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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그곳에 계신 주님 na kim 2016-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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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9. 25.

 

* 본 문 : 26:31-32

* 제 목 : 먼저 그곳에 계신 주님

 

저는 어려서부터 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어릴 때 어른들이 종종 이런 노래로 저를 놀리기도 했습니다. “앞니 빠진 개오지 우물가에 가지마라 붕어새끼 놀린단다...” 뭐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는데 저를 놀리는 것은 분명하다고 생각해서 기분 나빠했었습니다. 아직도 기억이 나는 장면이 하나 있습니다. 친척분 중에서 소위 야매로.... 자격증 없이 이를 치료하는 분이 있었습니다. 10살 쯤 되던 추석 무렵이었습니다. 경남 충무였습니다. 기분 좋게 거제도 외갓집에 다녀오는 길에 잠시 갈 곳이 있다고 했습니다. 기와집에 제법 넓은 마당을 지나서 대청마루가 있었습니다. 안경을 끼고 아버지보다 좀 나이도 있으시고 근엄하게 보이는 분이 저희를 맞아주셨습니다. 인사를 하고 치과 의자 비슷한 곳에 누웠습니다. 입을 벌리라고 하시더니 돋보기로 가까이 들여다보셨습니다. 명절이 막 지난 터라 그 친척 어르신의 입에서 약간의 술냄새가 났습니다. 그리고 정말 다시는 기억하기 싫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소위 뻰찌라 부르는 도구와 비슷하게 생긴 것을 입안에 집어넣더니 달가락달그락 입 안에서 소리를 내면서 연달아 2-3개의 이를 뽑아냈습니다.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뒤통수에 경련이 일어나는 느낌입니다.

 

부끄럽게도 저는 그 이후에 거의 15년 동안 치과병원 찾지 않았습니다. 뭐 건강한 이가 나왔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실은 대학원 1학년 때 어금니가 썩고 썩어서 도저히 치과병원에 가지 않으면 안되는 지경이 되어서야 다시 찾아갔습니다. 왜냐구요? 너무 무서워서요... 쇠가 입 안에 들어와서 달그락 거리는 느낌... 술냄새가 나고 눈동자가 그리 맑아 보이지 않는 어르신이 돋보기를 들이대고 내 입안을 들여다보는 느낌... 공포 그 자체였습니다.

 

얼마 전에 치과 병원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성일이 승하의 치과예약을 확인하는 전화였습니다. 성일이의 표정이 어두워졌고, 승하는 dentist라는 말만 듣고도 닭똥 같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실은 한 1년 전 쯤에 승하도 정말 고통스럽게 이를 치료한 적이 있거든요. 이번 금요일에 치과병원에 가야하는데 아마도 한바탕 전쟁을 치러야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는 요즘 치과dp 잘 갑니다. 왜 제가 그렇게 싫어하던 치과에 잘 갈까요? 안가면 더 나빠지니까요... 제가 건강해지기 위해서는 지금 치료를 받는 것이 훨씬 나으니까요. 그런데 승하는 왜 울까요? 나중에 건강한 치아를 가지는 일보다 지금 아픈 것이 무섭고 싫으니까요. 제가 15년 동안 치과에 가지 않으려고 했던 것과 같은 이유가 아니겠습니까?

 

1. 복음 앞에서 흔들리다.

 

살다보니 그렇습니다. 분명 유익하고 좋은 것인데, 바르고 옳은 것인데 동의가 되지 않거나 선뜻 실천하지 못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능동적인 선택을 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옳은 일들이 나의 소원과 대립하거나, 많이 유익하지만 작은 고통이 따르거나, 반드시 필요한데 극복해야 할 장벽을 할 때가 그렇습니다. 두려움이 앞서고 염려에 넘어집니다. 욕심이 앞서고 우리의 필요와 욕심에 넘어집니다. 사실 종종 이런 경험을 하게 되고 그럴 때마다 자신에 대해 실망하기도 합니다.

 

아마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랬을 겁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다 복음입니다. 하나님이자 구원자이신 예수님의 말씀인데 어찌 복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 중에서 자신들의 소원과 대립되는 말씀들이 있습니다. 자신의 만족과 충돌하는 하나님 나라의 질서가 있습니다. 도저히 따르기 힘든 말씀이 있습니다. 좀 봐주시면 좋겠는데 예수님의 복음은 늘 래디컬합니다. 예수님은 복음을 바르게 전하시는 일에 타협이 없으십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지난 10주간 고민했던 8복의 말씀이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복이 있다 말씀하시는데 그 말씀을 듣는 청중들은, 제자들은... 나는 그런 복이 싫을 수도 있습니다. 의를 위해 핍박을 당하는 사람보다 의는 없어도 안락한 삶을 사는 것을 원할 수도 있습니다. 애통하는 사람이 받는 복보다 평탄하고 슬픔 없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예수님께서 천국 시민의 삶을 말씀하시면서 8복의 삶을 복이라 선언하셨습니다.

 

2. 십자가를 복되다 선언하시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에게 질문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이것은 복음인지 아닌지, 여러분께... 그리고 이 말씀을 듣는 제자들에게 복음이었는지를 말씀해주십시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 그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26:31-32)의 말씀은 예수님의 수난예고와 관련이 있습니다. 수난예고란 마태복음에서 4번에 걸쳐서 선포되는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에 대한 선언입니다. 얼마나 중요한 말씀이면 4번이나 반복할까요?

 

첫 번째 예고는 마 16:21에 나옵니다. 베드로가 마 16:16에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는 고백을 하고 예수님은 교회를 세우신다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21절에서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16:21)라고 했습니다. 두 번째 수난예고는 마 17:22-23에 나옵니다. 갈릴리에 모일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매우 근심하더라”(17:22-23) 세 번째는 20장에 등장합니다.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어 그를 조롱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나 제삼일에 살아나리라”(20:18-19) 그리고 네 번째가 262, 오늘 본문 말씀의 배경이 됩니다.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이라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리라 하시더라”(26:2)

 

, 여러분... 이 말씀들은 복음입니까? 여러분과 제게 복음입니까? ,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를 지신다는 말씀, 참으로 감당할 수 없는 은혜요 복음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에게도 이 말씀들은 복음일까요? 그들은 이 말씀을 복음으로 받을까요?

 

3. “주여, 그리 마옵소서!”

 

아마도 제자들에게 이 말씀들은 복음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아니 복음인데 그들이 복음으로 받지 않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첫 번째 수난 예고를 하셨을 때, 조금 전에 참으로 아름다운 신앙을 고백했던 베드로는 예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16:22) 예수님은 베드로를 크게 꾸짖으십니다. 사탄이라고까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고 책망하시면서 “....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16:2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두 번째 수난을 예고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성경을 다시 보실까요? 갈릴리에 모일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매우 근심하더라”(17:22-23) 제자들의 반응은 무엇입니까? 그들은 근심합니다. 두렵습니다. 세 번째 수난 예고의 상황은 웃픕니다. 웃프다... 요즘 사용하는 웃기고도 슬프다는 뜻입니다.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어 그를 조롱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나 제삼일에 살아나리라”(20:18-19) 무겁게 침묵이 흐릅니다. 그런데 그때... 한 여인이 등장합니다. 세베대의 아내 살로메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입니다. 그녀가 예수님께 부탁합니다. 예수님이 어떻게든 이제 떠나는 것을 알겠는데... 나중에 주님의 나라가 회복되면 자신의 두 아들을 예수님의 보좌의 좌우에 앉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다른 제자들은 이 말을 듣고 분노합니다. 마지막 수난 예고의 상황도 슬픕니다.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이라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리라 하시더라”(26:2) 한 여인이 나타나서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붓습니다. 제자들은 왜 아까운 것을 낭비하느냐고 꾸짖습니다. 예수님은 그 일을 예수님의 죽음을 준비하는 일로 해석하십니다.

 

, 예수님의 수난 예고는 그들에게 복음이었을까요?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들에게 복음일까요? ! 너무도 당연히 복음입니다. 그런데 도대체 왜 그들은, 예수님의 택함받은 제자들은, 하나님이 아들들은, 교회의 반석이 되고 기둥이 될 그들은 그 복음을 말리고 거부하고 외면하고 비난하고 분노하는 것일까요? 왜 제자인 그들이 복음을 외면할까요? 왜 택함을 받은 그들이 예수를 십자가, 그 무시무시한 형틀에 버려두고 도망갈까요? 왜 교회의 기둥이 되어야 할 그들이 십자가를 부정할까요? 왜 그들은 두려워하고 염려할까요? 복음을 선택하지 못하는 걸까요?

4. “그러나 너희들보다 먼저...”

 

제자들이 왜 십자가를 복음으로 받지 못했을까요? 다양한 해석이 가능합니다. 그들의 욕심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고, 예수님의 소원과 다른 소원을 품었기 때문이고, 두려움과 염려 때문이고, 연약하고 어리석었고, 무엇보다 믿음이 적은 자들이었기 때문일 겁니다. 수천, 수만 가지 이유가 있을 겁니다. 그 모든 이유들은 자신들에게는 너무도 옳고 맞을 겁니다. 하지만 저는 오늘 그 이유의 타당성 혹은 부당성을 검토하지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저는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주목하면 좋겠습니다. 본문을 다시 한번 읽어보실까요?

 

그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26:31-32)

 

저는 사실 이 말씀에 너무 위로가 되었습니다. 정말 위로가 되었습니다. 두 가지 면에서 이 말씀에서 주님의 위로와 긍휼을 느꼈습니다

 

첫째는 주님께서 복음에 타협이 없으셨습니다. 제자들을 붙들기 위해서는 십자가를 지시는 일에 적당한 타협이 필요했는지도 모릅니다. 제자들을 충분히 이해시키는 과정이 필요했는지도 모릅니다. 제자들이 받아들일 때까지 기다려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타협하지 않습니다. 복음과 비복음에 대한 경계가 분명하셨습니다. ...그럴 때가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자녀를 키우다보면 자녀가 너무 떼를 쓸 때 해로운 줄 알면서도 받아들이기도 합니다. 원칙을 무너뜨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결국은 해로울 때가 많습니다. 제자들이 받아들이지 못하고 거부하고 외면해도 예수님은 복음을 복음으로 선포하십니다.

 

두 번째 위로와 긍휼을 느끼는 것은 그러나....” 이후의 말씀에 있습니다. 그러나부터 다시 한번 읽어봅시다. ... 그렇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의 배신을 아십니다. 그들이 능동적으로 예수님을 버리는 선택을 할 것을 아십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허용하십니다. 다만 주님은 그들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그들의 연약함을 아십니다. 그들이 비겁하게 숨고 도망하고 결국 고향으로 돌아갈 것도 아십니다. 그래서 그들을 책망하시고 벌하시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은 그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십니다. 그곳에서 그들을 영접하십니다. 다시 만나주십니다. 그들의 연약함을 그대로 받으십니다. 그들의 복음 앞에서의 비복음적인 태도도 용납하십니다. 다시 그들의 손을 잡고 무릎에 새힘을 공급하십니다. 그들을 부등켜안고 다독이며 말씀하십니다.

 

그래... 내가 안다... 너희들의 두려움과 염려를 안다... 너희들의 약함과 악함도 안다... 너희들은 다시 갈릴리로, 나를 만나기 전으로, 복음을 경험하기 전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래서 내가 너희들에게로 간다. 너희들의 가장 부끄러운 삶의 자리로 간다. 그곳에서 다시 너희를 만난다. 너희와 함께 다시 교회를 시작한다. 나는 살아서 갈릴리로 간다. 너희를 다시 만나고 너희와 다시 한걸음부터 시작한다.”

 

성도 여러분! 저는 부끄럽게도 어른이 되고 난 다음에도 한동안 치과에 가지 못했습니다. 제가 좀 더 일찍 치과 병원에 갔더라면 더 건강한 치아를 가질 수 있었을 겁니다. 승하는 아마도 치과 병원에 씩씩하게 가기까지 시간이 좀 더 걸릴 것 같습니다. 그리고 여러분! 여러분에게는, 저에게는, 우리 초대교회와 성도들에게는 얼마나 시간이 더 필요할까요? 복음을 담대하게 삶으로 받아들이고 복음으로 살기까지 말입니다. 십자가를 복음으로 받아들이고 실천하며 살기까지 말입니다. 예수님의 수난 예고 앞에 주여, 그리하지 마옵소서!”라며 말리는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16:2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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