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nsparency" (투명성) | na kim | 2016-07-1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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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시편24:3-4절 개역한글3.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며 그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군고 4.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데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치 아니하는 자로다
2016. 7. 10. * 본 문 : 시편 24편 3-4절 말씀 * 제 목 : Transparency(투명성) 투명한 사람이 참 좋다 목적을 두지 않는 편안한 만남이 좋다 속에 무슨 생각을 할까 / 짐작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 말을 잘 하지 않아도 / 선한 눈웃음이 정이 가는 사람 문득 생각나 차 한 잔 하자고 전화하면 / 밥 먹을 시간까지 스스럼없이 내어주는 사람 장미처럼 화려하진 않아도 / 풀꽃처럼 들꽃처럼 성품이 온유한 사람 머리를 써서 상대를 차갑고 냉철하게 하는 사람보다 / 가슴을 써서 만나고 나면 가슴이 따뜻해지는 사람 마음이 힘든 날엔 떠올리기만 해도 / 그냥 마음이 편안하고 위로가 되는 사람 흐린 날에 고개 들어 하늘을 보면 / 왠지 햇살 같은 미소 한번 띄워줄 거 같은 사람 사는 게 바빠 자주 연락하지 못해도 서운해 하지 않고 / 오히려 뒤에서 말없이 기도해주는 사람 욕심 없이 사심 없이 순수한 마음으로 / 상대가 잘되기를 바라는 사람 진심으로 충고해주면 진심으로 고마워하고 / 자신을 돌아볼 줄 아는 사람 어딘가 꼬여서 항상 부정적인 사람보다 / 매사에 감사하고 긍정적인 사람 열 마디의 말보다 한마디의 침묵에도 / 내속을 알아주는 사람 양은냄비처럼 빨리 끓지 않아도 / 뚝배기처럼 느리고 더디게 끓어도 / 한번 끓은 마음은 쉽사리 변치 않는 사람 스스로 교만하지 않고 남이 나를 인정할 때까지 / 그때를 묵묵히 기다릴 줄 아는 겸손한 사람 사람을 물질로 판단하지 아니하고 / 사람의 마음에 더 중심을 두는 사람 진솔함이 자연스레 묻어 / 내면의 향기가 저절로 배어나오는 사람 진정한 가치가 무엇인지 알고서 / 그에 흔들림 없이 자신을 지키는 사람 세상풍파 사람풍파에도 쉬이 요동하지 않고 늘 변함없고 한결 같은 사람 / 그래서 처음보다 알수록 더 편한 사람 / 그런 사람이 나는 참 좋다.
시가 마음에 드십니까? 여러분도 이런 사람이 좋으십니까? 한 때 시골에 사는 부모님이 자녀들에게 보내는 메시지가 인기를 얻었던 적이 있습니다. 부모님들의 자녀와 손주들에 그리움과 사랑이 잘 나타나고, 삶의 애환이 잘 드러났었습니다. 그 중에서 코메디의 소재로 사용되기도 했던 내용은 부모님들이 본 마음과 다른 말을 할 때였습니다. “애들아, 옆집에 달식이 엄마는 오리털 잠바 샀더라... 나는 그런 거 필요엄따... 그런데 요새 와이래 춥노... 그거 입으면 참 따시겠드마는....” “아들아, 뒷집에 삼식이 엄마하고 아부지는 하와이 여행갔다왔다 카더라. ABCD도 모르믄서 미국 가믄 뭐하노.. 나는 그런거 실타... 야들아, 그런데 나는 hello하고 good morning도 할 줄 안다.” 뭐 이런 순박한 이야기들이 시청자들을 웃음을 짓게 만들었습니다. 그 어르신들에게 왜 거짓말을 하느냐고 다그치는 사람은 없습니다. 말을 하는 중에 그 마음이 다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자녀들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 자주 만나지 못하고 만지지 못하는 아쉬움이 그런 말들에 잘 나타납니다. 이렇게 말을 하고 마음이 함께 드러나면 좋겠습니다. 위에 옮겨 놓은 시처럼 투명한 사람, 투명한 인격이 되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다른 사람이 그렇게 되어주기를 바라면서 내가 그렇게 되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아니 그렇게 되면 위험하거나 손해를 본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왜 이런 사람을 만나고 싶다고 말하면서 이런 사람이 되려고 하지는 않는 것일까요? 1. 바리새인의 청결 마태복음 5장의 팔복 중에서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느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 5:8)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마음이 청결하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먼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청결의 개념과 바리새인들의 개념은 다른 것 같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예수님은 서로를 청결하지 못하다고 비판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기도 하고, 세리나 창녀들과 함께 있는 것을 비판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청결은 두 가지 원칙에 근거했습니다. 하나는 율법에 근거한 정결의식을 행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선민의식에 근거한 청결이었습니다. 그들은 오직 자신들만이 하나님 앞에서 깨끗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거짓된 청결에 대해 비판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3장을 천천히 한번 읽어보십시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 대한 비판은 정말 견딜 수 없을만큼 대단합니다. 누군가 나를 이정도로 비판하고 욕하면 정말 살인 욕구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특히 자신들만 의롭고 청결하다고 주장했던 바리새인들이 이런 비판을 받는다는 것을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13절은 “화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로 시작합니다. 15,16,2325,27,29절에서 거듭 ‘화있을진저’라고 선언합니다. 이 말을 쉽게 번역하면 “이 거짓말쟁이들아, 너희들은 천벌을 받을 것이다!” 정도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리고 여러 가지 말씀으로 그들을 책망하십니다. 그 절정은 33절입니다.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마 5:33) 왜냐하면 그들은 거짓된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눈 먼 바리새인이여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마 23:25-28) 여러분! ‘회칠한 무덤’이라는 말의 의미를 아셔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석회암에 굴을 파고 시신을 안치했습니다. 돌문을 닫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석회를 발라서 밀봉합니다. 밖에서 보기에는 깨끗해 보입니다. 그런데 그 안에는 부패한 시신이 있습니다. 누가 그렇다는 말입니까? 깨끗하다 주장했던 바리새인들이 그렇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신앙을 한마디로 말해서 ‘외식’(外飾)이라고 했습니다. 풀어서 설명하면 “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마 23:5)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마 23:28)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입으로는 말하는데 삶에서는 보이지 않고, 신앙으로는 고백하는데 인격으로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런 신앙의 결과는 그들과 함께 하는 이웃의 삶을 통해 나타납니다. 마태복음 5장 13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크게 꾸짖으시는 이유가 나옵니다. “너희는 천국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마 5:13)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신앙의 영역에서 미치는 악한 영향력에 대해 강력하게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의 청결 그렇다면 예수님은, 성경은 성도와 교회의 청결에 대해 무엇이라 말하고 있을까요? 게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1) 그것은 첫째 깨끗하고 순수한 마음과 삶입니다. 빌 4:8에서 하나님은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을 생각하라” 여기서 말하는 ‘이것’은 사도들과 교회로부터 배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교회와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생각하고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삶의 일부는 그렇고 또 다른 삶은 세상적인 원칙을 적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무엇에든지...’라고 말합니다. 2) 또 청결이란 진실함과 관련이 있습니다. 마음과 입술과 삶이 투명해야 합니다. 마 15:8에서 예수님은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하십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며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마 15:8) 이사야의 시대와 같이 예수님의 시대에도 이스라엘은 율법을 앞세우고 하나님의 말씀을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왜 그들이 메시야를 거절합니까? 왜 하나님께서 그들에 대해 탄식하십니까? 그들은 이미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진실함의 반대말은 오늘 말씀의 상황에서 ‘거짓’이 아니라 ‘위선’(僞善)입니다. 위선 - “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마 23:5)
20세기에 가장 존경받는 복음주의자였던 John Stott 목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실제 삶과 남들에게 보이는 삶이 일치하는 사람이 얼마나 적은가... 우리는 상황에 따라 다른 가면을 쓰고 다른 역할을 연기하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하지만 그것은 실제가 아니라 연기이며, 연기는 곧 위선이다. 거짓의 껍데기로 삶을 철저히 포장하는 바람에 어떤 부분이 진짜이고 어떤 부분이 가까인지 본인도 알 수 없는 지경에 빠진 사람이 많다."
3. 예배하는 사람들, 하나님 앞에 서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우리의 외식과 진실함은 어떻게 나타나는 것일까요? 성경은 좋은 대조 우리들에게 보여줍니다. 막 12:38-40절의 말씀을 먼저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가르치실 때에 이르시되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과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원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시니라”(막 12:38-40) 예수님은 지금 서기관들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들은 바리새인들 중에서 지위가 높고 존경받는 사람들로 성전에 머물면서 성경을 필사하거나 이스라엘의 중요한 역사를 기록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종교생활과 사회생활과 경제활동을 간략하게 언급하십니다. 그들의 종교생활은 어떻습니까?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길~게 기도합니다. 사회생활은 어떻습니까? 존경받습니다. 권위적인 옷을 입고 문안 받고 높은 자리에 앉고 특히 잔치의 윗자리를 원합니다. 예수님의 시대에는 일용할 양식이 풍성하지 못했던 시절이었습니다. 그 시대에 매일 먹을 것을 고민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큰 복입니다. 그런데 서기관들은 매일 잔치를 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잔치를 열 수 있을 만큼 부자가 되었을까요? 예수님은 그들의 경제활동을 언급하십니다.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입니다. 그들이 제국 로마로부터 그들의 재산을 불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로마로부터 압제를 당하던 유대 민중들을 다시 한번 수탈합니다. 그들은 그렇게 예배하고 헌금하고 기도했습니다. 다음으로 예수님은 그들에게 가산을 빼앗기며 살고 있는 한 가난한 과부에게 주목하십니다. 막 12:38-40절 이후 41-44절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헌금함을 대하여 앉으사 무리가 어떻게 헌금함에 돈 넣는가를 보실새 여러 부자는 많이 넣는데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헌금함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그들은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막 12:41-44) 예수님은 이미 38-40절의 말씀에서 외식하는 신앙을 가진 서기관에 대해 경고하셨습니다. 그의 삶은 과부의 가산을 삼킵니다. 그는 자랑하고 존경받기를 좋아합니다. 그의 신앙생활은 외식으로 길게 기도합니다. 그들은 가르치는 것을 좋아하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하나님 섬기는 척 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자, 여러분은 그들의 삶과 신앙을 통해서 하나님을 볼 수 있으십니까? 당시 유대인들은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났을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그들 자신이 천국에서 멀어지고 다른 사람들까지 복음에서 멀어지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에 의해 빼앗기면서 살아가는 한 과부가 있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가진 최선의 것으로 헌금하는 한 과부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과부에 주목하십니다. 그녀의 헌금에 대한 진실함을 보고 계십니다. 그 헌금을 통해서 그녀의 마음을 보고 그녀의 삶을 봅니다. 예수님은 그녀에게서 하나님을 봅니다. 우리 교회의 헌금의 방식에 대해서 의견을 주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설립 초기부터 이렇게 하면 헌금이 더 나올 수 있다, 이렇게 해야 성도들이 교육이 된다... 다양한 의견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교회를 섬기는 목회자로서 저는 지금 우리가 드리는 헌금의 방식이 좋습니다. 헌금은 하나님과 우리가 교통하는 중요한 통로입니다. 저는 첫째, 그 통로에 사람을 의식하는 일들이 없으면 좋겠습니다. 둘째 성도 각자가 믿음의 분량에 따라 헌금에 대해 담대하고 정직하면 좋겠습니다. 숫자에 의해 비겁한 마음을 품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성도들이 하나님과 가장 투명하게 교통할 수 있도록 돕고 싶습니다. 물론 초신자들이 있고, 개념이 정리가 되지 않은 분들이 있어서 헌금에 대한 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은 잘 알겠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을 통해서 하나님이 보이고 교회가 보이고 우리의 삶이 투명하게 보이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이며 헌금이기 때문입니다.
4.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인가?(시 24:3-4)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다윗이 엘리 제사장의 시절에 블레셋에게 빼앗겼던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오던 날 불렀던 노래입니다. 이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노래를 부르면서 성전에 올랐습니다. 이 노래의 핵심 내용은 무엇입니까?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시 24:3-4) 3절에서 다윗은 노래합니다. 누가 하나님을 만나며 예배할 수 있는 사람인가? 누가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 설 수 있을까? 그리고 4절에서 답합니다. 어떤 사람일까요? 예수님은 마 5:8에서 답을 주십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 5:8) 이 말씀은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께 예배할 것임이요”라고 바꿔도 됩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까? 어떤 사람이 예배하는 사람입니까? 어떤 사람이 그 마음과 삶을 통해서 세상에 하나님을 보여줄 수 있습니까> 마음이 청결한 사람입니다. 그 마음과 생각과 말과 삶이 투명한 사람입니다. 시 24:5-6절에서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으리니 이는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로다”(시 24:5-6) 다윗의 시편과 예수님의 산상설교가 만나는 현장입니다. 마음과 생각과 말과 삶이 투명한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볼 수 있게 되고, 그 사람을 통해서 세상이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저는 이 땅을 사는 성도들에게 허락된 가장 큰 복, 가장 아름다운 복은 하나님을 만나고 예배하고 하나님을 증거하는 삶에 있다고 믿습니다. 마음과 생각과 말과 삶에 투명한 사람으로 하나님 앞에 서고, 서로를 만나고, 세상 앞에 설 수 있는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하나님을 보는 복과 은혜가 여러분과 저와 교회에 늘 함께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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