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 감사예배 - 예수님이 오십니다(3) | na kim | 2016-12-2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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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12. 25. * 본 문 : 요한복음 5장 2-9절 말씀 * 제 목 : 예수님이 오십니다. (3) 한국의 초등학교 5학년 국어 교과서에는 ‘무지개를 찾아서’라는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어떤 내용인지 여러분도 대강은 아실 겁니다. 한 소년이 무지개를 보고 너무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무지개가 있는 곳은 아름답고 행복한 것들만 가득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엄마를 졸랐습니다. 엄마는 안된다고 했지만 소년은 고집을 꺾지 않습니다. 길을 떠납니다. 아무리 가고 또 가도 무지개는 자꾸 멀어집니다. 길을 걷던 소년은 문득 자신을 돌아봅니다. 팔과 다리에 기력이 없어졌습니다. 얼굴에 주름이 생겼습니다. 돌아갈 집도, 반겨줄 어머니도 없습니다. 아직 무지개를 발견하지 못했는데, 이제는 더 이상 무지개를 찾을 시간이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이 이야기는 한국뿐만 아니라 서양에서도 널리 회자되는 동화입니다. 왜 이렇게 슬픈 이야기가 동서양을 막론하고 어린 아이들에게서 읽히는 것일까요? 여러분이 생각하는 이 동화에서 어린이들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과연 어른들이 이 동화를 통해서 어린 아이들에게 그런 교훈을 줄 자격이 있을까요? 오늘 본문의 말씀은 우리들이 어떻게 하면 자녀들에게 그런 교훈을 줄 수 있는 삶을 살 수 있는지를 가르쳐줍니다. 1. 베데스다, 물을 바라보는 사람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베데스다 연못은 예루살렘성전으로 들어가는 양문(Sheep Gate) 옆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기원전 2세기 경에 만들어졌고, 길이가 100~110m, 너비가 62~80m, 깊이가 7~8m 되는 두 개의 쌍둥이 연못입니다. 이 연못을 만든 두 가지 목적이 있습니다. 첫째는 성전에서 제사를 위해 사용되는 물을 공급했습니다. 둘째는 성에 사는 백성들이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물을 공급하고 치료하는 목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왜 치료목적인가 하면, 당시에는 깨끗한 물을 마시고 몸을 잘 씻는 것만으로도 여러 가지 질병이 나을 수 있는 가능성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학자들은 천사들이 연못의 물을 동하게 한다는 것을 실제 천사의 이야기가 아니라 제사장들이 일정 기간 사용했던 연못의 물을 방류하고 새 물을 채우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일로 설명합니다. 북쪽 연못에 저장된 헤브론 산에서 내려오는 맑고 신선한 물을 남쪽 연못에 공급할 때 크게 소용돌이가 일었고, 그것을 천사가 물을 움직이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그 맑을 물을 마시고 몸을 씻으면 어떤 질병에는 치료효과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어의 '베데스다'는 '베트 헤세드‘ 즉, 자비의 집' (House of Mercy)이라는 뜻입니다. 그 연못 주변에는 다섯 개의 행각이 있었는데 늘 많은 환자들과 가족들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본문에도 나오는 것처럼, 천사가 물을 움직일 때 가장 먼저 뛰어들어서 몸을 씻는 사람의 질병이 낫는다는 전설 때문입니다. 실제로 질병이 나았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람들은 각각 문제를 가지고, 삶에 극복되지 않는 어려움을 가지고 물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저마다 언젠가 물이 움직일 때 가장 먼저 뛰어들겠다는 소망을 품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곳으로 가셨습니다. 2. 전설 따라 삼천리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선포하신 복음의 시작은 “누구든지...”입니다. “누구든지 목마른 자는 내게로 와서 마셔라!”라고 선언하십니다. 차별이 없습니다. 자격도 없습니다. 단 하나의 조건, 주님 앞에 믿음으로 나오면 됩니다. 선민의식으로 가득 찬 유대땅에 선포된 차별 없는 복음입니다. 그리고 베데스다 연못에는 이와 비슷한, 복음 비슷한 것이 회자되고 있습니다. 어떤 병에 걸린 사람이든지 천사가 물을 움직일 때 먼저 들어가면 된다는 것입니다. 신분이나 자격을 보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먼저 물에 뛰어들면 된다고 합니다. 단 하나의 조건, 물에 먼저 뛰어들면 됩니다. 차별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 두 메시지는 완전히 다릅니다. 아마도 연못 주변에서 물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은 세상에서 자신을 치료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써본 사람들일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연못 주변에 누워있습니다. 언제 움직일지 모르는 물을 바라보며 기다리고 또 기다립니다. 자, 여러분! 물이 동하면 누가 가장 먼저 뛰어들 수 있을까요? 장애가 가장 적은 사람입니다. 자신을 도와줄 여러 가지 의미의 자산이 가장 많은 사람입니다. 왜 예수님을 만난 38년 된 병자가 희망과 절망을 함께 말하는지 아시겠습니까? 그에게 있어서 베데스다는 희망이자 곧 절망입니다. 먼저 들어가면 될 것 같지만 도저히 들어갈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기회가 주어진 것 같지만 결국은 최선의 조건을 가진 한 사람에게만 기회가 있습니다. 복음일 수 없는 이유입니다. 문제는 또 있습니다. 질병이라는 문제를 만났고, 그 문제를 극복할 수 없었던 사람들은 오직 하나만 바라봅니다. “물에 먼저 뛰어들면 나는 나을 것이다...”입니다. 어디서 말입니까? 베데스다, 자비의 집에서입니다. 여러분, 병이 낫는다는 현상이 중요할까요? 그 병을 낫게 하는, 자비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중요할까요? 사람들은 결과에 집중합니다. 병 낫기를 원합니다. 그들의 문제와 목적에 집중합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베데스다, 은혜의 샘은 능력 있는 소수의 소원을 이루는 샘에 불과하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기도의 응답이 중요합니까? 그 기도를 통해서 나와 교통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일이 중요합니까? 왜 이스라엘이 우상을 섬기기 시작했을까요? 그들은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이 아닌, 기도의 결과가 중요했습니다. 즉 자신들의 소원이 성취되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소원의 성취를 위해 기도의 대상을 바꾸는 어리석은 선택을 하게 됩니다. 세 번째 문제가 있습니다. 은혜의 샘이 더 이상 은혜가 되지 않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들은 다섯 행각에 함께 누워서 신음하면서 물이 움직이는 때를 기다립니다. 서로 위로할 수도 있고, 도와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자, 물이 갑자기 흐르기 시작합니다. 앞을 다투어서 내가 먼저 뛰어 들어가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 모든 사람의 적이 됩니다. 경쟁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패배시켜야 내가 승리합니다. 자비의 샘은 경쟁의 샘이 되고 투쟁의 샘이 되고 증오의 샘이 됩니다. 정말 어떤 한 사람이 뛰어들어서 병을 고쳤다고 합시다.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될까요? 다음 물이 동하기를 기다리는 모두가 모두의 원수가 되고 적이 됩니다. 한 사람의 승리자와 수많은 패배자들의 세상입니다. 3. 헛되고 헛되니.... 세상의 모든 전설은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더 나은 삶을 꿈꾸게 합니다. 능력과 성취와 성공에 목표가 있고, 그것은 무지개 빛깔이 되어 우리를 유혹합니다. 신데렐라가 되어 왕자를 만나면 될 것 같고, 콩쥐와 팥쥐는 왕의 간택을 받으면 됩니다. 흥부가 되어 제비를 만나면 될 것 같고, 램프의 거인 지니를 만나면 될 것 같습니다. 이 문제만 해결되면 내 인생이 행복해질 것 같고, 사업만 잘되면 걱정이 없을 것 같고, 신분이 해결되면 이제 좀 살겠고, 자녀가 좋은 학교를 가면 더 이상 소원이 없고, 남편이 말을 좀 잘 들으면 병이 없을 것 같고, 와이프가 나를 좀 인정만 해주면 소원이 없겠고.... 이 병만 나으면 내가 정말 믿음으로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모두가 다 내가 행복할 수 있는 조건들을 마음에 품고 삽니다. 때로 그런 조건들을 성취되기도 하고 요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성취되어서 행복하시든가요? 정말 다른 걱정은 없으시든가요? 그런 소원과 목표가 성취되지 않아서 끊임없이 불행하고 고통스러우시든가요? 어쩌면 38년을 행각에 누워서 물만 바라보고 살았던 한 병자와 평생을 어쩌면 자신을 즐겁게 하고 최선을 다해서 인생의 행복을 추구하려고 했던 솔로몬은 본질적으로 전혀 다르지 않은 삶을 살았는지도 모릅니다. 모든 소원을 이룬 것 같고, 모든 성취를 이룬 것 같았던 솔로몬이 인생의 마지막에 자신의 삶을 짐승과 다를 바가 없다고 탄식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지식이 무지개인줄 알았더니 아니었고, 권력이 무지개인줄 알았더니 아니었고, 재물도 무지개가 아니었고, 명예도 아니었고, 인기도 아니었고, 육신의 모든 쾌락도 결국 무지개가 아니었습니다. 솔로몬은 물이 움질일 때마다 가장 먼저 뛰어들어서 그 모든 물을 마시고 씻고 수영하고 즐겼지만 결국 그 어떤 것도 자신을 만족시킬 수도, 자신에 대해 만족하지도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가 고백합니다. “아... 아들아, 인생에서 바라보아야 할 것이 이게 아니었구나....” 그가 인생의 마지막에 충격적으로 고백하는 것이 있습니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전 12:13-14) 4.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교훈을 주겠다고 교과서에 동화를 실었습니다. 무지개를 좇으며 사는 것은 헛되다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들이 아하... 교훈을 얻고 고개를 들어 그 이야기를 들려준 어른들을 바라봅니다. 그런데 그 어른들은 무지개가 아닌 진리를, 참된 가치를, 생명을 추구하며 살고 있는 것일까요? 어린 아이들은 일곱색깔 찬란하게 빛나는 무지개를 꿈꾼다면 어쩌면 어른들은 이미 색이 다 빠진....색깔이 구별되지도 않는 무지개를 붙들고 살지는 않습니까? 잘못된 것인 줄 알면서도 이것마저 놓으면 붙들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어서... 안될 줄 알면서... 헛된 꿈인 줄 알면서... 잡을 수 없는 무지개를 평생 쫓아왔다는 것을 알면서.... 물이 움직여봐야 실은 천사가 아닌 연못에 새물을 공급하는 행사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면서... 그 연못의 전설을 생각하고 또 생각하면서 기다려 봐도 이렇게 몸이 불편한 나보다 누군가는 항상 먼저 들어가고 나는 이 헛된 꿈마저도 이룰 수 없는 인생이라는 것을 알면서... 나는 여전히 연못만 바라보고 있지는 않습니까? 저것만 가지면, 이 일만 성공하면, 이정도만 벌면, 저만큼만 인정받으면, 만족하게 사랑을 받으면.... 여전히 헛된 꿈이 이루어지기를 소원하면서 살지 않습니까? 끊임없이 패배하며 후회하며 갈망하며... 그리고 원망하면서 살고 있지 않습니까? 주님께서 38년 된 병자에게 찾아오셨습니다. 행각에 누워 38년의 질병에 대해 원망하는 그의 어깨를 두드리십니다. 이제 물을 바라볼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그를 만나주셨습니다. 헛된 행복, 헛된 욕망, 헛된 소원에 더 이상 인생을 낭비하지 않아도 됩니다. “일어나서 너의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일어나라! 네가 누웠던 자리를 거두어라! 걸어가라!” 예수님은 이 세 명령을 연속해서 주셨습니다. 연못만 바라보는 그는, 무지개만 좇는 그는, 헛된 욕망과 절망 사이를 오가는 그는 결코 일어설 수 없습니다. 그의 후회와 원망의 자리에 늘 누워 있기만 합니다. 가장 편하고 익숙한 나의 삶의 자리... 변화도 필요 없고 성장도 필요하지 않으며 어제와 같은 오늘을 살아가면 되는 바로 그 자리.... 그는 이제 고개를 들어서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를 위해 찾아오신 주님, 그 주님과 시선을 맞추고 떨쳐 일어서야 합니다. 자리를 거두어야 합니다. 더 이상 편하고 안락한 그 질병의 자리가 자신을 유혹하도록 허락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명령하십니다. “걸어가라!” 헛된 소원의 연못이 아닌 하나님이 허락하신 참된 가치가 빛나는 삶의 자리로 가라는 것입니다. 38년의 절망에 허우적거리던 그에게 찾아오신 주님과 함께 전혀 새로운 삶, 전혀 상상하지도 못했던 가치있는 인생을 시작하라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을 기념하고 감사하는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2016년의 성탄을 감사하고 축하하면서... 그리고 고민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혹 우리는 우리의 어깨를 두드리시는 예수님께.... 안녕하시냐고 잠시 인사하고는 다시 연못을 바라보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예수를 안다고 하고 믿는다고 하면서 여전히 우리의 시선은 물이 동하는 일을 기다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제는 더 이상 헛된 소원이 아닌 생명을 바라보자...고 권면하시는 주님 앞에서 네네네...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다시 나의 소원과 만족, 두려움과 염려, 상처와 아픔에 시선을 두고 있지는 않습니까? 2000년 전,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38년 된 병자를 만나셨던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말씀하십니다. “이제 자리를 들고 일어나라. 너의 절망의 자리를 걷고 하나님의 나라를 향하여 나와 함께 걸어가자!” 이 명령, 이 말씀에 순종하여 정말의 연못이 아닌 소망의 나라를 향해 힘찬 발걸음을 시작하시는 2016년의 성탄이 되며 2017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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