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오신다(1) | na kim | 2016-12-12 | |||
|
|||||
2016. 12. 10. * 본 문 : 요한복음 1장 14절 말씀 * 제 목 : 예수님이 오신다. (1) 여러분, 이 그림을 잘 아시죠? ‘모나리자의 미소’(그림 1)라는 그림입니다. 최근에 우연히 이 그림에 대한 해설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 그림의 신비는 두 가지 포인트에 있다고 하더군요. 하나는 입가에 머무는 신비한 미소, 다른 하나는 그림을 보는 사람을 향한 알 수 없는 눈빛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가능하게 한 것이 바로 ‘스푸마토’라는 방식의 유화기법이라고 했습니다. '스푸마토'(Spumato)라는 말은 이탈리아어로 '흐릿한' 혹은'자욱한'이란 뜻으로 밝은 톤에서 어두운 톤으로, 어두운 톤에서 밝은 톤으로 변화시키면서 경계선을 분명하지 않게 처리하는 기법을 말 합니다. 이 기법은 다빈치에 의해서 완성되었고, 이 기법으로 그린 그림 중에서 가장 잘 표현된 작품이 바로 ‘모나리자의 미소’라는 것입니다. 그는 "경계선은 사물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지 않은 부분이다....... 화가들이여! 뚜렷한 선으로 대상의 경계를 짓지 말라"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다시 이 그림을 보실까요? 아....정말 선이 하나도 없습니다. 다만 아주 자연스럽게 명암으로 표현되어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스푸마토 기법 자체가 모날리자의 미소를 유명하게 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이 기법을 사용한 결과가 그림을 빛나게 했습니다. 그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그림을 각각 다른 각도에서 봐도 늘 모나리자가 나를 보는듯한 착각을 일으킨다고 합니다. 그런데 각도를 옮길 때마다 입술의 모양이 바뀌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했습니다. 나를 계속 바라보면서 은은한 미소를 보낸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스푸카토 기법의 힘인데요, 눈동자와 입술에 경계를 표현하지 않았기 때문에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른 미소를 발견할 수 있고, 어느 각도에서 봐도 모나리자의 시선을 느낀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말하기를, 모나리자의 시선에서 나를 늘 지켜보시는 하나님의 눈빛을, 모나리자의 입가의 미소에서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자비를 느낀다고 하더군요. 흠... 그래서 다시 모나리자를 보니까 또 그런 것 같기도 했습니다. 가끔 미국 식당에 가면 눈동자가 움직이는 그림을 걸어놓은 곳이 있더군요. 좀 징그럽습니다. 그런데 모나리자는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그 목사님의 감상평대로라면 나의 어떤 형편과 상황에도 나를 지켜보시며 미소를 잃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그 그림을 통해서 표현하고 느낀다는 것이지요. 그림을 잘 아신다는 분이 그렇다는데 굳이 반박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이런 의문이 들었습니다. 여러분, 한번 대답해보시겠습니까? 만일 우리가 늘 주님의 시선을 느낀다면, 우리의 일상의 삶에 대해 하나님의 개입을 느낀다면, 우리를 향해 보여주시는 주님의 미소를 느낀다면....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좋습니까? 불편하십니까? 모나리자가 아니라 주님이라면 말입니다. 1. 부르짖는 소리 출애굽기 2장 마지막을 펼쳐보십시오. 23-25절을 봅시다.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된지라 하나님이 그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의 언약을 기억하사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을 돌보셨고 하나님이 그들을 기억하셨더라”(출 2:23-25) 이 말씀에서 이스라엘의 상황을 간단하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고된 노동’입니다. 그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탄식하며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계실까요? 성경을 보면 자주 등장하는 문장이 있습니다.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누가 한 말일까요?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시편에도 이런 내용의 탄식이 자주 등장합니다. “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시 10:1)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시 13:1)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하지 아니하오나 응답하지 아니하시나이다”(시 22:1-2) “여호와여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나의 심정을 헤아려 주소서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소서 내가 주께 기도하나이다”(시 55:1-2) 시인들은 지금 하나님께 불평하고 항의합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보고 계십니까? 아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이해하십니까? 역시 아닙니다. 그들은 강력하게 하나님의 개입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자, 여러분! 여러분도 이렇게 간절하게 하나님의 간섭하심을 갈망한 적이 있으십니까? 언제,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그 결과는 어땠습니까? 2. 떠난 적이 없으신 하나님 우리가 조금 전에 읽은 출애굽기 2장은 시편의 시인들의 부르짖음과 우리들의 불만에 대한 대답을 주고 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찾고 부르짖을 때에 하나님은 시편의 시인들이 부르짖는 것처럼 그들을 외면하고 떠나고 버리셨던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의 역사를 보면 됩니다. 그들은 척박한 광야에서 목축을 하다가 비옥한 애굽 지역으로 피난 온 부족이었습니다. 애굽의 고센 땅에 정착해서 살았고 번성했습니다. 바로 그때부터 그들이 하나님을 잊기 시작합니다. 애굽에서의 400년은 영적인 암흑기였습니다. 삶이 풍요하다보니 하나님이 필요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급속히 불어나는 이스라엘의 수에 불안을 느낀 애굽의 왕이 그들을 탄압하기 시작합니다. 그들의 노동력으로 피라미드를 건축하고 성을 건축합니다. 놀라운 것은 아무리 애굽이 이스라엘을 핍박해도 점점 더 수가 불어납니다. 산파들을 고용하여 남자 아이가 태어나면 죽이라고 명령해도 수가 줄어들지 않습니다. 애굽이 감당할 수 없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분명히 그들은 부르짖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외면하신다고, 잊으셨냐고 원망합니다. 그런데 과연 하나님은 그들을 떠나셨습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지 않으셨다면 이스라엘이 애굽의 압제 속에서 그렇게 큰 민족으로 성장할 수 있었을까요? 압박과 설움 속에서도 멸망하지 않고 이제 당당하게 가나안으로 들어가서 하나님의 택하신 나라를 건설할 수 있는 큰 민족이 될 수 있었을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출3장에서 그들을 외면하시고 버리셨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을 준비하고 훈련시키셨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서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애굽에서 쫒겨나서 미디안 광야에서 목자로 살던 모세를 다시 부르시고 그에게 사명과 능력을 주시고 애굽으로 들어가게 하십니다. 그들은 삶으로 하나님을 떠났고, 마음에 그 이름을 잊었지만 하나님은 늘 그들을 지켜보시며 그들에게 약속하신 구원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시편의 시인들의 탄식과 원망에 대해 하나님은 같은 음성으로 대답하십니다. “나는 너희를 떠난 적이 없고 너희에게서 마음과 시선을 거둔 적이 없다.” 3. 하나님, 사람의 역사가 되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들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을까요? 때로 그 사람들은 이스라엘과 함께 살던 사람 중에 한 사람이었습니다. 기드온이나 다윗왕 같은 사람이 그렇습니다. 때로 그 사람은 태어나기 전부터 준비되기도 합니다. 삼손이나 세례요한이 그렇습니다. 때로 그 사람은 오랫동안 선지자로 훈련받습니다. 사무엘이나 엘리사나 예레미야가 그들입니다. 하나님은 늘 준비된 소수를 사용하셔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십니다. 그리고 그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인간의 역사에 대한 개입을 예표합니다. 사람은 스스로의 역사를 망치지만 하나님은 인간의 역사에 적절하게 개입하셔서 위로하시고 고치시고 세우십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서 사람의 역사를 주장하시고 스스로 사람의 역사가 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역사를 늘 지켜보고 계시고, 인도하시고, 함께 하신다는 말 - 한마디로 하면 무엇일까요? 예, 그것이 바로 ‘임마누엘’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하나님의 시선을 느끼지 못하고 음성을 듣지 못했을까요? 왜 그들은 하나님의 개입을 보지 못했을까요? 문제는 하나님이 아닌 그들에게 있습니다. 저는 설교의 시작에서 모나리자의 미소를 소개하고 여러분께 물었습니다. 어느 각도에서 봐도 나를 보는 것 같은 그림을 통해서 어떤 목사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느낀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다시 대답해 봅시다. 우리가 만일 하나님의 시선을 언제 어디서나 무엇을 할 때나 느낀다면... 행복하십니까? 좋으십니까? 아니면 때로 불편하고 불안하십니까? 아마도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시선이 좀 불편했던 모양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외면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에게 귀를 닫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 마음의 문을 열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그들의 삶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고통의 시간이 시작됩니다. 그들의 삶을 애굽이 주장하고, 바벨론이 짓밟고, 로마가 칼질을 할 때에야 비로소 깨닫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그들의 시선과 하나님의 시선이 만나는 때가 바로 이때입니다. 그들이 세상과 자신의 욕심을 향했던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볼 때.... 그들을 향해 단 한 번도 눈을 떼지 않으시고 마음을 거두지 않으셨던 하나님께 그들이 마음의 문을 열 때.... 비로소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주장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다시 이스라엘의 역사가 되고, 하나님이 사람의 역사가 되었습니다.
4. 말씀이 육신이 되다.
다시 묻습니다. 이 말을 4자로 줄이면 무엇이라 했습니까? 예, 바로 ‘임마누엘’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말씀을 오랜 역사 가운데 수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서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때가 찹니다. 사람의 때가 아닌 하나님의 때가 됩니다. 사람이 준비한 때가 아닌 하나님이 준비하신 때입니다. 사람의 방법이 아닌 하나님의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직접 사람의 역사로 내려오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완전한 임마누엘이 성취됩니다. 성경은 요한복음에서 이 사건을 설명하기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라고 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사람과 완벽하게 함께 하신다는 말씀이요, 임마누엘이 완전히 실현되었다는 말씀입니다. 나를 지켜보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나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나를 이해하고 느끼시는 하나님의 수준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가 되셨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우리 중 하나가 되어 함께하신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놀랍고 감사한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문제는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이스라엘이 함께 하시는 하나님 소외시켰던 것처럼, 하나님의 시선을 외면했던 것처럼, 하나님을 마음으로부터 떠났던 것처럼, 하나님의 사람들을 핍박하고 죽였던 것처럼... 인류가 임마누엘이신 예수님이 우리의 삶이 되고 역사가 되는 것을 거절했다는데 있습니다. 그 거절의 상징은 바로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은 늘 우리와 함께 하셨지만 우리가 고개를 들어서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았기 때문에.... 죄와 악의 어둠의 역사를 걷어내기 위해 하나님이 직접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임마누엘로 내려오셨는데, 사람들은 그것이 싫었습니다. 여전히 내 뜻이 이루어지는 삶을 원했고, 나의 욕심과 야망이 성취되는 삶을 원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나라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시선을 주님과 맞추는 순간 예수님을 따라야 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십자가의 예수... 그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는 오늘날의 교회와 성도 또한 그들과 다르지 않다는데 있습니다. 나를 지켜보시는 하나님,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나의 일상이 되고 나의 역사가 되고 나의 삶이 되시는 하나님을... 기쁨과 감사로 만나지 않는다는데 있습니다. 과거 이스라엘이 임마누엘이신 하나님의 시선을 부담스러워했던 것처럼, 2000년 전 임마누엘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던 것처럼, 오늘날 그 예수를 믿는 우리 또한 임마누엘로 살지는 않는다는데 있습니다. 2016년의 성탄절, 예수님이 우리에게 찾아오셨음을 감사하고 기념하는 절기를 앞두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그 의미를 우리의 믿음과 삶에서 돌이킬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삶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에서 예수가 내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어야 이 썩어가는 세상의 곳곳에서 예수가 일할 것입니다. 그런 교회와 성도들이 있어야 세상의 빛이 되고 소금이 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마음의 문을 여십시오. 예수가 오십니다. 눈을 드십시오. 예수님의 시선을 만날 것입니다. 말씀이 우리의 삶이 되고, 우리의 삶에서 말씀이 읽힐 수 있도록 믿음과 용기를 발휘합시다. 말씀의 위로와 능력이 우리를 통해서 이 세상에 증거될 것입니다. 눈을 드십시오.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십니다.
|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