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오신다(2) | na kim | 2016-12-1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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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12. 18. * 본 문 : 누가복음 2장 34-35절 말씀 * 제 목 : 예수님이 오신다.(2) ‘타카타’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한 때 한국에서도 황우석 박사 때문에 큰 관심을 모았던 유전자 조작 혹은 선택을 모티브로 한 영화입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가진 꿈에 비해서 능력이 너무 초라합니다. 우주과학을 선도하는 탐험가요 과학자가 되고 싶은데 현실은 건강도 부실하고 지능이 뛰어나지도 않습니다. 그에게 복음처럼 다가온 것이 바로 ‘유전자 선택과 결합’에 의한 새로운 인간 창조였습니다. 사실 영화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상상력이 가장 잘 표현되는 영역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오늘날 상상력의 장으로서의 영화의 영향력은 게임과 가상현실에 넘어갈 가능성이 많기는 합니다. 인류의 미래를 상상하면서 만든 이 영화에서 제기하는 문제는 바로 ‘유전자 선택’이라는 무거운 주제입니다. 이미 학계, 종교계에서 뜨거운 논쟁이 되고 있었고, 영화는 논쟁보다 앞서는 상상력의 힘으로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들어냈습니다. 사실 유전자 선택은 꽤 흥미진진한 논란거리입니다. 부모의 유전자 중에서 좋은 것만 골라서 자녀에게 물려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또한 나중에 문제를 일으킬 가능성이 있는 유전인자를 제거하고 양질의 유전인자만을 공급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런데 정말.... 좋을까요? 유전자 선택에 대해 찬성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굳이 상업적인 이유를 가져오지 않아도 됩니다. 태어나면서부터 본인의 삶의 선택이 아닌 질병을 앓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본인도 힘들고 그녀에게 그런 질병을 안겨준 부모도 죄책감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들에게 유전자 선택은 복음이 될 수 있다는 논리입니다. 그러나 반대의 논리도 만만치 않습니다. 그렇다면 결국 태어나지 말아야 할 생명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이미 유전자는 조사해보니 뛰어날 것 같지도 않고 문제가 많을 것 같고... 유전자 선택을 통한 양질의 인간형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상식화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내가 아는 어떤 사람보다 여러 가지 능력에서나 인격에서나 내가 부족하다면 나는 그보다 가치없는 사람일까요? 나는 존재하지 말아야 하는 것일까요? 저는 개인적으로 반대의 입장입니다. 물론 나면서부터 질병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아픔과 눈물에 공감합니다. 때문에 제가 가진 삶의 사명 중 하나는 그들의 존재를 부정하거나 죄책감을 안겨주거나 가치 없음을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모든 이유의 눈물과 아픔에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동참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것이 나면서부터 존재하는 아픔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이라고 믿습니다. 우리가 모두 연약하므로 각각 다른 연약함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를 돌보며 섬기며 살아야 합니다. 질병의 원인을 유전자 선택을 통해 제거하는 것이 고통하는 사회를 치료하는 방법이 아닙니다. 좀 더 편한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욕심일 뿐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생명은 주신 그대로 받아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허락된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 생명에 존재할 수 있는 다양한 아픔을 우리가 함께 책임지며 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1. 마리아, 예수를 만나다. 성경에는 예수님을 만난 여러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그 모든 만남 가운데 예수를 가장 충격적으로 만날 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어머니 마리아입니다. 동정녀의 몸으로 자신의 몸 속에 들어온 생명을 받았습니다. 머리 둘 곳이 없어서 마구간에서 태어났습니다. 한 달이 지나서 율법을 따라 성전에 올라갑니다. 그곳에서 한 노인을 만납니다. 시므온입니다. 그는 메시야를 만나기 전에는 죽지 않는다는 계시를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아기 예수를 축복하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그리고 34-35절의 말씀을 마리아에게 합니다. “시므온이 그들에게 축복하고 그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라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눅 2:34-35) 그냥 좋은 말, 축복하는 말만 하면 좋겠는데, 평생을 메시야 만나는 일에 헌신하고 그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선포할 사명으로 살았던 시므온은 결국 마리아에게 해야 할 말을 참지 못합니다. 그녀의 아들은 마리아가 잉태하기 전부터 알던 대로 이 땅을 구원할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입니다. 그런데 그 아들은 첫째, 하나님이 허락하신 목적을 가지고 이 땅에 왔습니다.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습니다.” 둘째, 그에 대한 세상의 반응은 호의적이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 사람들의 마음에 있는 악한 생각이 예수 때문에 드러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모두 하나님을 믿는 것처럼 보이고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들의 마음에 있는 생각은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와 충돌할 것입니다. 셋째, 그 결과는 어머니 마리아에게 고통입니다.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할 것입니다. 아들을 사랑하는 만큼 큰 고통이 찾아올 것입니다. 2. 사랑할 수 있을까? 여러분이 마리아라면 어떤 마음일까요? 아무리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자신이 미쳐 다 이해할 수 없는 아기를 잉태했다고 해도 10개월을 뱃속에서 키워서 고통스럽게 낳은 아들입니다. 얼마나 귀하고 사랑스러울까요? 그런데 그 아들을 하나님 앞으로 데려갔더니...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고, 평생 이 만남을 기다려왔다는 어떤 노인이 다가와서 펑펑 울면서 찬양하고 기도하고 혼자 중얼거리고... 야단을 해 놓고는 말하기를, 세상 사람들은 이 아이를 싫어하게 될 것이고, 너는 이 아이 때문에 칼이 가슴을 찌르는 고통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마리아는 아마도 이것을 부정하고 싶을 것입니다. 어느 누가 이 예언을 받아들이고 싶겠습니까? 그런데 이미 그녀는 천사로부터 들은 말이 있습니다. 이미 이 아이가 무엇인가 사람의 생각과는 다른 하나님의 뜻과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겠습니다. 마리아는 그렇게 아들을 만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마리아는 그 아들을 사랑할 수 있었을까요? 나를 잘되게 하고 나의 기쁨이 되고 나의 영광이 되고 나에게 유익을 주는 아들이 아니라 그로 말미암아 고통을 당하고 눈물을 흘려야 하고 심장에 비수가 꽂히는 고통을 경험해야 한다면.... 그렇다면 마리아는 그를 사랑할 수 있을까요? 내게 고통이 되고 눈물이 되는 아들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3. 하나님의 유전자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사탄이 시험을 합니다. 사탄의 시험을 다양한 말과 논리로 설명할 수 있겠지만 오늘의 설교의 컨셉으로 말하자면... 사탄은 예수님께 유전자 검사를 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사탄은 질문을 시작하면서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던진 함정에 빠지는지를 봅니다. 돌로 떡을 만들고,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고, 세상의 모든 권세를 얻기 위해서 사탄에게 절하고.... 만일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면 이런 능력과 힘을 가지고 스스로를 증명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만일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인 척 했다면 틀림없이 사탄의 시험 안으로 들어가서 자신을 증명하려 했을 것입니다. 그 속으로 들어가는 순간 시험은 끝납니다. 많은 사람을 구하기 위해 세상의 부와 권력을 얻어야 하고, 그것을 얻기 위해 사탄과 타협하자는 유혹입니다. 달콤하고 그럴 듯 해보입니다. 사탄은 이것으로 예수님이 과연 하나님의 완전한 유전자를 가진 아들인지를 도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탄의 모든 유혹과 시험을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으로서의 흔들리지 않는 자기 신뢰로 깨뜨립니다. 그리고 공생애 3년을 십자가를 향해 걸어갑니다. 세상의 길, 사탄과의 타협이 아니라... 하나님의 길, 십자가의 길로 곧장 걸어가십니다. 그 길, 십자가의 길 - 이미 사탄이 시험했고, 세상이 그 길을 거부합니다. 비난합니다. 침 뱉고 채찍질합니다. 사랑하는 어머니와의 비극적인 이별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드디어 시므온이 예언한 대로 칼이 가슴에 깊이 박히는 크고 잔혹한 고통이 어머니 마리아에게 임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그 길을 갑니다. 하나님의 유전자로 충만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주님의 생각을 침범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뜻으로 충만한 예수님의 삶이었습니다. 여러분,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께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사셨다!”는 것을 선언하는 것, 인정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문제는 그래서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있지 않겠습니까?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사랑한다면, 자신을 따르고자 한다면, 자신의 제자가 되기를 원한다면.... 세상의 유전자가 아닌 하나님의 유전자를 받은 사람처럼 살아가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장 잘 아는 말씀으로 표현되었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4. 사랑하십니까? 혹시 유행가 중에서 ‘그 아픔까지 사랑한거야’라는 노래 아십니까? 저는 사실 이 노래를 정신 차리고 처음부터 끝까지 들어본 기억은 없습니다. 다만 이 노래의 마지막에 나오는 ‘그 아픔까지 사랑한거야’라는 가사를 기억합니다. 사랑이란 그런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조건들만 선택하면 이미 사랑은 아닙니다. 내게 유익이 되는 것만 취하면 이미 사랑은 아닙니다. 편하고 쉽고 즐겁기만 하면 역시 사랑은 아닙니다. 적어도 이 유행가의 가사는 사람에게 허락되었고 사람이 해야 할 사랑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진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때로 사랑이 고통이 되고 눈물이 될지라도 그 아픔까지 사랑할 때 사람에 대한 사랑에 한 걸음 접근하게 됩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여러분에 대한 사랑을 믿으십니까? 예수님이 여러분을 사랑한다고 확신하십니까?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눈물과 아픔과 연약함까지도 사랑하셨다는 것을 인정하십니까? 우리의 수치와 비겁함은 빼고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참 못나고 참 이기적이고 참 잘 변하는 우리를 제거하고...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내 모습 이대로, 내 이 못난 모습 이대로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것을 믿으십니까? 예수님의 사랑을 받기에 합당하지 않은 것을 제거하다보면... 어쩌면 정말 남는 것이 별로 없을 우리를, 우리 안에 있는 사랑받을 만한 이유가 아니라 주님 안에 있는 사랑하실 이유로 말미암아 사랑하고 품으셨다는 것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도 주님을 그렇게 사랑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사랑하려면 십자가를 져야 하는데, 예수님을 따르려면 손해를 봐야 하는데, 예수님을 따르려면 의를 위해서 핍박을 받는 삶을 선택해야 하는데, 예수님을 사랑하려니까 세상에 포기하고 내려놔야 하는 것이 이렇게 많은데, 예수님을 정말 사랑하려고 하니까 칼이 심장을 도려내는 아픔을 경험해야 하는데... 아픔과 눈물 없이, 수고와 헌신 없이, 십자가와 고통 없이 우리 주님을 사랑할 수 없는데.... 우리는,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과 같이, 주님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십자가와 함께 예수님을 안고 사랑을 고백하며 헌신할 수 있을까요? 깊이 고민할 수 있기 바랍니다. 오늘 말씀이 너무 심각한 것 같아서 마지막으로 달달한 시 하나 소개하려고 합니다. ‘안도현’이라는 아주 감각적인 시를 쓰는 시인이 있습니다. 제목은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너무 간질간질한 부분을 생략하고 소개하겠습니다. 길가에 민들레 한 송이 피어나면 / 꽃잎으로 온 하늘을 다 받치고 살듯이...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 그대는 나의 세상을 / 나는 그대의 세상을 함께 짊어지고 / 새벽을 향해 걸어가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세상을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을 내 삶으로 삼는다는 것입니다.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다른 세상을 산다면, 사랑하지만 십자가를 부인한다면, 사랑하는데 내 기쁨과 유익만 생각한다면, 사랑하지만 고통과 눈물을 싫다면 스스로 자신의 사랑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지고 우리를 찾아오신 예수님, 십자가와 함께 그 예수님을 사랑하고 섬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탄을 기념하는 계절에 주님의 사랑을 우리의 삶에 각인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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