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예배

  • 홈 >
  • 예배와 말씀 >
  • 주일 예배
주일 예배
"의, 천국의 사람들" na kim 2016-09-05
  • 추천 0
  • 댓글 0
  • 조회 995

http://chodaepa.onmam.com/bbs/bbsView/82/5169025

 

 

2016. 9. 4.

 

* 본 문 : 베드로전서 313-17절 말씀

* 제 목 : , 천국의 사람들

 

John Piper라는 목사님(사진1)이 있습니다. 현대 미국 교회에 가장 큰 영적 영향력을 미치는 목회자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이분의 책 중에 'Bloodlines'(사진2)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한국에서 차별 없는 복음으로 번역되었습니다.

 

이 책은 마틴 루터 킹’(사진3) 목사의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그는 미국 뿐 아니라 인류의 역사에 한 획을 그은 목회자입니다. 굳이 그를 민권운동가라고 설명하지 않은 이유는 그의 흑인민권운동의 동기가 이념적이거나 정치적이기보다 지극히 신앙적이면서 목회적이었기 때문입니다.

 

1955121, 미국 앨라배마 주 몽고메리의 버스에서 작은 소동이 있었습니다. 당시 버스는 앞 몇 칸은 백인들의 자리, 뒤쪽은 흑인들의 자리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그 날, 로자 파크스라는 흑인 여성이 흑인 자리 중에 맨 앞에 앉았는데, 백인들이 자리가 모자라서 그녀에게 양보를 요구했습니다. 그녀가 거절했습니다. 백인 승객들과 운전사는 그녀를 경찰에 넘겼습니다. 법원은 그녀에게 벌금형을 내렸습니다. 흑인 사회는 크게 분노합니다. 실은 이런 일이 종종 있었기 때문입니다. 흑인들을 중심으로 124일부터 버스 승차거부운동이 시작됩니다. 125, 이후에 이 운동을 어떻게 계속할 것인지를 논의하면서 흑인 교회들이 적극 참여하게 되고, 26세의 한 젊은 목회자가 회장으로 선출됩니다. 그가 바로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입니다. 모두가 부담스러워하는 자리였고, 그가 원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상황이 그를 흑인 민권 운동의 선두에 세웠고 그는 묵묵히 그 책임을 감당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백인 교회 지도자들이 더 인내하면서 기다려야 한다고 권할 때 이렇게 대답합니다.

 

인종차별의 독화살을 맞아 보지 않은 사람들의 입에서는 기다리라는 말이 쉽게 나올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당신들도 흑인이라는 사실 때문에 밤낮없이 불안과 초조에 떨어야 한다면, 언제 어떤 일이 닥칠지 몰라 늘 가시방석에 앉은 듯 살아가야 한다면, 안으로 두려움과 밖으로 억울함에 시달려야 한다면, ‘보잘것없는 존재라는 자괴감과 늘 싸워야 한다면, 그렇다면 왜 우리가 기다리기 힘든지 알 것입니다. 인내의 잔도 때가 되면 넘쳐흐릅니다... 부디 우리의 정당하고 불가피한 조바심을 당신들이 이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자신을 극단주의자라고 비난하는 백인 목회자들에게 이렇게 대답합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고, 너희를 미워하는 자에게 선을 행하고, 너희를 악하게 이용하고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라하신 예수는 사랑의 극단주의자가 아니었습니까?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라고 외친 아모스 선지자는 정의의 극단주의자가 아니었습니까?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라고 했던 바울은 복음의 극단주의자가 아니었습니까? “저는 여기 서 있습니다. 이렇게 밖에 할 수 없습니다.”라고 고백했던 마틴 루터도 개혁의 극단주의자가 아니었습니까? “내 양심을 팔아먹느니 차라리 죽는 날까지 감옥에 있겠다고 말했던 존 번연도 신앙의 극단주의자였습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우리가 극단주의자가 될 것인가의 여부가 아니라 어떤 부류의 극단주의자가 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증오의 극단주의자와 사랑의 극단주의자, 그 중 어느 쪽이 되겠습니까?

 

1. 의에 헌신하는 사람들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연설에서 인용하고 있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예수님, 아모스 선지자, 사도 바울, 마틴 루터, 존 번연, 그리고 작은 소도시에 부임한 26세의 목회자... 그들은 모두 자기 안이 있는 믿음을 따라 그들의 시대가 성도와 교회에 주는 책임을 감당했습니다. 가시와 십자가가 앞에 놓였지만 묵묵히 옳은 길을 걸어갔습니다. 그들이 그 길을 물러서지 않고 갈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어떤 사람들, 어떤 집단에게는 지극히 정치적인 선택으로 보일 수 있었지만 그들 자신에게 있어서 선택의 출발점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가 자신으로부터 출발한 것이라면 포기하고 배신할 수 있었겠지만, 복음이 / 신앙이 / 예수 그리스도가 그들로 하여금 옳은 길, 고난의 길, 공평과 정의에 헌신하는 삶을 살도록 인도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흔들림 없이 그 길을 걸어갔습니다.

 

저는 바로 그런 면에서 저희 교단이 좋습니다. 사실 현재 우리 교회가 속한 재미 한인 예수교 장로회 고신교단의 현실은 대단하지 않습니다. 모 교단인 한국 고신 교단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제가 이 교단에 가치를 두는 이유가 있습니다.

 

일본 제국주의 말기 문화 통치를 통한 황국 신민화 정책이 교회까지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예배하기 전에 일본의 천황에게 절을 하게 했고, 목회자가 되기 전에 미소기 바라이라는 일본 신사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도록 강요했습니다. 97%이상의 조선 교회가 굴복했습니다. 오히려 어떤 교회, 목회자들은 이 일에 앞장서서 일본의 대동아 전쟁에 교회의 종탑까지 헌납하고 헌금을 모아서 바치기도 했습니다. 그때 오직 신앙의 순결을 지키겠다는 의지로 한국 교회의 역사적 책무를 감당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주장은 단순했습니다. 우리는 일본의 신사에 절할 수 없다! 우리는 일본 신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가장 신앙적이었지만 가장 정치적인 선언이었습니다. 많은 성도들과 목회자들이 감옥에 갇히고 고문당하고 순교했습니다. 해방 후 그들이 출옥하여 세운 교단이 바로 이 교단입니다. 비록 요즘은 역사의식이 부족해서 우왕좌왕하고 있기는 하지만 언젠가 신앙의 선배들이 물려준 영적 전통을 따라 교회와 사회를 하나님의 뜻 가운데 인도하는 사명을 감당하리라 믿습니다.

 

2. 예수님이 전하시는 복

 

우리는 예수님께서 전하신 8복에 대한 말씀을 나누면서 계속 우리가 전통적으로 가지고 있던 복에 대한 개념과의 차이를 발견합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5:10)는 말씀을 보십시오. , 이 짧은 한 구절의 말씀에서 은 과연 어느 부분에 적용될까요? ‘에 복이 있을까요? ‘박해에 복이 있을까요? ‘천국에 복이 있는 것일까요? 당연히 복은 천국에 적용됩니다. 따라서 저는 이 말씀을 이렇게 이해하고 싶습니다. 천국을 소유한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저들은 기꺼이 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합니다.”

 

오늘 읽은 본문의 말씀도 이것을 말합니다. 14절을 보시면 의를 위해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라고 선언합니다. 이 말씀에서 란 과연 무엇일까요? 13절을 보시면 그것은 구체적으로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15절을 보시면 내면의 동기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들은 15절에 분명한 소망을 가지고 삽니다. 16절을 보시면 선한 양심을 가져야 합니다. 17절에는 다시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을 수도 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의인의 삶은 다음의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3. 의인의 삶

 

1) 내면의 동기가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과 8복을 비교하면 의를 위해 고난을 받는 삶에 가장 중요한 원칙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벧전 3:15에서는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라고 했고, 5:11에서는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라고 했습니다. ‘성도와 교회가 의롭게 산다고 할 때 그 내면의 동기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공평과 정의를 주장할 때 그러하고 희생과 헌신을 결단할 때 그러합니다. 보이는 것은 같지만 내면의 동기는 다를 수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1:15)라고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한 때 정의로운 삶을 결단하지만 변절합니다. 포기하고 좌절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면의 동기가 자신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열심과 헌신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쉽게 지친다면, 낙심한다면...우리의 내면의 동기에 대한 성찰이 필요합니다.

 

2) 구체적인 삶의 증거가 필요합니다.

 

두 번째 의를 위해 고난을 받는 삶은 구체적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급진적인 생각이나 정치적 지향성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선한 양심과 선행의 구체적인 열매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고전 4:20)라고 했습니다.

 

3) 지향이 분명합니다.

 

세 번째 의를 위해 고난 받는 삶에는 분명한 지향이 있습니다. 이것을 15절에는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라는 말로 설명합니다. 이 땅에 사는 우리가 왜 이 땅의 상식과 질서를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을 결단하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까? 왜 당신은 이익 없는 일에 헌신합니까? 왜 당신은 기꺼이 손해를 감당합니까? 왜 눈 앞에 보이는 핍박 앞에서도 진리를 지킵니까? 왜 당신은 먼저 겸손하고 먼저 희생하고 먼저 헌신합니까? 우리 안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사람들에게 우리 삶의 지향을 분명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다스리는 하나님의 나라의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4) 지불하는 대가가 있습니다.

 

마지막 하나 중요한 원리가 있습니다. 선을 행하며 사는 일, 의에 헌신하는 삶에는 지불해야 하는 대가가 있습니다. 이것이 복이기 때문입니다. 복을 얻기 위해서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은 하나님께서 구약의 시대에 제사를 가르치시면서 반드시 제물을 드리게 했던 이유와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짐승이나 곡물이 필요하신 것은 아니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제사의 형식과 원리를 가르치신 이유는 희생과 헌신이 없는 예배가 없음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예수를 왕으로 섬기며 선한 양심을 따라 의로운 삶을 살며 우리 안에 있는 소망을 지향하는 사람들이 불의하고 부패한 세상을 살면서 아무런 희생도, 손해도, 눈물도, 고통도 지불하지 않겠다는 것은 거짓된 믿음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조금의 불편함도, 손해도 보지 않겠다는 것 또한 거짓된 신앙생활입니다. 의로운 삶에는 지불해야 할 대가가 있습니다. 희생이 없는 제사는 없었습니다. 헌신이 없는 예배/신앙생활 또한 없습니다.

 

4. 예수 믿는 불의한 사람들?

 

제가 8복을 설교하면서 소개했던 뉴욕 리디머 교회의 팀 켈러 목사(사진 4)를 기억하십니까? 오늘 설교의 서두에 소개한 존 파이퍼 목사님의 좋은 친구입니다. 존 파이퍼 목사는 차별없는 복음의 원고를 마친 후 제일 먼저 친구인 팀 켈러 목사에게 보냅니다. 팀 켈러는 그 책을 읽고 추천사를 씁니다. 그는 자신의 첫 목회지에서 있었던 일을 소개합니다. 1970년대 초반 그는 남부의 어느 작은 타운에서 목회를 시작했습니다. 그 타운에는 세금으로 운영되는 공설 수영장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공설이었지만 흑인 출입 금지였습니다. 백인만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법정에서 모든 주민, 모든 인종에게 수영장을 개방해야 한다는 판결이 내려졌습니다. 그러자 백인들은 투표로 공설 수영장을 폐쇄해버립니다. 대신 그들은 사설로 백인 전용 수용장과 클럽을 열었고, 유색인종의 출입을 금지시켰습니다. 아직 젊었던 팀 켈러 목사는 여전히 자주 수영장에 갔고,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즐겼습니다. 새수영장이 가진 복합적인 의미에 대해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바로 이 부분에 주목합니다. 그는 자신에게 질문합니다. “나는, 모든 인종과 민족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 나는 인종을 차별하는 수영장을 자유롭게 사용하면서 왜 아무런 문제를 느끼지 못했을까...?” 왜 그럴까요? 차별의 대상이 되지 않는 백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팀 켈러 목사의 책에서 자신이 했던 고백과 같은 고백을 발견합니다.

 

나는 예수 믿는 인종차별주의자였다. 그것은 죄였다.”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21세기를 살면서 세상의 불의와 악함을 느끼지 못하고 산다면, 하나님 나라의 정의와 공평의 실현을 위해서 선한 양심과 행위로 헌신하는 일이 없다면, 예수 믿는 다는 이유로 더 이상 박해받지 않는 세상에 살면서 예수님처럼 능동적으로 십자가를 지고 헌신하고 희생하며 수고하고 눈물 흘리는 삶이 없다면.... 왜 그럴까요? 불의한 세상을 사는 내가 왜 아무런 문제의식도, 불편함도 느끼지 못하는 것일까요? 왜 여전히 인종차별이 존재하고, 총기 사고로 일 년에 수만명이 죽고, 배가 가라앉아서 수 백명의 자녀들이 죽고, 국토를 흐르는 강물이 녹조라떼로 변해도 왜 아무런 불편도, 문제의식도 느끼지 못하는 것일까요? 팀 켈러 목사가, 존 파이퍼 목사가 고백합니다. 내가 예수 믿는 불의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불의한 세상이 나를 전혀 불편해하지 않고, 불의한 세상에서 내가 아무런 불편함을 느끼지 않고 그저 하루하루 주어진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적어도 우리는 예수님이 전하시는 천국 시민이 누리는 아름다운 복과 관계없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말미암아, 복음으로 말미암아, 의와 진리로 말미암아, 내 안에 허락하신 믿음과 소망으로 말미암아 눈물과 고난과 땀과 희생과 헌신이 있는 삶을 기대합니다. 우리가 천국의 백성이기 때문이며, 그것이 우리에게 허락된 복이기 때문입니다.

 

 

 

   

    추천

댓글 0

자유게시판
번호 제목 작성자 등록일 추천 조회
이전글 복음을 향한 용기 na kim 2016.09.12 0 895
다음글 화평하게 하는 사람 na kim 2016.08.29 0 12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