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에 주리고 목이 마르니(3) | na kim | 2016-08-0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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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사도행전10:1-8절 개역한글1. 가이사랴에 고넬료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달리야대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이라 2. 그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3. 하루는 제 구시쯤 되어 환상 중에 밝히 보매 하나님의 사자가 들어와 가로되 고넬료야 하니 4. 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가로되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천사가 가로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하여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5. 네가 지금 사람들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6. 저는 피장 시몬의 집에 우거하니 그 집은 해변에 있느니라 하더라 7. 마침 말하던 천사가 떠나매 고넬료가 집안 하인 둘과 종졸 가운데 경건한 사람 하나를 불러 8. 이 일을 다 고하고 욥바로 보내니라
2016. 8. 7. * 본 문 : 사도행전 10장 1-8절 말씀 * 제 목 : 의에 주리고 목이 마르니(3) 그동안 준비하고 기도해온 나바호 단기선교팀이 오늘 저녁과 내일 아침에 출발합니다. 올해로 네 번째 같은 지역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사역을 하고, 그들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과 눈물을 배우는 시간을 가지게 됩니다. 지난 수요일, 나바호 선교를 하기 전에 우리가 알아야 할 몇 가지 사항을 헌신 예배를 통해서 나누었습니다.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교회 홈페이지를 통해서 내용을 보실 수 있고, 홈페이지에 접근하기 어려운 분들은 제게 요청하시면 자료를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미국 원주민 선교에 있어서 핵심이 되는 말이 있다면 바로 ‘성육신 선교’라는 말입니다. ‘성육신 선교’란 유럽의 백인들이 미대륙에 들어온 후 지난 500년간 백인 교회가 해왔던 선교방식, 즉 가르치고 군림하고 그들의 문화와 생활방식으로 변화시키려는 방식에 대한 반성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찾아오시고 우리와 같이 되셨던 것처럼 그들의 문화와 삶의 방식과 가치를 존중하면서 복음으로 그들을 섬기는 방식을 말합니다. 오늘날 미국 교회가 원주민 선교를 거의 포기하면서 오히려 한국 선교사들에 자리를 내주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가해자이면서 구원의 복음을 전해야 하는 이중적인 한계를 벗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한국 교회는 미국 원주민과 비슷한 역사적 경험을 가지고 있고, 미국에서 여전히 소수민족이면서 얼굴색까지 비슷합니다. 그들과 같은 마음을 품기에 적당합니다. 우리는 비록 한 주간 잠시 교회를 섬기다 돌아오지만 삶을 헌신해서 미국 원주민들을 섬기는 선교사들에게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늘 함께 하시기를 바라고, 이번에 선교여행에 참여하는 우리 성도들과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마음과 눈물이 경험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미국 원주민 선교를 이야기할 때 빠뜨릴 수 없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입니다. 그는 우리가 잘 아는 부흥사 조나단 에드워드의 사위이기도 합니다. 그는 1718년 커네티컷에서 태어났습니다. 20대에 예일대학을 다니면서 중생의 경험을 하게 되고 학교를 중퇴하고 목회자들을 찾아다니면서 신학을 공부했습니다. 1743년 25세의 나이에 가까운 델라웨어 강을 중심으로 살고 있던 ‘카우나우믹’이라는 부족의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당시 많은 선교사들이 선교라는 이름으로 인디언 말살 정책에 앞서는 것을 반대했습니다. 오히려 델라웨어와 펜실바니아, 뉴저지에 있는 인디언 마을로 들어가서 그들과 함께 먹고 함께 생활했습니다. 1746년까지 3년 동안 그는 원주민이 되어 그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복음을 전했고, 130여명의 원주민들에게 세례를 주고 함께 신앙생활을 합니다. 하지만 어렵고 힘든 생활을 하는 중에 어린 시절부터 그를 괴롭혔던 결핵이 심해지게 되었고, 결국 그는 1947년 29세의 나이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습니다. 원주민 선교사로 불리는 수많은 선교사들 가운데 그의 이름이 빛나는 것은 그가 선택했던 삶의 방식 때문입니다. 그는 복음 앞에서 자신이 누릴 수 있는 편하고 안락한 삶의 유익을 내려놓았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이 증거하는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실천했습니다. 1743년 5월 18일 그의 일기의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나는 외롭게 살고 있다. 내 식사의 대부분은 삶은 옥수수나 옥수수 죽이다. 짚 더미 속에서 산다. 사역은 어렵고 힘들다. 나를 온전히 위로하여 줄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내가 전도하고 있는 인디언들은 살 땅이 없다. 지금 사는 곳도 독일인의 것이다. 그들이 강압적으로 빼앗았다. 그들은 불쌍한 인디언의 삶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다.... 그들은 내가 인디언들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이유만으로 나를 미워한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나를 견딜 수 없는 비탄에 빠지게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아직 그 얼굴을 감추고 계시다는 일이다.” 그는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했고, 헌신했고, 결국 가장 아름다운 사역 가운데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게 됩니다. 1.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공의 지난 2주간 ‘의에 주리고 목 마른 삶’에 대해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첫째 주에는 우리와 같이 평범한 한 사람이었던 미가 선지자의 고민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불의와 부패가 판을 치는 시대에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을 살아갈까를 고민하던 그에게 하나님께서 답을 주셨습니다. “정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며 하나님과 겸손하게 동행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700년이 지나서 예수님의 시대에 한 사람의 삶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바로 지난 주에 고민했던 삭개오입니다. 사람들은 모두다 자신의 삶의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삭개오에게 있어서 가장 넘기 힘들었던 한계는 바로 물질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이 삭개오의 물질에 대해 도전하고 삭개오는 복음의 요구 앞에 순종합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그에게 허락되었을 때 그는 자신의 삶 깊은 곳까지 숨어 있는 불의한 물질을 털어냅니다. 가난한 이웃들과 자신이 수탈한 사람들에게 그의 재물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됩니다. 삭개오의 삶은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공의로우심이 어떻게 서로 조화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2. 백부장 고넬료 그리고 오늘 우리는 본문에서 또 한 사람을 만납니다. 그는 로마의 군인입니다. 백부장이면 당시 꽤 높은 군관에 해당됩니다. 로마는 자신들이 정복했던 각 지역에 왕을 임명하고 로마의 군대를 주둔시켜서 치안을 담당했습니다. 실제적인 권력이 그들에게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을 때 헤롯이 결정하지 못하고 예루살렘의 법과 치안을 담당했던 빌라도 총독의 결정을 기다렸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제가 어릴 적만 해도 할머니께서 제가 울거나 땡깡을 부리면 “쉿... 순사 온다, 순사!”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얼마 전에 어느 학부모님이 아이를 달래면서 “쉿... 목사님 온다, 목사님...”하길래... 하하... 좀 뭐라고 한 적이 있습니다만.... 어쨌든 저는 어릴 적 순사가 무엇인지 모르고 무서워했던 적이 있습니다. 로마가 지중해 근방의 모든 나라를 정복했을 때 각 지역의 치안을 담당하는 백부장의 권위는 하늘을 찌르지 않았겠습니까? 한 때 우리나라가 일본 제국주의에 강점당했을 때 면서기만 되어도 어깨에 힘을 주던 시절에 있었습니다. 100년 전의 일본 제국주의보다 훨씬 잔혹하고 강력했던 2000년 전의 로마 제국이었습니다. 하물며 그 시대, 군대를 가진 관료라면 그 위세가 어떠했겠습니까? 그런데 성경에 소개하는 고넬료는 뭔가 심상치가 않습니다. 성경이 그에 대해 소개하는 첫 마디를 보실까요? “그는 경건하여 온 집안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행10:2)라고 했습니다. 4절에서 천사가 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하여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행 10:4下) 그의 하인들과 부하들이 그에 대해 베드로에게 설명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들이 대답하되 백부장 고넬료는 의인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 유대 온 족속이 칭찬하더니 그가 거룩한 천사의 지시를 받아 당신을 그 집으로 청하여 말을 들으려 하느니라 한 대”(행 10:22) 3. 경건과 정의가 만나다. 그에 대한 성경의 표현들을 정리해 봅시다. 그를 표현하는 말들은 두 가지로 갈라집니다. 행 10:4에서 천사가 잘 정리했습니다. 하나는 기도요, 다른 하나는 구제입니다. 즉, 하나는 하나님에 대한 것이요 다른 하나는 이웃에 대한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에 대해 경건한 사람이었고, 이웃에 대해 정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모하고 예배하기를 원하는 사람이었고, 하나님의 뜻과 사랑을 이웃에게 실현하기를 원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제가 한 번 말씀드린 기억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집회를 인도한 적이 있는 정현구 목사님 기억하실 겁니다. 서울 영동교회를 20년 가까이 담임하고 있습니다. 영동교회는 손봉호 교수가 개척한 교회이고 박은조 목사가 오랫동안 섬겼던 교회이기도 합니다. 서울 강남 한가운데 있고, 권사님들이 마트를 갈 때도 외제차를 끌고 다닌다고 할 만큼 한국 사회를 대표하는 인텔리들과 부자들이 모인 교회입니다. 한번은 정목사님과 한국 사회의 여러 문제들에 대한 의견을 나눈 적이 있었습니다. 너무 의견차가 컸습니다. 교회나 신학이나 신앙이나 기타 여러 가지 현안들에 대해서는 의견이 딱딱 일치하는데 왜 한국 사회 전반에 걸친 문제점들을 개혁하고 변화시키는데 대해서는 의견이 맞지 않았을까요? 그래서 제가 정목사님께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형님,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가난한 이민자들을 섬기는 목회자들은 이렇게 생각하고, 서울 강남에서 큰 교회를 섬기는 형님은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우리가 그 한계를 넘기가 이렇게 힘이 든 겁니다.” 그런데, 자신의 삶이, 존재가, 환경이 의식을 규정하기 마련인데.... 고넬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당시에 로마의 군관이 누릴 수 있는 모든 권위와 지위와 폭력이 그의 삶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성경이, 천사가, 그의 종들과 부하들이 그에 대해서 같은 말로 설명합니다.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었고, 이웃을 많이 구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이웃... 어떤 사람들일까요? 예, 억압받고 가난한 유대인들입니다. 식민지의 백성들입니다. 그의 부하들은 각 나라에서 잡혀온 용병들일 가능성이 많고, 그의 종들 또한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 모든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칭찬을 받습니다. 그가 의식적으로 존경과 칭찬을 위해 노력했거나 꾸민 것이 아닙니다. 그는 다만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뜻이 자신의 삶에 강물처럼 흐르기를 소원했을 뿐입니다. 자신의 삶에 찾아온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그 뜻을 실천했을 때 그것은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정의로 나타납니다. 권력과 권위로 억압하고 수탈하지 않고 오히려 구제하고 섬깁니다. 어떻게 그가 그럴 수 있었을까요? 그 과정을 알 수는 없지만 성경은 그가 하나님을 사모하는 사람이었다고 말합니다. 제국의 군관이 식민지의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의 마음이 얼마나 하나님에 대해 간절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4. 고넬료, 하나님께 주리고 목말랐던 사람 사도행전이 10장 정도에서 고넬료를 비중 있게 소개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제 예루살렘에서 복음을 전하던 시대가 지나가고 있습니다. 선교의 중심이 이동하고 있습니다. 곧 안디옥 교회가 서고 그곳에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할 것입니다. 좀 있으면 이방교회였던 안디옥 교회를 성장시켰던 사도 바울은 로마로 잡혀가서 그곳에서 전도하고 선교하며 교회를 세울 것입니다. 어떻게 이 놀라운 일이 가능했을까요? 옥중서신을 보면 우리가 주의해서 보아야 할 표현이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도에게 각각 문안하라 나와 함께 있는 형제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모든 성도들이 너희에게 문안하되 특히 가이사의 집 사람들 중 몇이니라”(빌 4:21-22) 가이사의 집 사람들...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요? 예, 로마 제국의 왕족들입니다. 하나님의 복음이 로마의 왕족들과 귀족들, 관리들에게 증거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미 바울은 빌 1:12(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에서 ‘복음의 진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영어 성경에서 ‘advance’로 번역된 이 ‘진보’라는 말은 원래 헬라어로 로마의 공병대가 먼저 그 기병들이 나갈 길을 닦는다는 뜻으로 쓰이던 말입니다. 로마의 기병들이 새로운 땅을 정복하면서 말 달려가던 길이 바로 ‘advance’인 것입니다. 헬라 문화와 로마의 군사력이 세계를 향해 말달려 가던 곧고 시원한 길 – 그 길이 바로 바울이 옥중에서 발견한 길입니다. 세계 제국 로마를 복음으로 정복하는 일에 시원한 대로의 역할을 하는 사람들, 그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를 성경은 오늘 본문에서 고넬료를 통해서 소개합니다. 그들은 로마의 권력자들입니다. 그들의 권력을 합리화하고 그들이 누리는 모든 부와 향락과 권력을 신의 축복으로 해석하는 우상들을 섬기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복음이 다가왔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에 대해 목이 마릅니다. 이전에는 권력이, 출세가, 부와 명예와 향락에 굶주리고 목마른 삶을 살았는데... 그들이 이제 복음을 만났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에 대하여, 하나님에 대하여 목마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핍박자가 아닌 핍박 받는 사람이 됩니다. 권력자가 아닌 친근한 이웃이 됩니다. 재물로 자신을 즐겁게 하는 사람이 아닌 재물로 이웃을 섬기는 사람이 됩니다. 권력으로 다른 사람에게 군림하는 사람이 아닌 오히려 존경받고 칭찬받는 삶을 선택합니다. 하나님의 정의가 자신의 삶에서 먼저 실현되고 이웃에게는 사랑으로 증거됩니다. 고넬료의 하나님에 대한 갈증과 배고픔이 하늘에 닿아서 하나님이 기억하신다고 했습니다.(Your prayers and gifts to the poor have come up as a memorial offering before God./Acts10:4) 성도 여러분, 이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로마의 황족인데... 군관인데 자신이 누릴 수 있는 권력과 이익을 내려놓고 식민지의 신, 아니 식민지에서조차 핍박받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신앙을 따라 살기로 결단하는 것은 쉽지 않은 결단이자 삶입니다. 그런데 고넬료가 그 어려운 일을 합니다. 빌립보에서 가이사의 집의 사람들이 그 일을 합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 1장을 보시면 데오빌로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그의 직위는 ‘각하’입니다. 예수 믿는 로마의 각하, 그에게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이 전달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까요? 그들이 모두 하나님에 대해 목마른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복음에 굶주린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부와 명예와 권력과 향락이 아닌 오직 하나님께 목마르고 배고팠던 사람들, 그들은 그들의 삶과 이웃의 삶에 하나님의 자비와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기를 소원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소원대로 그들은 자신들의 삶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하나 고민할 것이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와 성도가 가장 위로받는 말씀은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라는 말입니다. 진리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말씀에서 더 나가지를 않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소원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정의롭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무엇이 하나님의 정의입니까? 내가 하나님께 받은 사랑과 자비와 은혜가 나를 통해 이웃에게 표현될 때 그것이 정의입니다. 세상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나누기에 합당하지 않은 제도와 삶의 방식을 가지고 있을 때 그것을 변화시키는 것이 공의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와 은혜가 나에게만 고여 있고, 내가 전혀 그 사랑과 자비와 은혜를 세상으로 흐르게 하는 통로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저수지의 역할만 한다면... 나는 불의한 사람입니다. 지난 500년 간 원주민 선교에 실패한 미국 교회의 실수를 거듭하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것으로부터 자유롭지 않고 낮아지지 않았습니다. 고넬료의 삶에서 마태복음 5장 6절의 말씀이 성취됩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고넬료는 복이 있나니 그가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할 것임이요” “하나님에 주리고 목마른 고넬료는 복이 있나니 그가 성령으로 충만할 것임이요” 이 말씀이 우리와 자녀들의 삶에 충만하여서 우리가 늘 하나님으로 목마른 삶을 살고 하나님의 나라와 의로 충만하고 만족하고 감사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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