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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5.헌금의 원리(1) na kim 2016-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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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11. 06.

 

* 본 문 : 창세기 2820-22절 말씀

* 제 목 : 예배 - 5. 헌금의 원리(1)

 

저는 초등학교 시절에 부산 해운대에서 자랐습니다. 해운대를 생각하면 참 아름다운 추억이 많습니다만, 그 중 하나는 동이 트는 푸른 동해 바다에서 징소리와 함께 벌어지던 굿판에 대한 것입니다. 요즘은 가끔 영화에서나 보는 장면인데, 그 시절에는 자주 동백섬 한쪽 구석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 접신한 무당이 있고, 장구와 북과 징을 치는 박수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옆에는 간절한 모습으로 손을 모으는, 주로 여인들이 있습니다. 어린 마음에 다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뭔가 영적인 것이 있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한번은 호기심에... 몰래 굿판 가까이에 가서 무당이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엿들은 적이 있습니다. 아마도 아들이 멀리 원양어선을 타고 나갔다가 죽은 것 같았습니다. 대단하게 굿판을 벌리고 한참을 춤을 추던 무당이 갑자기 딱 멈추었습니다. 소복을 입고 울면서 손을 빌던 어머니 앞에 섰습니다. 컬컬한 아들의 목소리로 엄마...”하고 말했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의 이름을 부르며 통곡을 했습니다. 무당이 아들의 목소리로 몇 마디 했습니다. “엄마, 나는 잘 있으니까... 엄마도 밥 잘 먹고 건강하고 우리 애들 잘 보살펴주고....” 어머니는 아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주저앉았고, 무당은 다시 춤을 추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사실 저의 관심을 가장 끌었던 것은 제사에 사용된 각종 음식들이었습니다. 파도에 밀려서 나오는 일들이 많았습니다. 윗부분이 잘려나간... 저는 그때까지 단 한 번도 저 혼자서 하나를 독차지하고 먹어본 적이 없었던 큰 사과와 배가 둥둥 떠다녔습니다. 너무 아까워서... 과일을 주워볼까 유혹을 당한 적도 있었습니다. 정말 대단한 정성이라고 생각했습니다.

 

1. 심청전, 제물을 드리는 이유

 

왜 사람들은 그 귀한 것을 바다에 던졌을까요? 왜 사람들은, 그렇게 먹고 살기가 힘들다고 하는 사람들은 무당에게 있는 돈을 다 바치고 굿을 했을까요?

 

실제로 동서양을 막론하고 모든 종교에 공통적인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신과 사람 사이를 잇는 제사의식입니다. 형식을 달리할 뿐이지 모든 종교에는 제사의식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제사에는 반드시 제물이 있습니다. 심청이가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서 공양미 300석에 자신을 판다는 이야기가 있지 않습니까? 이 이야기는 꽤 재미있습니다. 심봉사가 눈을 뜨기를 원합니다. 스님을 만났는데 말인즉슨 공양미 300석을 바치면 눈을 뜨게 해준다는 겁니다. 심봉사가 고민하는 것을 본 효녀 심청은 자신을 뱃사람들에게 300석에 팝니다. 그리고 성난 바다를 잠재우기 위해 용왕에게 바쳐집니다. 바다의 신인 용왕은 그녀의 착한 마음에 감동을 해서 연꽃에 실어 육지로 보내고, 왕이 그 모습을 발견하고 심청을 왕비로 삼습니다. 심청은 아버지를 보기 위해 전국에 있던 맹인들을 초대해서 잔치를 벌입니다. 늘 심청을 자기 때문에 잃은 죄책감으로 살던 심봉사는 그곳에서 심청의 목소리를 듣고 반가운 마음에 눈을 번쩍 뜨게 됩니다. 두 사람은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 (결국 제물이 워킹한 것이지요.)

 

이 전래동화에는 두 번의 제물이 등장합니다. 한 제물은 자신의 소원을 이루기 위한 수단입니다. 눈을 뜨고 싶으면 공양미를 내라는 것입니다. 다른 한 제물은 신의 분노를 잠재우기 위해 드립니다. 순결한 여인을 바칠테니 바다를 다스리는 신이 우리에게 분노를 드러내지 말아달라고 빕니다. 하나는 소원에 근거한다면 다른 하나는 두려움이 근거한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이 두 가지는 하나로 만납니다. 사람의 욕심입니다. 심봉사는 눈을 뜨고, 어부들은 고기를 많이 잡고 싶습니다. 그들은 제물을 바치고 이익을 얻습니다.

심청전에서 보이는 두 번의 제사와 제물은 보편적인 종교의 제사의 본질을 잘 보여줍니다. 제사에 사용되는 제물의 성격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는 제가 어릴 적 해운대에서 봤던 제사의식과 드려졌던 제물과 심청전의 그것이 전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2. 우리의 제사와 제물

 

오늘은 예배에 대해서 다섯 번째 말씀으로 예배에서 빠질 수 없는 헌금에 대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말씀을 준비하다보니 양이 좀 많아서요, 오늘은 소위 제물이라는 개념의 본질과 십일조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고 다음에는 헌금을 하는 우리들의 신앙적인 자세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성경에서 최조의 제사가 언제 소개됩니까? , 가인과 아벨의 제사입니다. 그들이 드린 제사는 동기는 무엇이었을까요? 심청전과 같이 소원과 두려움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의 본질이었을까요? 11:4와 요1 3:12를 통해서 그들의 제사에 대한 성경의 해석을 봅시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11:4)

 

가인 같이 하지 말라 그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떤 이유로 죽였느냐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의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라”(1 3:12)

 

11장에서 좋은 예배는 믿음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믿음으로 드리는 예배의 예물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십니다. 그런데 요1 3장에 보니까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의롭게 사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보니까 좋은 예배, 좋은 제물은 믿음과 예배와 예물과 삶이 일치해야 합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를 받으신 이유는 믿음이 있었고, 좋은 예배를 드렸고, 믿음에 합당한 예물을 드렸고, 선하고 의로운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가인은 그렇다면 예배하지 않았나요? 예물을 드리지 않았나요? 하나님을 믿지 않았을까요? 아닙니다. 다만 그의 예배는 일치함이 없었습니다. 믿음으로 드리는 예배와 예물은 하나님으로 시작해서 하나님에게서 끝납니다. 그런데 가인의 예배는 자신에게서 시작해서 하나님을 거쳐서 자신에게 돌아오는 예배였습니다. 예배의 주인이 자신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것을 받지 않으실 때 분노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 뜻이 이루어지기를 소원하고 내가 복 받기를 소원하는 예배와 예물은 인간 중심의 종교의 본질에 해당되는 것이며, 하나님을 용왕의 수준에서 이해하는 것입니다.

 

3. 헌금의 원리

 

그렇다면 우리가 드려야 할 예배와 예물은 어떤 것입니까? 성도에게 예배는 매우 중요하고, 모든 예배에는 헌신이 함께 있어야 합니다. 즉 제물이 없는 제사가 없는 것처럼 하나님께 드리는 헌신이 없는 예배 또한 없습니다. 하나님을 용왕의 수준에서 이해한다면, 내가 소원이 없으면 제사를 드리지 않아도 되고 내 삶에 문제가 없으면 예배할 필요가 없습니다. 소원이 생기고 필요가 생기면 적절한 제물을 드려서 신의 마음을 사고 복을 받으면 됩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제사와 제물의 원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은 십일조의 원리를 잠시 말씀드려볼까요? 한번쯤은 궁금하지 않으셨나요? 십일조... 드리지 않으면 벌을 받을까요? 간단하게 요약해서 그 원리를 설명드리려고 합니다.

 

십일조에 대해서는 몇가지 다른 주장이 있습니다. 1) 구약에 속한 것이므로 현대 그리스도인에게는 유효하지 않다. 2) 신약은 구약 율법의 완성이므로 온전한 십일조를 하는 것이 옳다. 여러분은 이 두 가지 중 어느 쪽이 옳다고 생각하십니까?

 

원래 십일조는 조세의 성격이 강합니다. 예를 들어서 성경에서 가장 먼저 십일조의 개념이 등장하는 것은 아브람이 살렘왕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치는 장면입니다. 창세기 14장에서 아브람은 전쟁에서 승리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인 멜기세덱을 만납니다. 그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아브람을 축복하고 아브람은 그에게 십일조를 바칩니다. 그리고 모세의 시대에 이것은 제도가 됩니다. 이것을 지키는가 하는 것이 이스라엘의 신앙의 척도가 되기도 합니다. 이스라엘과 유다가 멸망하던 시기에 선지서에서 십일조를 강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물질에 집착하다보니 십일조를 하지 않게 되고, 대신 그들에게 복을 약속하는 이방의 신들에게 제물을 바치게 됩니다. 이 말씀이 중요합니다. 그들은 물질에 집착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십일조가 아깝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다른 신들에게 심지어 아들까지 바칩니다. 그들의 삶을 뒤흔드는 욕심과 야심을 성취하기 위해서 그들은 제사를 드리고 그들에게 있는 모든 것을 바쳐서 예물을 드립니다. 어리석지 않습니까? 왜 하나님이 아닌 우상에게 그들은 제사하고 예물을 바쳤을까요?

 

여기서 십일조에 대한 세 번째 의미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브람과 모세의 십일조 사이에 딱 한번 또 다른 십일조의 개념이 등장합니다. 바로 야곱의 십일조입니다. 그는 돌단을 쌓아서 하나님께 예배합니다. 드리는 제물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다만 그는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를 고백합니다. 하나님, 나를 지켜주십시오. 지금은 내가 아버지의 집을 떠나지만 나를 인도하셔서 이곳으로 무사히 돌아오게 해주십시오.” 그리고 그는 세 가지 서원을 합니다. “이곳은 하나님의 전이 되고, 여호와는 나의 하나님이 되고, 내게 주신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바치겠습니다.” 여기서 야곱의 십일조는 조세적 성격이 아니라 관계에 대한 고백적 성격이 드러납니다.

 

4. 관계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며

 

십일조에 대한 세 번째 개념은 구약에서 가르친 십일조의 정신을 지키되, 신약의 교회가 고백한 헌금의 원리를 함께 생각하는 것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구약에서의 십일조는 조세 제도의 성격이 강했습니다. 신앙을 기초로 하는 신정국가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야곱의 십일조에서 그 이유가 밝혀집니다. 야곱의 십일조는 신앙고백적입니다. 그것은 주종관계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내 모든 삶이 당신 안에 있고, 나는 당신을 주인으로 섬깁니다.”라는 관계에 대한 신앙의 고백입니다.

 

신약의 교회가 십일조를 지켰는지는 나타나있지 않습니다. 다만 신약의 교회는 관계에 대한 신앙을 정확하게 고백했습니다. 모든 물질의 주인은 하나님이며 내 삶도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런데 행 434절을 보면 초대교회에는 핍절한 사람이 없다고 했습니다. 32절에 보면 물질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열심히 허락하신 은혜를 따라서 노동하고 생산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리고 가정의 필요에 따라 나눠주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좋은 예가 바나바였고, 나쁜 예가 아나니아와 삽비라였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은 두 가지 관계에 대한 신앙의 고백입니다. 첫째는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입니다. 둘째는 물질과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하나님은 나에 대해서 주인이며, 나의 노동으로 생산된 물질에 대해서도 주인입니다.

 

오늘날 십일조가 필요하냐고 묻는다면 저는 그렇다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십일조를 드리면 복을, 드리지 않으면 벌을 받느냐고 물으면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오늘날 십일조는 신앙고백적인 헌신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현대사회에서 우리가 물질에 대해 하나님께 얼마나 헌신하고 어떻게 드려야 하는지 기본적인 기준을 십일조가 제시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내 삶의 십일조는 십의 일을 비워서 내 삶 전체가 하나님의 것임을 고백함과 동시에 나의 빈 곳을 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통로이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십일조는...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은, 사랑의 고백이 강요의 결과가 아닌 것처럼 신앙의 고백 또한 강요할 수 없으므로, 자발적이어야 하고 기쁨과 감사로 드려야 합니다. 은혜가 있고 더 큰 감사가 시작되는 지점이 될 것입니다.

 

더 많은 재물의 주인이 되려고 발버둥치지만 결국 재물이 인생의 주인이 되고 삶과 죽음의 이유가 되는 시대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왕이시며, 재물이 아닌 하나님의 뜻과 말씀으로 사는 교회가 되고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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