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에 주리고 목이 마르니(2) | na kim | 2016-08-0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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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누가복음19:1-10절 개역한글1.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 지나가시더라 2.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3. 저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4. 앞으로 달려가 보기 위하여 뽕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5. 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사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6.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7.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가로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 9.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10.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2016. 7. 31. 본 문 : 누가복음 19장 1-10절 말씀 제 목 : 의에 주리고 목이 마르니..(2) 지난 주, 교회당 2층 화장실에서 손을 씻으려고 보니 세면대 배수구에 파란 싹이 하나 고개를 내밀고 있었습니다.(사진1) 처음에는 싹인 줄 알아보지 못해서 한참을 들여다봤었습니다. 신기하고 기특했습니다. 어떻게 이런 곳에서 싹을 틔우고 뿌리를 내렸을까요? 아마도 제가 아침에 생식과 함께 chia 씨앗이 다 분쇄되지 않고 있다가 그릇을 씻을 때 흘러간 것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놀랍게도 하루하루 지나면서 점점 자라는 것을 확인했습니다.(사진2) 손을 씻으러 갈 때마다 저는, 좀 과장하자면, 그 작은 생명 앞에서 마음이 경건해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지난 수요일 오후 싹을 생각하면서 제목이 없는 짧은 시를 썼습니다.
너의 생명을 지지한다. 인생도 / 그런 것일 수 있다 원치 않는 곳에 / 뿌리를 내리고 소망 없는 곳에서 / 성장할 수 있다 뿌리의 끝에 / 바위보다 차가운 거절을 만난다 그래서 / 박수친다. / 더 응원한다. 생명에 대하여 / 그 성실함에 대하여 마주보는 파란 잎의 진지한 얼굴에 대하여 / 굳게 잡은 두 손의 결연함이 대하여 세상으로 내뿜는 거룩한 숨결에 대하여 네가 옳다 / 내일 / 열매로 만나지 못한다 해도 살아서 / 지금 아름답다. / 생명이 참 아름답다. 가만히 싹을 들여다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지금 이 싹은 작고 예뻐 보이기는 하지만 이 싹의 뿌리는 얼마나 절박하게 부드럽게 젖어 있는 흙을 찾고 있을까? 혹시 이 싹은 원망하지는 않을까? “왜 나를 잘 준비된 옥토에 심어주지 않고 이렇게 화장실 세면대 배수구에서 싹 나게 하셨습니까?” “왜 아무 것도 모르는 나를, 아무 준비도 안된 나를 이렇게 위험하고 처절한 현실을 만나게 하셨습니까?” “나는 과연 찬란한 꽃을 피우고 자랑스런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까? 나에게도 영광이 있습니까?” 그런데 생각해보면 그것이 또 인생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요즘 한참 유행하는 금수저와 흙수저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어떤 공무원은 자신처럼 화려한 성공의 삶을 살지 못하는 민중들을 ‘개, 돼지’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삶은 불공평하고 관계는 사악합니다. 사회는 부도덕하고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은 얼음장같습니다. 아무리 발버둥치며 내 삶의 뿌리를 내릴 흙을 찾아봐도 뿌리의 촉수를 자르는 차가운 거절을 만날 뿐입니다. 간절하게 주리고 목마른 것이 일상화되고, 반복되며, 대물림이 되는 세상 - 어떻게 하면 이런 현실을 이길 수 있을까요? 여러분은 이런 세상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삶의 뿌리를 내리고, 잎을 만들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고 있습니까? Generous Justice 오늘은 지난 주일에 이어서 교회와 성도가 성경에서 해결해야 하는 가장 무거운 주제 중 하나인 ‘정의’의 문제에 대한 답을 고민하고자 합니다. 사실 한 주 말씀으로 나누려고 했는데, 지난 주에 미가서로 말씀을 나누다보니 길어서 설교를 나누었구요, 오늘 이 주제에 대한 말씀을 마치려고 했는데... 역시 양이 조절되지 않아서 한 주 더 주제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미리 말씀드리면 이번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에 대한 말씀의 주인공은 아직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다음 주에 소개하겠습니다. 그들이 누구인지 궁금해 해 주시고, 또 함께 고민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몇 주 전에 말씀을 나누면서 성경에는 짝이 되는 단어들이 있다고 했습니다. 예를 들어서 ‘겸손’의 짝이 되는 단어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바로 ‘온유’였습니다. ‘믿음’과 짝이 되는 단어는 무엇일까요? ‘행함’입니다. 그렇다면 퀴즈입니다. 성경에서 늘 ‘정의’와 짝을 이루어 나오는 단어는 무엇일까요? 바로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없는 정의는 차갑고 날카롭습니다. 세상의 모든 정의가 완전할 수 없기 때문에 사랑이 없는 정의는 또 다른 눈물과 아픔과 그리고 불의를 생산할 수 있습니다. 반면 정의가 없는 사랑은 무분별합니다. 사회적, 관계적 강자에게 쉽게 이용당합니다. 때로 불의한 사람들이 정의 없는 사랑, 무분별한 사랑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불의를 정당화하고 오히려 정의를 억압하기도 합니다. 지난 주일 묵상했던 미가서 6장 6-8절의 말씀에서 ‘불의한 시대에 성도는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실천하는 삶을 살아갈까?’라는 미가 선지자의 고민에 대해 하나님은 이렇게 응답하셨습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 6:8) 불의한 시대를 사는 성도와 교회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정의와 사랑이 함께 조화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팀 켈러 목사는 ‘Generous Justice’리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교회와 성도는 그것을 가지고 겸손하게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습니다. 2. 인자, 의, 정의, 공의 먼저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의 개념을 좀 정리해 볼까요? 제가 오늘 말씀을 통해서 구별해서 사용할 4가지 단어의 개념을 정리해드릴까 합니다. 1) 인자 – 조금 전에 말씀드린 ‘정의’와 짝을 이루는 단어가 미가서에서는 ‘인자’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인자라는 말은 성경에는 ‘헤세드’라는 말로 자주 소개됩니다. ‘하나님이 무한하신 사랑’ 혹은 ‘하나님의 은혜’로 번역되기도 합니다. 이것이 사람에게 적용될 때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깨달은 사람의 내면의 동기에 초점이 있습니다. 2) 의 – 먼저 성경이 말하는 정의 혹은 공의와 구별되는 ‘의’의 개념을 정리해 봅시다. 종교개혁자인 마틴 루터는 의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바울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했던 의로움이 있다. 우리의 행실과 상관없이 하나님은 그 의로움을 우리에게 덧입히셨다.... 도덕률에 비춰볼 때 나는 본래부터 죄인임에 틀림없지만... 새로운 의로움에 힘입어 이제 내게는 죄도, 양심의 가책도, 사망의 공포도 없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가 주시는 또 다른 의로움, 삶 이상의 삶을 살게 된 것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의’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의를 말합니다. ‘의롭게 되었다’는 말은 인간의 타락과 죄악에서 해방되어 예수 그리스도와의 새로운 관계 속에 있게 되었다는 선언입니다. 3) 정의 - ‘의’에서 한 걸음 나아가는 ‘정의’는 기초정의(짜데카)를 말하는 것입니다. ‘정의롭다’는 말은 내가 믿음 안에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세상의 ‘불의와 악’에 굴복하지 않고 하나님의 의에 헌신하는 삶을 산다는 것을 말합니다. 4) 공의 – 공의는 정의의 관계적, 사회적 실현을 말합니다. 말하자면 이것은 ‘교정정의’(미쉬파트)입니다. 바로 잡는 것입니다. 잘못을 저지른 이에게 벌을 내리고 부당한 대우를 받은 희생자를 보살피는 것을 포함합니다. 욥기에 의와 정의와 공의의 차이를 잘 설명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내가 의를 옷으로 삼아 입었으며 나의 정의는 겉옷과 모자 같았느니라 나는 맹인의 눈도 되고 다리 저는 사람의 발도 되고 빈궁한 자의 아버지도 되며 내가 모르는 사람의 송사를 돌보아 주었으며 불의한 자의 턱뼈를 부수고 노획한 물건을 그 잇새에서 빼내었느니라”(욥 29:14-17) 하나님의 의가 욥을 변화시켰습니다. 의로 옷을 입었다고 했습니다. 정의롭게 삽니다. 겉옷과도 같고 모자와도 같다고 했습니다. 내 안에 있는 의가 삶으로 표현됩니다. 연약한 사람들을 돕고 그들과의 정의롭고 평등한 삶을 지향합니다. 그런데 내 삶의 정의가 세상에 존재하는 불의를 만날 때가 있습니다. 욥은 고백합니다. 그는 정의롭지 못한 것을 고치고 이웃의 정의를 침해하는 것들과 싸웠습니다. 관계를 변화시키고 사회를 변혁합니다. 이것이 공의입니다. 욥은 불의한 자의 턱뼈를 부수고 그들이 연약한 사람들에게서 부당하게 취한 이득을 빼앗아 돌려주었다고 고백합니다. 3. 의를 사모하는 사람이 되다. 네 가지 개념이 잘 이해가 되십니까? 좀 복잡합니까? 좀 더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에스겔의 말씀을 봅시다. “사람이 만일 의로워서 정의와 공의를 따라 행하며... 사람을 학대하지 아니하며 빚진 자의 저당물을 돌려주며 강탈하지 아니하며 주린 자에게 음식물을 주며 벗은 자에게 옷을 입히며 변리를 위하여 꾸어 주지 아니하며 이자를 받지 아니하며 스스로 손을 금하여 죄를 짓지 아니하며 사람과 사람 사이에 진실하게 판단하며” (겔 18:5, 7-8) 저는 이 말씀을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을 만났던 한 사람에 대해 적용하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삭개오를 잘 압니다. 그의 삶에서 에스겔의 말씀이 어떻게 실현되었을까요? 에스겔 18:5절을 다시 볼까요? “사람이 만일 의로워서 정의와 공의를 따라 행하며...”(겔 18:5)입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나고 영접했습니다. 그에게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이 임했고, 의롭다 여기심을 받았습니다. 이 말씀을 겔 18:8에 적용하면, 삭개오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워져서 정의와 공의를 따라 행하기로 결정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어떤 일을 합니까? 겔 18:7-8의 말씀(사람을 학대하지 아니하며 빚진 자의 저당물을 돌려주며 강탈하지 아니하며 주린 자에게 음식물을 주며 벗은 자에게 옷을 입히며 변리를 위하여 꾸어 주지 아니하며 이자를 받지 아니하며 스스로 손을 금하여 죄를 짓지 아니하며 사람과 사람 사이에 진실하게 판단하며/겔 18:7-8)과 눅 19:8의 말씀(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눅 19:8)을 비교해 보십시오. 그는 지금 의롭게 되었고, 의를 사모하게 되었습니다. 그에게 믿음이 생기고, 의롭다 칭하심을 받고, 마음과 생각과 삶이 정의와 공의를 실현하는 삶으로 변화되고 있는 것입니다. 4. 삭개오의 충만함 자, 그렇다면 삭개오는 하나님의 나라와 의에 동참하는 삶을 살고 난 후에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요? 이제 가난해져서 구걸하는 삶을 살게 되었을까요? 성경이 삭개오의 이후의 삶에 대해 보여주지 않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삭개오가 이렇게 하나님께 자신의 재물을 드렸으니까 하나님이 30배, 60배, 100배의 복을 주셨겠다...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하나님을 엄청난 복리로 계산해주시는 은행 정도로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삭개오의 참된 복은 그가 세상과 재물과 명예에 주리고 목마른 삶을 살다가 이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목말라하는 삶을 살게 된 것 – 바로 이것입니다. 이것이 삭개오의 참된 복입니다. 그렇다면 삭개오는 마 5:6에서 예수님이 선언하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라는 복을 받은 것일까요? 아니면 이제 그런 복은 포기할까요? 삭개오를 위해 준비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시편 33편의 말씀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은 정직하며 그가 행하시는 일은 다 진실하시도다 그는 공의와 정의를 사랑하심이여 세상에는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충만하도다”(시 33:4-5)
하나님은 공의와 정의를 사랑하시는데, 세상에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충만하다고 했습니다. 삭개오가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에 들어가고, 그의 삶에서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에 순종하는 삶을 살면... 그의 삶에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충만합니다. 은혜와 자비가 충만합니다. 사랑과 감사의 제목이 풍성하게 넘칩니다. 이전에는 아무리 곡간을 많이 채워도 늘 배가 고팠습니다. 아무리 통장의 잔고가 늘어나고 이자가 많이 불어나도 불안했습니다. 이전에는 사람들의 아첨과 아부를 받으면서 그들의 간교한 웃음 속에 묻어 있는 날카로운 증오와 비웃음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다릅니다. 삭개오는 이제 세상에 대해 자유롭고 재물에 대해 만족합니다. 배가 부릅니다. 그를 충만하게 채우는 것은 재물이 아닙니다. 그를 만족하게 하는 것이 세상의 명예가 아닙니다. 그가 갈급한 것이 더 이상 권력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에 배부릅니다. 하나님으로 만족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가 나에게 임하였음을 기뻐하며 찬양하며 만족합니다. 성령 하나님의 충만하심이 그의 삶에 함께 있습니다. 삭개오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공의는 이웃에 대한 자비로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에 순종하는 성도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세상에 충만하게 증거됩니다. 그러므로 마 5:6의 말씀은 삭개오의 삶을 통해서 이렇게 읽힐 수 있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삭개오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배부를 것임이요” 어쩌면 우리는 들풀처럼, 세면대에 자라났던 작은 새싹처럼 잠시 사람의 시간 속에 들어왔다가 하나님의 시간으로 돌아가는 것 같습니다. 이 잠간의 삶을 사는 우리가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품게 된 것은 참으로 큰 은혜입니다. 우리에게 허락하신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 – 그 마음 속에는 의를 사랑하며 정의와 공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마음이 함께 있습니다. 그 마음에 순종하고 헌신함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로 충만하고 만족하는 하나님의 사람들로 살아가는 초대교회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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