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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평하게 하는 사람 이응도 목사 2016-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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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8. 28.

 

* 본 문 : 마태복음 523-26절 말씀

* 제 목 : 화평하게 하는 사람

19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을 대표하는 중량급 권투선수가 있었습니다. IBFWBA에서 챔피언을 지낸 박종팔 선수(사진1)입니다. 1977년에 프로 선수로 데뷔하여 1988년에 은퇴하기까지 46(39KO) 11무효 5패를 기록했습니다. 동양 선수로는 드물게 화끈한 KO 펀치를 가지고 있었고, 다양한 기교보다는 우직하게 밀고 들어가서 치고받는 게임을 즐겨했습니다. 그런데 2003, 그가 은퇴한지 15년 만에 갑자기 경기를 하게 됩니다. 상대는 자신의 절친한 친구였던 이효필 선수’(사진2)였습니다. 이효필은 한 때 권투선수였지만 당시에는 인기가 없었던 종합격투기로 전향해서 선수생활을 하다가 무명으로 은퇴한 후 종합 격투기의 프로모터가 되었습니다. 이효필은 새로 시작한 자신의 종합 격투기 사업에 큰 붐을 일으키고 싶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절친한 친구인 박종팔에게 찾아간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거듭 거절하는 박종팔에게 이효필은 거액의 계약금을 제시했습니다. 두 사람은 각자의 룰, 박종팔은 권투로, 이효필은 입식타격으로 싸우기로 했습니다.

 

사실 두 사람은 동향 친구로 나이가 같습니다. 이미 아마추어 때 두 번이나 경기했습니다. 모두 이효필이 이겼습니다. 하지만 가난했던 박종팔은 헝그리 정신으로 프로 복싱에 데뷔하여 승승장구했습니다. 이효필은 프로에 데뷔하지 못했습니다. 박종팔이 한국을 대표하는 인기있는 선수가 되고 챔피언이 되었을 때 그를 두 번이나 이겼던 이효필은 복잡한 마음으로 그를 우러러 봐야 했습니다. 내가 더 잘할 수 있고, 나의 영광을 빼앗긴 것 같았습니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당장 링에 올라가서 죽여 버리고 싶었다고 했습니다.

드디어 경기가 열렸습니다. 결과는 어이없고도 처참했습니다. 이효필이 박종팔의 다리를 계속 공격했고, 박종팔은 결국 다리가 부러지고 말았습니다.(시합-사진3) 넘어진 박종팔을 이효필은 소위 사커킥으로 다시 공격했고, ‘스텝핑이라는 방식으로 밟기도 했습니다. 그때 이효필은 가죽으로 된 부츠를 신고 있었습니다. 모두가 반칙에 계약 위반입니다. 이효필은 약속했던 거액의 계약금도 주지 않았습니다. 이후 두 사람은 서로를 비난하며 살았습니다. 박종팔은 자신을 흥행에 이용한 친구의 배신에 대해, 이효필은 세상의 비난과 친구가 여전히 자신을 무시했다며 분노하고 원망했습니다.

 

1. 화해 프로젝트

 

20135, 한국 교육방송에서 화해 프로젝트라는 것을 하면서 두 사람을 초청했습니다. 10년 만에 만난 그들을 중국의 몽골족이 사는 바딘지린 사막으로 보냈습니다.(사막-사진4) 아무도 없는 곳에서 두 사람이 여행을 하면서 오랫동안 묵은 이야기를 하고 쌓인 감정을 풀어보라는 의도였습니다. 모래 사막을 걸으며 이효필은 미안하다, 그만 화해하자고 제안합니다. 박종팔은 외면합니다. 진정성이 없다는 겁니다. 이전에도 흥행 때문에 자신을 이용했고, 반칙했고, 계약을 위반했고, 평생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고, 지금도 방송을 이용해서 자신을 압박한다고 생각합니다. 이효필은 박종팔이 이제 좀 잊고 묻어두고 남은 인생 서로 위로하면서 살면 될텐데 여전히 자신을 무시한다고 말합니다. 두 사람은 뚝 떨어져서 사막을 걸어갑니다.

 

프로그램이 끝나갑니다. 저렇게 싸우다가 끝나나 싶은 마지막에 두 사람은 후다닥 급한 화해를 합니다. “그래...그래... 알았다.”라고 말하며 악수하고 포옹합니다.(화해-사진 5) 다시 사막을 걸어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이 쓸쓸해 보였습니다. 그것은 프로그램을 위한 화해였지 참된 화해는 아니었습니다.(뒷모습-사진6) 서로에게 먼저 잘못을 인정하라고 강요하다가 결국 진정한 화해를 포기한 것입니다. 두 사람의 뒷모습이 오랫동안 제 기억에 남은 것은.... 우리들이 대부분 그렇게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2. 화해하지 못하는 이유

 

여러분 생각에 이 두 사람은 왜 제대로 된 화해를 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두 사람이 선 듯 화해하지 못하는 이유는 단순하고 분명합니다.(니가 먼저 동영상1) 간단하게 말하면 니가 먼저 하라는 것입니다. 프로그램에서계속 반복되는 이야기는 이것입니다. 이효필은 박종팔에게 이제 니가 먼저 상처를 잊고 마음을 열어달라고 말합니다. 박종팔은 이효필에게 니가 잘못을 먼저 인정하라고 말합니다. 이효필은 미안해...그런데 왜 그랬느냐하면 니가 내 자존심을 상하게 하고 무시했잖아... 라고 말합니다. 박종팔은 나는 너를 의식하지도 않고 살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이효필은 더 자존심이 상합니다. 내가 성공하는 너를 보면서 반드시 경기를 해서 링 위에서 내가 더 낫다는 것을 세상에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합니다. 박종팔은 분노합니다. 그러니까 니는 세상에 나쁜 놈이라고 욕을 합니다. 마음 속에 친구를 죽이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서 웃는 얼굴로 속였다고 말합니다. 이효필은 그러니까 이제 그만 싸우고 화해하자고 합니다. 박종팔은 화해를 하려면 니가 먼저 잘못을 인정하고 진솔하게 사과를 하라고 말합니다. 이효필은 내가 왜 그랬냐하면 니가 먼저 나를 무시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박종팔은 나는 너를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고 말하고, 이효필은 더 자존심이 상합니다. 계속 반복되고 또 반복됩니다.

 

우리는 대부분 그렇습니다. 내가 먼저 화해를 위해 수고할 일은 없습니다. 상대방이 먼저 화해의 문을 열어야 합니다. 상대방이 먼저 잘못을 시작했고, 나는 피해자이며 따라서 내가 먼저 사과할 일은 없습니다. 화해를 하려면 먼저 용서를 해야겠는데, 상대방은 도대체 용서 받을 자세가 되어 있지를 않습니다. 자기 잘못을 알지도 못할 뿐 아니라 뉘우치지도 않습니다. 그 두 사람은 그렇게 쳇바퀴를 돌고 있었습니다.

 

오늘 성경을 보면 한 사람이 성전에 올라갑니다. 그는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 갑니다. 예수님은 그의 발걸음을 멈추십니다. 그리고 물으십니다. 혹시 너는 네 형제 중 어떤 사람에게 원망들을 만한 상황 속에 있지 않느냐?” 생각해보니 있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기 전에 먼저 사람과의 화해를 해야 한다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25절에는 고발하는 사람에 대해 언급하십니다. 26절에는 화해하지 않는 것을 부채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본문에서 화해, 고발, 부채 등으로 우리의 관계를 설명하시면서 누구의 잘잘못을 가려서 말씀하고 있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누가 더 잘못했는지, 누가 법적인 책임을 져야 하는지, 누구에게 더 많은 책임이 있는지를 묻지 않으십니다. 다만 갈등과 불화 속에 있을 때에는 먼저 다가서서’ ‘먼저 마음을 열고’ ‘먼저 손을 내밀고’ ‘먼저 화평케 하라는 것입니다.

 

3. 화평케하는 일 - 복일까?

 

오늘은 8복 가운데서 7번째 복, 화평케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5:9)의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이 말씀을 생각하기 전에 먼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잘 생각해고 대답을 해 보십시오.

 

화평케 하는 일, 그 일에 헌신하는 일은 복이 맞습니까?

사과를 받는 사람이 복이 있습니까? 사과를 하는 사람이 복이 있습니까?

화해하자고 요청받는 사람이 복이 있습니까? 화해를 요청하는 사람이 복이 있습니까?

자신의 상처와 아픈 기억의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묻는 사람이 복이 있습니까?

다른 사람의 상처와 아픈 기억에 대해 책임을 지려고 하는 사람이 복이 있습니까?

화해를 위해 수고를 요청하는 사람이 복이 있습니까? 수고를 하는 사람이 복이 있습니까?

 

마지막으로 여러분께 하나만 더 묻습니다. 여러분은 화평케 하는 사람이 누리는 복을 지금 누리고 계십니까?

 

이 말씀을 가장 정확하게 실천하신 분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는 법, 하나님의 아들의 자격과 품격을 그대로 보여주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화평케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신 자신이 사람의 자리에 내려오셨고, 더 내려가셔서 십자가의 자리에서 죽임 당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품격은 높은 곳에서 존경과 영광을 받으며 다른 사람의 희생을 요구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보다 낮은 곳에 먼저 내려가서 섬기고 헌신하는 일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하나님의 아들은 또 있습니다. 많습니다. 어디에 말입니까? 저와 여러분입니다. 성도와 교회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면서 예수님의 형제가 되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의 아들로 살아가는 영광과 은혜를 얻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화평케하는 사역에 헌신하고 있습니까? 대충 포기하고 그래..그래... 그건 어려운 거야... 라면서 서로에게 등을 돌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4. 하나님의 아들이라 인정받는 삶

 

오늘 말씀에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영어 성경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Blessed are the peacemakers, for they will be called sons of God.” 하나님의 아들로 불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불린다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다라는 사실과는 조금 다릅니다. 군인이라는 것과 군인답다는 말은 다릅니다. 남자다라는 말과 남자답다는 말이 다릅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불린다는 것은 세상이 그의 삶의 모습을 보고 그를 하나님의 아들로 받아들이고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peacemaker, 즉 화평케하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세상이 그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할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박종팔와 이효필을 보십시오. 누가 먼저 화평케하는 일을 할까요? 프로그램을 보면 먼 중국의 바단지린 사막을 걷고 오체투지를 하고 자기 입장을 설명하고 또 설명해도... 먼저 화평케 하는 일을 하지는 않습니다. 말할수록 자기 입장만 강화되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수록 상처는 깊어집니다. 서로 자기 입장을 이해하고 수용하라고 강요합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적어도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된 우리들에 어떻게 할지를 모르고 방황하고 헤맬까봐 먼저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서 아들된 모습으로, 하나님의 아들의 품격으로 이 세상을 살고 싶으면... 나를 따르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예수님은 먼저 그의 삶의 자리로 가서 나의 고통과 눈물과 아픔을 말하기 전에 그의 마음을 위로하면서 화평케하는 일에 헌신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 5:9절의 말씀은 이렇게 읽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 사람은 복이 있다. 왜냐하면 그는 세상을 화평케 하는 사명을 감당하기 때문이다.” 먼저 화평을 만드는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다운 사람입니다. 내가 더 깊은 고통을 당했고 더 많은 눈물을 흘렸다고, 상대방이 나에게 더 악한 일을 했다고, 사과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고, 문제를 일으킨 사람은 바로 당신이라고... 원망하고 손가락질 하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세상의 모든 연약함과 부족함을 지고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를 집니다. 내가 먼저 이해하고 포용하고 용서하고 헌신합니다. 화평케하는 사역이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시작되었고, 하나님의 아들들의 삶에서 실현됩니다. 그래서 복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아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서로에게서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을 확인하는 복되고 자랑스러운 초대교회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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