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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에 주리고 목이 마르니(4) 이응도 목사 2016-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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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8. 14.

 

* 본 문 : 빌레몬서 18-22절 말씀

* 제 목 : 의에 주리고 목이 마르니(4)

 

공의와 짝을 이루는 말이 있다고 했습니다. 기억나십니까? 공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며... 라고 했습니다. 정의 혹은 공의는 사랑과 늘 함께 와야 합니다. 그런데 실은 정의에는 또 다른 짝이 있습니다. 바로 공평입니다. 성경의 곳곳에서 공평과 정의라는 말은 반복됩니다.

 

성경은 왜 이 두 단어를 병행해서 사용하고 있을까요? 공평이 없는 정의의 실현은 거짓이고, 정의가 없는 공평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개인의 삶의 정의는 사회적 공평과 깊은 관계가 있고, 우리는 이것을 평등이라고 말합니다. 개인적 삶의 정의는 사회적인 평등에 기여할 때 공의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실은 이 부분에서 충돌이 발생할 때가 많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내 안에 찾아오고 내가 복음적 정의에 순종하는 삶을 살기를 소망합니다. 그런데 그 복음적 정의가 때로 내가 속한 사회가 허락하는 상식과 법과 어긋날 때가 있습니다. 특별히 공평의 범위에 대한 이해가 다르거나 기본적인 권리로서의 평등함에 대한 사회적인 약속의 차이가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인지 잘 이해할 수 없는 분들은 오늘 본문에서 좋은 예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빌레몬과 오네시모 -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 가 배부를 것임이요라는 말씀을 묵상하면서 저는 이 두 사람을 생각했습니다. 이 두 사람의 삶과 빌레몬서를 기록할 때의 상황 속에서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그들이 정말 의에 주리고 목이 마르기 때문에 선택하는 삶은 무엇이고, 만일 그들이 하나님의 의보다 더 목이 마르고 주린 것이 있었다면 그들은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요? 지난 3주간의 말씀에 이어서 오늘은 두 사람의 삶을 함께 살펴보면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에 대한 말씀을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1. 빌레몬의 시대

 

성경 빌레몬서는 이것이 왜 성경일까? 궁금하게 만드는 성경이기도 합니다. 지극히 개인적이고 짧기도 합니다. 내용인 즉, 골로새라는 지역에 살고 있는 귀족인 빌레몬에게 로마의 감옥에 있던 사도 바울이 편지를 보냅니다. 사도 바울이 만나고 양육한 한 청년을 부탁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좀 문제가 있습니다. 이 오네시모라는 청년은 알고 보니 노예였습니다. 그것도 편지를 받는 빌레몬의 노예였습니다. 오네시모는 빌레몬에게 큰 피해를 입히고 도망쳤습니다. 로마 제국은 노예제도를 기반으로 성장하고 발전한 국가입니다. 노예를 엄격하게 다루지 않으면 사회의 기반이 흔들린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려받은 신분이나 전쟁과 가난에 의해 노예가 되고, 한번 노예가 되면 그 굴레를 벗어나기가 정말 힘들었습니다. 하물며 주인에게 피해를 입힌 노예, 그것도 도망을 친 노예는 너무도 당연하게 죽음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지금 현재 오네시모가 자신을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하고도 최선의 일은 빌레몬으로부터 가능하면 멀리... 도망을 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빌레몬은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빌레몬은 초대교회가 가정을 기반으로 모일 때 자신의 집을 제공하여 골로새 교회를 시작했던 사람입니다. 부자이자 로마의 귀족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였고, 신앙과 삶에 있어서 신실한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노예가 있습니다. 그가 노예와 함께 예배했는지, 그의 노예들에게도 복음을 전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분명한 것은 그가 노예제도에 의해 이익을 얻는 로마의 귀족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렇게 간곡하게 부탁하고 있는 것을 보면, 빌레몬은 충분히 오네시모를 엄격하게 벌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 그들이 만난 복음

 

그렇다면 오네시모는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성경이 그에 대해 제공하는 정보는 빌레몬에 대한 것보다 더 제한적입니다. 우리는 그가 어떤 인격과 신앙을 가진 사람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가 빌레몬의 집에서부터 예수를 믿었는지, 바울을 만나고 난 다음 예수를 믿었는지 모릅니다. 그가 바울에게 찾아간 것이 의도적이었는지, 혹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중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은 것인지도 모릅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가 빌레몬에게 큰 잘못을 범하고 도망을 쳤고, 그가 바울을 통해서 복음을 만났다는 것입니다.

 

, 그렇다면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오네시모가 만난 복음은 빌레몬의 복음과 다른 것일까요? 그들은 같은 복음을 믿고 있나요? 그렇다면 그들은 하나님 안에서 한 형제, 자매인가요? , 그렇습니다. 그들은 모두 복음을 받아들였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이 허락하신 새로운 관계가 중요할까요? 그들이 로마가 지배하는 사회 속에서 얻었던 주인과 노예라는 관계가 중요할까요? 그들은 자금 서로에게 무엇을 말하고 싶을까요? 그들의 신앙은 그들이 서로에 대해 말하고 싶어 하는 것에 영향을 미치고 있을까요?

 

복음은 원래 그 적용에서 매우 상황적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음에 우리의 지혜와 선한 양심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빌레몬에게 허락된 복음과 오네시모가 만난 복음은 같은 복음입니다. 다만 그들이 살아온 삶의 여정이 다르고, 상황이 다르고, 선택이 다릅니다. 하나님의 영원하신 복음은 늘 복음의 대상이 되는 그 시대 성도들의 구체적인 삶의 정황 속에 선포됩니다. 복음은 성도의 삶의 상황과 선택에 따라 보석처럼 빛나기도 하고 별처럼 반짝이며 생수가 되고 들불이 되고 변화의 동력이 됩니다. 마찬가지로 복음은 성도의 삶의 상황 속에서 선택에 따라 굴러가는 돌멩이가 되기도 하고, 쓰레기통에 구겨진 종이가 되기도 하고, 그저 산 너머 울리는 메아리가 되기도 하고, 틀어놓은 T.V.의 소음이 되기도 합니다. 같은 복음을 받은 오네시모와 빌레몬, 빌레몬과 오네시모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할까요? 그들에게 복음은 보석이 될까요? 굴러다니는 돌멩이가 될까요?

 

3. 그들의 선택

사도 바울은 오네시모에게 복음을 전하고 양육하고 설득했습니다. 빌레몬의 집으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잘 하는 것일까요? 말씀 드린 대로 오네시모에게 있어서 최선이자 유일한 살 길은 가능하면 주인 빌레몬으로부터 멀리 떨어지는 것인데.... 그것이 그 시대의 상식인데....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를 돌려보냅니다. 잘 이해가 안됩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노예제도를 인정하고 로마의 통치 방식에 동의하는 것입니까? 성도가 자신의 살 길을 찾도록 도와야 하는 바울이 죽음의 길을 강요하는 것 아닌가요?

 

어떻게 보면 사도 바울은 빌레몬의 편인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노예제도라는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불의하고 불평등한 제도를 인정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한다고 하면서 한 노예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잔혹한 선택을 한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복음의 역할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것입니다. 이 땅에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해 선포됩니다. 그 사람의 삶의 정황이 어떠하건, 어떤 역사적 상황 속에 있건 복음은 성도를 하나님 나라의 삶으로 인도합니다. 그 복음이 오네시모에게 전파되었습니다. 복음은 그를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교회의 형제가 되었다고 선언합니다. 주인인 빌레몬이 하나님의 같은 자녀요 형제라는 것입니다. 그는 이것을 믿습니다. 그런데 이제 어떻게 할까요? 빌레몬에게 내가 이제 당신의 노예가 아니라 형제라고 가르쳐줄까요? 노예제도라는 불의한, 불공평한 사회제도를 바꿀까요? 오네시모의 선택은 죽음이 예상되는 어두운 길이었습니다. 로마에서 골로새까지... 가다가 도망친 노예라는 사실이 발각되면 죽을 수도 있습니다. 빌레몬의 집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죽을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오네시모가 그 길을 선택할 수 있었을까요? 그는 왜 돌이키지 않고 끝까지 그 길을 갈 수 있었을까요? 여러분은 그의 선택에 동의하십니까?

 

4. 서로에게 복음이 되는 관계

 

네시모에게 있어서 우리가 발견해야 할 중요한 요소는 그의 이러한 결단과 실천이 복음이 아니라면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잘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지금 도망친 노예로 돌아가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자녀로, 교회의 형제로 돌아가는 것입니까? 바울은 분명히 선언합니다. 그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1:11) “이 후로는 종과 같이 대하지 아니하고 종 이상으로 곧 사랑 받는 형제로 둘 자라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랴”(1:16) 그는 이전과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러하고, 바울 앞에서 그러하고, 자신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그는 이미 하나님의 자녀요 교회의 형제입니다. 만일 그가 아직 노예로서의 정체성을 가졌다면 결코 빌레몬에게로 돌아가지 못합니다. 그가 이미 하나님 안에서의 새로운 정체성에 대한 확신을 가졌기 때문에 돌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는 로마가 지배하는 세상 속에 살지만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졌습니다.

 

하지만 아직 빌레몬은 그렇지 않습니다. 여전히 그는 오네시모의 상관입니다. 그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인데, 로마의 지배가 주는 유익을 누리며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구원을 얻고, 로마의 귀족으로 편하고 안락한 삶을 보장받습니다.

 

바울이 지금 오네시모를 돌려보내는 것은 단순히 오네시모를 용서해달라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바울은 지금 도망친 노예 오네시모를 한 사람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복음으로 변화된 삶을, 복음 자체를 그에게 보내고 있습니다. 오네시모는 빌레몬에게 복음이 되어 달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복음으로 인정하고 받으면 그는 로마의 지배가 그에게 준 중요한 유익을 포기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는 동시에 로마가 그에게 안겨준 불평등한 구조로부터 벗어나서 하나님의 나라에서 허락된 복음적 관계로 들어가게 됩니다. 빌레몬에 오네시모를 사랑받는 형제’(1:16)받아들일 수 있는가? 하는 것은 그가 복음으로 말미암은 새로운 삶을 결단하고 실천할 수 있는가를 알 수 있는 리트머스 용지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지난 주간 나바호 원주민 선교를 하면서 아주 인상적인 일이 하나 있었습니다. 이미 페이스북에 글을 올렸기 때문에 많은 분이 알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첫날 저녁 식사를 마친 후 잠시 우리 교회 자녀들이 교회 주변에서 놀고 있는 원주민 아이들과 만날 일이 있었습니다. 우리 자녀들 중 하나가 많이 친해져서 놀다가 원주민 아이들에게 자신들의 마음을 몇가지 단어로 설명해보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아이 중 하나가 ‘pain and sadness'라고 했습니다, 고통과 슬픔이라는 말입니다. 자기 전에 그 이야기를 나누면서 저는 우리 아이들에게 혹시 너희도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이나 슬픔이 있었는지 물었습니다. 다행히도 우리 자녀들은 무거운 짐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자녀들의 마음과 생각을 보호하고 지키는 것은 기성세대의 의무이면서 부모의 의무이고 학교의 기능이면서 국가의 사명입니다.

 

자신의 삶을 고통과 슬픔이라고 표현하는 원주민 아이들과 아직 그렇게 심각한 고통이나 슬픔을 경험한 적이 없다는 우리 자녀들, 이들에게 모두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그 복음은 같은 복음입니까? 다른 복음입니까? 우리 초대교회는 원주민 지역의 교회로 들어가서 교회를 도왔습니다. 그 교회와 성도들이 받고 믿는 복음은 우리가 듣고 믿는 복음과 같습니까? 다릅니까? 오네시모를 돌려보내는 복음과 빌레몬에게 증거되는 복음은 같습니까? 다릅니까?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오네시모를 통해서 강력하게 주장하십니다. 그에게 하나님은 빌레몬에게 준 것과 꼭 같은 사랑, 같은 은혜, 같은 권리와 의무를 주셨습니다. 이제 빌레몬의 선택이 남았습니다. 상황을 여러 가지 말로 설명하면서 상황의 요구에 굴복하여 복음을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은 굴러다니는 돌덩이가 되고, 악세사리가 됩니다. 그러나 상황보다 복음을 먼저 받고 복음에 순종하는 사람에게 복음은 보석이 되고 별이 되고 꽃이 됩니다. 복음은 그 복음으로 사는 사람들에게 복음 자체가 되어 다른 사람들에게 도전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오늘 복음을 들고, 복음이 되어 떨라는 마음으로 골로새 지역의 빌레몬에게 발걸음을 옮기는 오네시모를 만났습니다. 그가 받은 복음적 정의는 그렇게 실현되고 있었습니다.

 

할 수 있다면, 저는 우리들 모두가 오네시모 같기를 원합니다. 복음이 나를 변화시켰음을 믿으면서, 아직도 변화가 필요한 성도들에게 폭력적인 방식이 아닌 우리 자신이 먼저 복음에 순종하고 복음 자체가 되는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두려움도 염려도 이기지 못한 견고한 믿음으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성도들과 자녀들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은혜와 진리로 배부르게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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