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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휼의 물길 이응도 2016-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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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8. 21.

 

* 본 문 : 마태복음 1823-35절 말씀

* 제 목 : 긍휼의 물길

 

얼마 전 신문을 통해서 좀 마음이 아프기도 하고... 화가 나는 기사를 접했습니다. 한국 정부가 주도했던 4대강 사업의 결과로 낙동강에 더 이상 물고기가 살 수 없다는 기사였습니다. 다른 방송사에서는 낙동강 수질을 보여주는 뉴스가 있었습니다. 70여종의 물고기가 서식하던 낙동강의 어느 포구에 최상위 포식자인 강준치나 배스같은 물고기만 녹조에 지쳐서 띄엄띄엄 걸린다는 겁니다.

 

사실 제게는 낙동강에 대한 특별한 기억들이 있습니다. 고등학교 다니던 시절, 제가 좋아했고, 또 자주 갔던 곳이 낙동강 하구언의 갈대밭이었습니다. 부마 고속도로 쪽으로 다리를 건너서 하구언까지를 걷고 또 걸어서 다시 다리를 건너오는 것을 좋아했었습니다. 푸른 강물이 출렁이면서 바다로 흐르는 것을 보면 무엇인가 든든하고 넉넉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제가 공군 장교로 군복무를 할 때 낙동강 옆 김해평야에 있던 샛별교회라는, 전도사가 없었던 작은 교회를 3년간 섬겼었습니다. 부마 고속도로에서 내려서 제가 분위기 잡으면서 걸었던 강둑을 따라서 가다가 맥도마을이라는 동네로 들어서면 교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20년 전 그때에도 농공업수를 확보하기 위해서 낙동강 하구언을 설치한 것 때문에 논란이 많았었습니다. 낙동강 하구를 막아서 농공업용수를 확보하는 것은 좋지만, 물길을 막으면 수질 오염이 발생한다는 이유로 논란이 많았었습니다. 그런데, 몇 년 전에는 4대강 사업을 통해서 아예 전국적으로 모든 물길을 막아버리는 바람에 지금은 식수조차 위협을 받는 지경에 이른 것 같습니다. 강은 물이 흘러야 강입니다. 흐르지 않는 모든 강은 오염됩니다. 흐르는 강이 들판에 생명을 공급합니다. 흐르지 않는 강은 함께 죽어갈 뿐입니다.

 

1. 내게도 복을 주소서!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눌 말씀은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5:7)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선포하신 8복 가운데 다섯 번째 복입니다.

 

저는 요즘 8복에 대한 말씀을 준비하면서 계속 이 찬양을 불렀었습니다.(사진1) 나도 모르게 흥얼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이 찬양의 가사에 문제가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 찬양의 가사라고 해야... 성경 말씀을 그대로 옮긴 것이어서 별 문제가 없지 않을까... 생각할 수 있는데, 마지막이 문제입니다.

 

내게도 주소서... 내가 복을 받기 원하네... 오 내 주여, 주소서!”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물론 이 부분의 가사를 예수님께서 전하셨던 8복을, 심령이 가난하고, 애통하고, 온유하고, 의에 주리고 목마르고, 긍휼히 여기고, 마음이 청결하고, 화평케 하고, 의를 위해 핍박을 받고...., 이런 복을 내게도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하고 묵상해봐도... 8복의 내용과 내게도 주소서 내가 복을 받기 원하네 오 내 주여, 주소서의 가사와는 잘 맞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지금 전하시는 여덟 가지 복은 세상이 추구하던 복과는 전혀 다른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고민할 긍휼히 여기는 자가 누리는 복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긍휼히 여기거나 혹은 긍휼히 여김을 받는 것이 정말 세상 사람들이 소원하는 복일까요? 긍휼’(mercy)히 여김 - 불쌍하게 여기거나 불쌍히 여김을 받는 것... 이것이 복이 될 수 있을까요?

 

2. 긍휼 - 누구를, 누구에게서

 

먼저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5:7)라는 문장에는 생략된 부분이 있습니다. 앞부분에는 누구를이 생략되어 있습니다. 뒷부분에는 누구로부터가 생략되었습니다. “.........를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로부터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라는 문장이 되어야 합니다. , 그러면 여러분이 이 빈 칸을 채워보시겠습니까? 누구를 긍휼히 여기면, 누구로부터 긍휼히 여김을 받을까요?

 

이 말씀이 성도와 교회에 주신 말씀이라고 보면, 우리가 긍휼히 여겨야 하는 대상은 분명합니다. 이웃입니다. 사람들입니다. 믿지 않아서 불쌍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고, 삶의 진리를 몰라서 불쌍한 사람들을 진리로 인도해야 합니다. 물질의 불평등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야 하고, 본인의 선택과 결정이 아닌 삶의 결과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위로해야 합니다. 병들고 아픈 사람들을 치료하는 일에 동참해야 합니다. 우리의 긍휼을 필요로 하는 많은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는 것이 성도와 교회의 의무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그렇게 했을 때 복 있는 사람이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긍휼이 우리를 기다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긍휼하심은 우리가 이웃에 대해 보여줄 수 있는 긍휼과 비교할 수 없기 크고 높고 깊고 넓습니다. 따라서 이웃을 긍휼히 여기는 사람은 참으로 복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3. 긍휼의 시작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을 보십시오. 본문 역시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과 우리의 이웃에 대한 긍휼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무엇인가 차이가 있습니다.

 

본문의 이야기는 3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부입니다. 임금에게 일만 달란트의 빚을 진 신하가 등장합니다. 회계할 때가 되어서 임금은 그에게 빚을 갚을 것을 명령합니다. 그는 갚을 능력이 없습니다. 그가 엎드려 빕니다. 임금은 그를 불쌍히 여깁니다.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18:27)라고 했습니다. 긍휼의 시작입니다. 긍휼은 그 신하에게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임금에게서 시작되었습니다. 이야기는 2부로 넘어갑니다. 그가 동료를 만납니다. 그의 동료는 그에게서 백 데나리온을 빌린 적이 있습니다. 그 신하는 동료가 빚을 갚지 못하자 그 빚을 갚을 때까지 그를 가둬버렸습니다. 3부로 넘어갑니다. 그것을 본 다른 동료들이 임금에게 그 사실을 알립니다. 임금은 진노합니다.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18:33) 그를 그 빚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35절에 보시면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용서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긍휼히 여기고 용서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가 임금으로부터 먼저 그 모든 것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결국 비유에게 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으로부터 긍휼히 여김을 받은 성도와 교회는 이웃을 긍흘히 여겨야 하는 영적인 의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마 5:7의 팔복의 말씀과 본문 마 18장의 말씀을 함께 생각하시면서 다음의 질문들에 대답해 보시기 바랍니다.

 

1) 긍휼의 출발은 하나님입니까? 우리들입니까?

2) 우리에게 긍휼은 의무입니까? 선택입니까?

3) 우리가 긍휼의 의무에 순종한 결과는 무엇입니까?

4) 긍휼의 마지막은 하나님입니까? 우리들입니까?

 

4. 긍휼이 흐르는 물길

 

저는 예수님께서 팔복의 말씀을 통해서 긍휼을 으로 말씀하신 것이 의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우리의 살림이 어렵고 생활이 팍팍할 때 서로에게 자비로운 마음, 긍휼의 마음을 나누기가 힘든 것 같습니다. 나도 이렇게 힘이 든데... 다른 사람에게 보여줄 수 있는 자비와 긍휼이 어디 있겠나.... 우리는 쉽게 이런 논리에 빠집니다. 2000년 전 예수님 당시에 유대 사회가 그랬습니다. 각박하고 메말랐습니다. 오랜 식민지의 역사로 그들의 마음과 관계와 삶이 다 메말라버렸습니다. 서로를 정죄하고 손가락질했습니다. 사람을 돌로 쳐서 죽이는 공개 사형이 허용되던 시절이었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향한 강퍅하고 거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시절에 사람들의 마른 심령을 어루만지시면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3:16)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너희들은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과 자비와 긍휼을 입은 자녀들이다. 하나님은 그 증거로 나를 너희들을 위해 보내셨다. 하나님은 너희를 사랑하신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사랑을 깨닫고 믿는 성도들에게 권면하십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5:7)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는 사람이 복이 있다. 그 사랑으로 서로를 섬기는 사람이 복이 있다. 너희가 서로를 불쌍히 여기고 서로를 긍휼히 여기면 복이 있다. 하나님이 너희를 더 사랑하시고 더 불쌍히 여기시고 더 큰 긍휼을 베풀어주실 것이다.”

 

왜 예수님은 이것을 명령하지 않으시고 으로 설명하셨을까요? 당시 유대사회가 이것을 자신이 먼저 실천할 용기와 믿음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나도 죽겠는데, 내가 먼저 다른 사람에게 긍휼을...? 내가 손해를 보라고....? 내가 희생당하라고....? 내가 바보가 되라고....?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용서에 대해 물었던 질문에는 이런 의도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일흔 번에 일곱 번이라도 자비와 긍휼을 베풀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우리의 삶에 겸손과 순종으로 깊은 물길을 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긍휼의 강물이 나에게서 막히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나를 통해서 이웃에게 전해지고, 그 마지막을 하나님께서 마치도록 해야 합니다. 나에게서 그 은혜가 단절되지 않아야 합니다. 긍휼히 여겨야 합니다.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사랑으로 대해야 합니다. 섬겨야 합니다. 내가 낮아져야 하고 희생해야 합니다. 그들이 내게 먼저 하지 않는 일을 내가 왜 먼저 해야 합니까? 우리가 오히려 배반했을 때에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먼저 섬기셨기 때문입니다. 긍휼을 우리가 시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시작하셨고, 우리를 통해서 세상으로 흘러가도록 계획하셨고, 우리의 형제와 이웃이 세상이 하나님의 긍휼을 우리를 통해서 경험할 때.... 하나님은 더 큰 긍휼을 우리들에게 허락하십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가 복이 있는 이유는 감당할 수 없는 더 큰 긍휼을 경험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막혀 있는 강물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막힌 강은... 썩게 되고, 물고기도 사람도 살수 없는 죽음의 웅덩이가 될 뿐입니다.

 

성도 여러분! 요즘 많이 힘이 드시죠? 누군가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내 사정을 알아주고, 나를 이해해주고, 괜찮다... 잘하고 있다... 격려하고 품어주면 좋겠지요. 저 역시 그렇습니다. 우리는 모두 이해받고 사랑받고 인정받고 칭찬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잘 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다. 내가 너희를 불쌍히 여기고 내가 너희를 긍휼히 여긴다.” 우리가 주님께 빚진 사랑과 은혜를 먼저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주님께 탕감 받은 일만 달란트를 먼저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그 사랑과 은혜와 긍휼하심에 집중할 때 비로소 나 자신과 서로에 대해 긍휼과 사랑의 의무를 다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긍휼의 깊은 강이 되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세상으로 전달하는 아름다운 물길이 될 것입니다. 먼저 긍휼히 여기는 성도와 교회가 복이 있습니다. 그 물길 끝에 하나님의 더 큰 긍휼이 우리를 기다리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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