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하는 이유(1) | na kim | 2016-10-1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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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10. 9. * 본 문 : 이사야 43장 21절 말씀 * 제 목 : 예배 - 1. 예배하는 이유 윌리엄 골딩이라는 소설가를 아십니까? ‘파리 대왕’(Lord of Flies)이라는 작품을 쓴 사람입니다. 이 작품으로 노벨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인간의 야만성과 폭력성에 실망하게 됩니다. 자신 또한 군인이 되어 전쟁을 경험해보니 인류가 서로를 죽여서 얻을 수 있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 왜 이렇게 서로를 죽고 죽이는가? 고민합니다. 그가 찾은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인간의 본성으로서의 종교성입니다. 파리대왕이라는 작품은 영국 정부가 핵전쟁의 위험 앞에서 5세에서 12세까지 25명의 소년을 선발하여 안전한 지역으로 옮기는 작전을 실행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불행하게도 소년들을 태운 비행기는 공격을 받아 추락하고 소년들은 무인도에 상륙하게 됩니다. 소년들은 처음에는 서로 돕고 협력했지만 곧 의견이 대립되고 분열이 생깁니다. 그리고 이 분열을 부추기고 극대화시키는 장치로 작가는 사람의 내면에 있는 종교성을 사용합니다. 소년들은 섬 한 가운데에서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존재를 만납니다. 실은 죽은 낙하산병의 시신이 낙하산에 휩싸여 있는 것이었는데, 소년들은 그것을 정체를 알 수 없는 짐승으로 생각하고 큰 두려움에 빠집니다. 그리고 그 두려움의 대상에게 멧돼지를 잡아 머리를 바치는 제사행위를 합니다. 바로 이 장면에서 윌리엄 골딩은 중요한 문제를 제기합니다. 인간의 종교성은 환경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고자 하는 본성과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은 죽은 시체에 불과한데, 두려움에 자극된 소년들은 제물과 함께 노래하고 춤추는 제사의식을 행합니다. 마치 제물로 드려진 멧돼지의 머리에 웽웽거리며 날고 있는 파리처럼 두려움에 떨면서 제사의식에 취해가는 소년들을 묘사했습니다. 1. 종교적 본성 대학에 다닐 때 파리대왕이라는 작품을 접하고 실은 많이 놀랐습니다. 소년들이 제한된 시간과 공간 속에서 만들어내는 이야기들을 통해서 인간의 종교적인 본성을 부정할 수 없도록 풍자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모든 인류는 ‘종교’를 발전시켜왔습니다. 때로는 두려움에, 때로는 염려에, 때로는 욕심과 욕망에 자극되어 현저하게 왜곡되기도 했지만 ‘예배의 대상’에 대한 관심과 ‘예배적 존재’로서의 자신들의 삶에 대한 관심을 지속해왔습니다. 성경도 이것을 인정합니다. 사도행전 17장 16-31절을 보면 사도 바울이 아덴, 즉 아테네를 방문합니다. 아테네... 우리가 너무 익숙하게 들어온 도시 아닙니까? ‘스파르타’와 대조되는 철학과 예술과 문화의 중심지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곳에 가보니 아... 기가 막힙니다. “온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행 17:16)라고 했습니다. 18절에 보시면 우리가 교과서에서 봤던 스토아 학파와 에피큐로스 학파의 학자들이 등장합니다. 바울과 논쟁합니다. 바울이 그들을 모아놓고 설교합니다. “내가 여러분을 만나보니까 여러분에게 모든 일에 종교성이 정말 많습니다. 어떻게 ‘알지 못하는 신에게’까지 제사를 드립니까? 오늘 내가 여러분에게 바로 그 알지 못하는 신, 하지만 참 신을 증거하려고 합니다.”(행 17:22-23) 당시에 이 두 철학은 가장 발전되고 고양된 지식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철학을 하는 학자들이 두려움에 빠져 있습니다. 그들의 지식과 학문이 미처 발견하지 못한 그 무엇인가가 있을 것이라 생각한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그들이 섬기는 신을 위한 신전을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알지 못하는 신들’을 위한 제단까지 만들어서 제사를 지냈습니다. 아무리 그 시대를 대표하는 지식과 지혜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인간의 본성 속에 숨어 있는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참된 신앙을 발견하지 못한 그 시대정신을 대표했던 철학자들은 종교적으로는 파리대왕에 나오는 12세 소년들의 수준에 불과하다는 말입니다. 2. 두려움 정치 철학에 가까운 유교가 왜 제사의식을 행할까요? 결국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한 것입니다. 불교는 알고 보면 종교보다는 생활 철학에 가깝습니다. 삶을 고통으로 놓고 그 모든 고통으로부터 해방된 상태를 지향합니다. 그런데 그런 불교에도 각종 토속신을 모시는 제사의식이 있습니다. 역시 통제되지 않는 삶의 환경들에 대한 두려움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에게 있는 신앙은 어떤가요? 우리가 믿는 하나님, 우리에게 있는 신앙의 가장 기본적인 내면의 동기는 무엇일까요? 거짓 종교, 사이비 신앙, 혹은 왜곡된 권력과 권위는 사람의 두려움과 염려를 자극합니다. 그 위에 견고한 그들의 이익을 위한 집을 짓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우리를 위협하거나 겁박하지 않습니다. “두려워 말라!”라고 말합니다. 제가 직접 새어보지는 못했는데, 365번 등장한다고 하더군요. 염려하지 말라와 근심하지 말라는 말씀까지 하면 더 많을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복음은 평안의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6장 15절에서도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을 것을 권면하면서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를 통해서 이 땅에 허락하신 복음은 염려와 두려움을 자극하는 말씀이 아니라 이 땅 위에 하나님 나라의 평안을 증거하는 복음입니다. 3. 예배 따라서 여러분, 예배란 무엇일까요?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세계와 존재와 통제되지 않는 삶의 현실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만들어낸 자기 위안의 장치일까요? 성경은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예배의 아주 간단한 원칙 몇 가지를 말씀드릴까 합니다. 1) 예배는 하나님이 만드셨습니다. 먼저 예배는 누가 만들었을까요? 출 32장에 보면 두려움에 빠진 사람들의 예배가 있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고 내려오지를 않습니다. 백성들은 점점 불안하고 또 두렵습니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그 무엇인가... 자신들이 마음을 안정시키고 소원을 만족시키는 도구를 원했습니다. 그들은 강력하게 대제사장 아론에게 요청합니다. “우리를 인도할 신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출 32:1) 아론은 그들을 이기지 못해서 금으로 송아지를 만들었고, 이스라엘은 그 앞에서 화목제를 드리고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어놀았다고 했습니다. 누가 이 예배를 만들었습니까? 두려움과 염려에 빠진 사람들이 만들었습니다. 파리대왕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예배와 관계없습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이 허락하셨습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사 43:21)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예배적 존재로 지었습니다. 신학자 앨버트 토저(A.W.Tozer)는 “인간은 예배를 드리기 위해 지음을 받았다”라고 말했습니다. 예배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가치 있는 행위이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하나님과 가장 친근하게 사귈 수 있는 방법입니다.
2) 우리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과 사귑니다. 조금 전에 드린 말씀을 다시 기억해보시기 바랍니다. 예배를 어떻게 정의했습니까? “하나님과 가장 친근하게 사귈 수 있는 길이 바로 예배입니다.” 잘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는 각각 다른 방식으로 사람들을 사귑니다. 젊은 남녀가 사귐을 가진다면... 서로 사랑을 하는 것이지요. 어떻게 사랑할까요? 데이트하고 손잡고 걷고... 그럴 겁니다. 남자들이 서로 사귐을 가진다면 우정입니다. 남자들끼리 데이트하고 스킨쉽하고... 하나요? 아닙니다. 방법이 다릅니다. 부모와 자녀도 사귐을 가질 수 있을까요? 당연합니다. 우정으로 만나나요? 아닙니다. 부모와 자녀는 효도로, 부모의 사랑으로 서로 사귑니다. 방법이 다릅니다. 교회에서 성도와 성도 또한 영적인 사귐이 있습니다. 서로 섬기고 헌신합니다. 하나님과 교회는, 하나님과 성도는 어떻게 사귈까요? 하나님이 우리와 사귀시는 방식은 십자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사귀는 방식은 예배입니다. 그 예배는 물론 단순하지 않습니다. 주일 11시에 드리는 예배를 포함하는 우리의 마음과 삶의 진정한 예배를 말합니다. 성도는 예배로 하나님과의 사귐에 들어갑니다. 예배는 그래서 매우 중요합니다. 데이트를 잘못하는 남녀가 사랑을 이루기 어렵듯이 예배를 잘못하는 성도와 교회가 하나님을 잘 섬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3) 예배의 열매는 성도의 거룩함입니다. 그렇다면 예배의 결과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진다”(딤전 4:5)고 했습니다. 요즘 매일 성경, 새벽기도 말씀은 레위기를 묵상하고 있습니다. 레위기는 성막을 봉헌하는 것으로 끝났던 출애굽기를 이어서 그 성막에서 과연 어떻게 하나님을 예배할 것인지를 가르치는 성경입니다. 레위기에서 가장 중요한 한 단어를 꼽으라면 무엇일까요? 바로 ‘거룩’입니다. 반복되고 또 반복됩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향한 제사의 결과, 하나님을 향한 예배의 열매는 성도의 거룩함입니다. “너희는 나에게 거룩할지어다 이는 나 여호와가 거룩하고 내가 또 너희를 나의 소유로 삼으려고 너희를 만민 중에서 구별하였음이니라”(레 20:26) 하나님이 거룩하시니 하나님을 예배하는 성도가 거룩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위해 우리를 예배하는 사람들로 구별하셨습니다. 4) 성도는 예배를 통해 삶의 평강을 얻습니다.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닮아가고 거룩함을 배우는 성도들이 삶에서 발견하는 또 하나의 열매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평안입니다. 기쁨입니다. 인생의 참된 맛입니다. 예수님과의 사귐에 이르렀던 사람들을 보십시오. 갈릴리 바다에서 예수님을 만났던 베드로와 형제들은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고 선언합니다. 그들은 배와 그물과 가족들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바다와 배가 있으면 삶이 안정될 것이라고 생각했고, 물고기를 많이 잡으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아니었습니다. 진리를 알고 예배하는 삶을 살아야 참된 평강과 기쁨이 있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삭개오도 그렇습니다. 같은 세리였던 마태도 그렇습니다. 수가성 우물가에서 평생 갈증나는 삶을 살았던 여인이 그렇습니다. 죽었다가 살아난 나사로와 누이들이 그렇습니다. 다메섹으로 핍박하러 가는 길에 예수님을 빛으로 만났던 사울이 그렇습니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과의 신적인 사귐을 통해 삶의 참된 평강과 기쁨을 회복했습니다. 성도는 예배를 통해 삶의 평강을 회복합니다. 이전에는 세상을 따르지 않으면 안될 것 같았습니다. 세상처럼 하지 않으며 불안했습니다. 그래서 금송아지를 찾고 돼지 머리를 걸고 두려움과 염려로 날마다 손을 비비며 살았습니다. 비난과 손가락질을 받아도 악착같이 돈을 모으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으로 살아보니... 전혀 다른 삶이 펼쳐집니다. 담대할 수 있습니다. 용기를 낼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살아도, 말씀대로 살아도, 십자가의 길을 걸어도 됩니다. 예배를 통해서 마음과 삶을 하나님께 맡기는 법을 알았습니다. 하나님과 사귀니까 세상이 우스워졌습니다. 두려움과 염려가 사라졌습니다. 우리가 주님과의 사귐에 성공했고, 그 사귐의 맛이 세상의 그 어떤 두려움도 넉넉히 이길 만큼 매력적이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사람은 죄를 짓고 두려움과 염려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두려움과 염려의 대상을 우상으로 섬기기도 하고, 스스로 다른 사람들의 염려가 되고 두려움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러나.... 그런 세상, 그런 삶을 살아갈 우리들을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구별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요 그 나라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십자가의 은혜로 우리와 사귐을 허락하셨습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예배, 즉 하나님과의 사귐을 통해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닮아가는 삶을 살아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시편 19편의 기자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시 19:14)라고 고백했습니다. 로마서에서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신앙을 전승한 선조들은 예배할 수 있는 자유를 빼앗기기 않기 위해 육신의 자유를 포기하기도 했습니다. 거짓된 것을 예배하지 않기 위해 생명을 내어놓기도 했습니다. 소망하건대, 사랑하는 우리 초대교회는 예배의 가치와 의미를 알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을 아름다움을 회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배를 통해 하나님과의 사귐에 성공하여 날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닮아가는 교회와 성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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