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에 주리고 목이 마르니(1) | na kim | 2016-07-2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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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미가6:6-8절 개역한글6.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 일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7. 여호와께서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를 인하여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2016. 7. 21. * 본 문 : 미가서 6장 6-8절 말씀 * 제 목 : 의에 주리고 목이 마르니... (1) ‘정의란 무엇인가?’(JUSTICE: What's the right thing to do?)라는 책이 있습니다. 하버드 대학에서 정치철학을 강의하는 마이클 샌델의 정치 철학서 입니다. 그가 1980년부터 강의했던 ‘정의'(Justice)에 대한 수업 내용을 바탕으로 쓴 책입니다. 우리가 한번 쯤 들어본 적이 있는 공리주의나 자유주의, 그리고 공동체적인 선과 관련해서 정의의 다양한 얼굴에 대해 서술하고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 책은 미국에서는 10만부 남짓 팔렸는데, 한국에서는 2012년 6월까지 130만부 이상 판매되었습니다. 한국 사회의 정의에 대한 목마름이 반영된 것이라고 말을 합니다. 그런데 이 책 이후에 같은 제목을 한 책 한권이 출판되었습니다. 뉴욕 리디머 교회의 팀 켈러 목사가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냈습니다. 책을 보니 앞의 책과 딱히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팀 켈러 목사는 원래의 제목을 ’Generous Justice'로 냈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성품이 묻어나는 정의를 실현할 것인지를 고민했습니다. 각각 원 제목이 조금 다르긴 하지만 같은 주제에 대한 다른 관점에서의 접근이어서 흥미있게 책을 읽었습니다.
팀 켈러 목사는 책의 앞 부분에서 자신이 정의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 배경을 설명합니다. 그는 신학대학원에 다닐 때 앨워드 엘리스라는 흑인과 친구가 되었습니다. 가끔 앨워드는 팀 켈러에게 심각한 얼굴로 말했습니다. “백인인 너에게는 지극히 당연하고 일반적인 것이 흑인인 나에게는 심각한 차별로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공항 검색대에서 따로 한번 더 검색을 받는 사람들, 교통법 위반으로 잡힌 사람들을 대하는 경찰들의 태도의 차이, 인종별 직업군의 차이 등은 백인들은 느끼지 못하지만 흑인들에게는 차별로 느껴질 수 있는 일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실은 이런 차별이 있습니다. 호남과 영남의 오랜 차별의 역사가 그렇습니다. 우리 교회에도 각각 다른 고향을 가진 분들이 있어서 죄송합니다만... 영남 사람들은 느끼지 못하는, 너무 당연한 말이나 표현들이 호남 사람들에게는 심각한 차별로 느껴질 수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팀 켈러 목사는 같은 신앙을 고백하고 같은 신학을 공부하는 흑인 친구를 통해서 백인으로서의 자신을 돌아보는 중요한 계기를 만납니다. 그리고 백인의 문화를 기반으로 윤리적인 원칙을 정하고 그것을 기준 삼아서 다른 인종을 평가하고 판단하는 사례가 얼마나 많은지 비로소 눈을 뜨게 됩니다. 그 일은 그가 이후에 맨하탄에서 목회를 하면서 지역과 인종을 넘어서는 교회를 꿈꾸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그가 책을 통해서 던지는 질문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렇다면 21세기에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백인으로 살고 있는 나에게 하나님의 정의란 과연 무엇인가? 21세기에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흑인으로 살고 있는 성도가 나에게 하나님의 정의를 묻는다면 나는 무엇이라고 대답할 것인가?” 여러분은 어떤 대답을 주시겠습니까? 사실 이 주제는 한 편의 설교에서 다루기에 꽤 무겁고 어렵습니다. 이번 주와 다음 주에 걸쳐서 이 주제로 말씀을 생각할까 합니다. 또 이 주제는 여러분의 삶의 필요와 관심에서 좀 멀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교회와 성도에게 가장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을 살도록 명령하셨고, 그 명령은 오늘 우리들에게도 유의미합니다. 오늘과 다음 주에 각각 성경이 소개하는 한 사람의 고민을 통해서 정의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을 고민하도록 하겠습니다.
1. “내가 무엇을 가지고....”(미 6:6-8)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분열되고 북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 멸망의 길로 가고, 남유다 또한 부패와 타락으로 허물어져갈 때 하나님을 믿는 한 사람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고민했던 한 선지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작은 마을에서 평범하게 살던 사람이었는데,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 임하여 이스라엘과 유다에 대한 예언을 하게 하셨습니다. 그 선지자의 이름은 미가입니다. 그가 기록한 미가서는 총 7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핵심은 4장 2절입니다. “곧 많은 이방 사람들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올라가서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의 도를 가지고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니라 우리가 그의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라”(미 4:2) 그리고 이 일을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길을 예언하는데 바로 5장 2절의 말씀입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미 5:2) 그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메시야를 예언하고 있습니다. 메시야의 탄생과 열방의 회복, 이것이 미가서에서 말하고자 하는 주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6장을 넘어가면, 미가 선지자는 또 하나의 고민을 던집니다. 메시야의 탄생과 열방의 회복은 하나님이 하실 일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혼란한 시대를 살면서 이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와 뜻이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는 나, 성도는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할까...? 그는 미가서 6:6-8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가 찬양으로도 잘 아는 내용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로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 6:6-8) 그가 고민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무엇을 할까요?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가며 어떻게 하나님을 경배할까요? 더 좋은 제물로 제사를 드릴까요? 내 목숨보다 귀한 내 아들을 드려볼까요? 그런데 그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더 많은 제물이나 더 많은 희생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미가 선지자를 통해서 물으십니다.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하나님과의 동행하는 삶’입니다. 2. 주리고 목마른 인생 왜 미가는 이런 고민을 했을까요? 왜 그의 고민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가 되었을까요? 왜 하나님은 그의 기도에 대답하셨고, 그것은 이렇게 성경이 되었을까요? 예수님께서 주신 8복의 말씀 가운데서 네 번째 복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에 대한 복입니다. ‘주리고 목이 마르다’는 말은 어떤 상황을 설명하고 있을까요? 예수님은 이 말씀과 비슷한 표현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라는 표현입니다. 전혀 다른 표현 같지만 당시 이스라엘의 상황을 이해하면 연관성을 찾을 수 있습니다. ‘주리고 목마른 인생’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인생’ - 여러분은 경험하신 적이 있습니까? 예, 한국의 격동기를 경험하신 우리 어르신들은 이 말의 의미를 아실 겁니다. 정말 배고프고 목마른 적이 있었습니다. 아는 사람을 만나면 “만나니 반갑습니다.”라고 인사하기보다 “식사는 하셨습니까?”라고 묻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역사가 경험했던 시절보다 훨씬 오랜 기간 동안 훨씬 혹독하게 경험했던 민족이 있었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이었습니다. 그들의 나라는 수백년 전에 이미 멸망했습니다. 그들을 다스리는 왕은 로마가 세운 다른 민족의 왕이었습니다. 그들의 치안을 담당하는 것은 로마의 병력입니다. 로마와 헤롯과 교회가 2중 3중으로 세금을 포탈합니다. 그들은 정말 ‘주리고 목마른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예수님께서 사역을 시작하실 때 먼저 광야로 가서 기도하셨습니다. 40일을 금식하셨다고 했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물론 금식 기도의 영적인 이유들이 있었겠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이유 중 하나는 유다 민중들처럼 처참하고 주리고 목마른 삶으로 사역을 시작하시려는 의지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40일을 금식한 30세의 청년 예수에게 사탄이 다가와서 가장 먼저 유혹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만일 네가 메시아라면 유다 광야에 널려 있는 돌들로 떡을 만들어서 너의 주림과 배고픔, 유다의 주림과 배고픔을 해결하라는 것입니다. 사탄의 주장은 메시야가 해결해야 하는 문제가 바로 ‘떡’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3.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예수님은 자신의 배고픔을 이용해서 유혹하는 사탄에게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 4:4)
복음서에는 예수님께서 여러 번 사람들을 먹이시는 장면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잔치로 설명하시기도 했습니다. 함께 먹는 자리를 좋아하셨습니다. 먹는 문제를 결코 사소하게 여기시는 예수님이 아닙니다. 그들의 주림과 목마름을 아십니다. 그런데 주리고 목마르기 때문에 그들이 잃어서는 안되는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을 향한 생각입니다. 사람을 이 땅의 논리와 가치가 아닌 ‘하나님의 나라와 의’라고 하는 가치를 따라 살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여전히 수고롭고 무거운 짐들을 지고 삽니다. 주리고 목마릅니다. 내가 언제 한번 배불리 먹었던가...? 기억이 가물가물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산으로 불러 모으시고 8가지 복을 선언하십니다. 그 중 하나가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마 4:6下)입니다. 배부르게 된다고? 어떻게? 내가 무엇을 해야 이 척박한 현실 속에서, 이 절망의 상황 속에서, 아무도 나를 도와주지 않고 내 자녀와 아내를 위해 오늘도 밖으로 나왔지만 먹을 것을 구하지 못해서 이리저리 고픈 배를 쥐고 다니는 내가 어떻게 하면 배부를 수 있을까....? 나는 언제 한번 부른 배를 두드리며 낮잠 한번 늘어지게 자볼까...?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복이 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배부르게 하실 것이다” 4. 소원이 이루어지는 삶 vs. 소원이 변화되는 삶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 5:6) 이 말씀을 듣고 있는 청중들에게 가장 잘 들리는 말은 어떤 부분일까요? 아마도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라는 말이 귀를 뚫고 들어와 마음에 콱 박힐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이 어떤 말씀을 듣기를 원하실까요? 어떤 말씀을 해주고 싶으실까요? 예,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입니다. 그들이 떡을 갈구하고 부를 갈구하고 먹고 살기에 급급하고 나와 내 가족들의 배를 어떻게 채울 것인지를 갈급해하는 삶을 살아온 지 벌써 수백년이 지났습니다. 남북 이스라엘에 멸망해 가던 선지자 미가의 시대에서 8복이 선포되는 예수님의 시대까지 700년이 흘렀습니다. 그 700년 동안 그들은 여전히 주리고 목마릅니다. 그들의 삶의 환경이 변하지 않습니다. 부와 가난은 대물림되고 사회적 환경도 대물림됩니다. 주님께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공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복이 있나니 그들을 충만히 채워주실 것이다.” “지금 너희가 목말라하고 배고파해야 하는 것은 떡 한 덩이가 아니라 하나님의 충만하신 뜻이 너희의 삶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에게 하나님은 그 뜻을 풍성하게 이루어주실 것이다” 예수님이 그들에게 주시는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주리고 목마른 삶에 대한 그들의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소원이 변화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배를 채우기 위한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키는 삶을 살 것을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과 관련해서 우리가 잘 아는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마 6:31-34) 이 말씀을 듣는 사람이 질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면 내 삶이 풍성해지고 내 주린 배가 채워질까요?” 이 사람은 지금 복음을 잘못이해하고 있습니다. 복음은 내 배를 채우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내 삶의 변화를 위한 것입니다. 나를 향한 복음의 목적은 내 배를 위한 삶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으로의 변화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에 목말라하는 사람 - 예수님이 지금 찾으시는 사람은 그런 사람입니다. 모두가 떡을 외칠 때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는 사람입니다. 모두가 자신의 소원의 만족을 요구할 때 하나님의 나에 대한 소원을 고민하는 사람입니다. 모두가 내가 먹고 살기에 바빠서 하나님의 나라를 잊고 살 때 나는 이 땅을 살지만 하나님의 나라의 질서와 법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모두가 나 한 사람 먹고 살기도 바쁘다고 이웃의 아픔과 고통을 외면할 때 하나님의 정의가 나의 삶에서 성취되고 그의 삶에도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며 돕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이런 사람이 될 때 비로소 이웃의 주린 삶이 나와 함께 풍족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게 될 것입니다. 나의 이웃이 나와 함께 이런 삶을 살아갈 때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긍휼하심이 세상 가운데 편만히 증거될 것입니다. 우리 시대를 향하 미가 선지자의 고민을 다시 함께 나눕시다. 그의 고민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을 함께 나눕시다. 우리의 소원과 하나님의 응답과 우리의 순종이 이와 같기를 소망합니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로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 6: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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