 뿌리와 악의 그림자를 깨닫고 하나님 앞에서 가슴을 치며 엎드릴 수 있는 사람은 복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위로하시고 긍휼히 여기실 것입니다. 우리의 죄성을 여러 가지 말과 논리로 변명하려 하지 말고 애통하면서 하나님께 엎드려야 합니다. 복으로 가는 길입니다.

 

3) 나아가서 더 큰 복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관계 속에서 발생한 고통에 대해 함께 슬퍼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가장 좋은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우리의 죄와 악을 보시고, 심지어 우리가 그 죄와 악 속에 살면서도 깨닫지 못하고 즐기며 만족하며 사는 것을 보시고 더 아파하시고 더 슬퍼하셨습니다. 그 애통한 마음으로 이 땅에 내려오셔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전에 제가 한번 말씀드렸습니다. 제가 미국에 와서 수많은 장례식에 참여했지만 가장 슬펐던 적이 있습니다. 결혼한 지 2-3년 밖에 되지 않은, 이제 갓 돌 지난 아들과 20대 중반의 아내를 둔 가장이 과로로 쓰러져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모두 너무 가슴 아파하고 슬퍼했습니다. 저 역시 그랬습니다. 저 젊은 엄마와 아들을 두고... 생각만 해도 슬펐습니다. 그런데 슬픔의 절정이 있었습니다. 한국에서 그 아빠의 쌍둥이 형제가 장례식에 참석한 것입니다. 돌 지난 아들이 삼촌과 아빠를 구별하지 못하고 오랜만에 만난 아빠 품에 안겨서 재롱을 부리고 즐거워하는 모습... 그 모습 앞에 다들 통곡을 했습니다.

 

인류가 자신에게 다가온 죄의 결과와 그 고통에 대해 깨닫지 못하고 죄악 속에 허우적거리며 살아갈 때 우리 주님께서 그 모습을 보셨습니다. 애통하셨습니다. 그 마음으로 우리에게 내려오셔서 우리와 같이 되셔서 우리의 모든 죄를 지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다른 사람의 삶의 고통과 아픔에 대해 함께 애통하는 자가 왜 복이 있는지 아시겠습니까? 그것이 우리 주님과 함께 십자가를 지고 뒤를 따르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4. 온전한 위로를 얻는 길

 

성도 여러분! 따라서 애통의 본질은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우리의 내면과 삶과 세상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당하는 고통으로 슬퍼할 때도 우리는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우리를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놀라운 은혜와 위로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뿌리 깊은 죄와 악의 그림자에 대해서도 우리를 구원하시는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조명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를 향한 주님의 애통하심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아가서 이웃과 세상을 향한 주님의 마음, 주님의 눈물, 주님의 피 묻은 십자가를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의 고통과 눈물에 함께 눈물 흘리는 교회와 성도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 /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4:8-10)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야고보 사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고 권면하시고,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성도는 하나님의 눈으로 자신과 이웃과 세상을 보게 되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자신과 세상에 대해 애통하게 됩니다. 비로소 우리가 겸손할 수 있습니다. 낮은 곳에 우리의 마음과 삶을 두고 하나님의 위로와 긍휼을 사모하게 됩니다. 이런 성도에게 마태목음 5:4의 말씀은 참된 복음입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5:4)

 

애통하는 성도, 애통할 줄 아는 교회....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고통과 눈물의 현실을 만날 때마다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사모하며 느끼며 고백하며 이 고통의 세월을 주님과 동행함으로 지나가는 성도는 복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위로가 이미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자만하고 자족하지 않고 자신에게 충만한 죄성과 악한 본성을 놓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눈물 흘릴 줄 아는 성도는 복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로하실 것입니다. 이웃의 아픔과 세상의 고통에 함께 눈물 흘릴 줄 아는 성도와 교회는 복이 있습니다. 그들을 통해 하나님은 세상을 위로하고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을 세상에 부어주실 것입니다.

 

애통하는 성도, 애통할 줄 아는 교회의 복이 초대교회와 성도들의 삶에 늘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추천

댓글 0

자유게시판
번호 제목 작성자 등록일 추천 조회
이전글 "transparency" (투명성) na kim 2016.07.12 0 892
다음글 새로운 시작 na kim 2016.06.27 0 12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