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평안과 풍랑 | na kim | 2017-01-3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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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1. 29. * 본 문 : 마태복음 14장 22-33절 말씀 * 제 목 : 내 안에, 평안과 풍랑 얼마 전에 한국의 한 시사 프로그램에서 박근혜 정부의 민정수석이었던 우병우(사진)씨에 대해 자세하게 방송한 적이 있습니다. 경상북도의 영주라는 한 작은 도시에서 자랐고, 어려서부터 공부에는 천재적인 재능을 가졌었다고 했습니다. 그의 고등학교 시절 은사 한분이 인터뷰를 했습니다. 아주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제자를 칭찬했습니다. 병우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장래 희망이 검사였다고 했습니다. 장차 한국 사회의 부조리를 뿌리 뽑고 정의를 세우는 검사가 되겠다고 했다는 겁니다. 그는 꿈을 이뤘을까요? 안타깝게도 약관 20세에 사법고시에 최연소 합격자가 되었던 그는 정의를 세우기보다 정의의 반대편에서 자신의 이익을 위해 권력을 사용했습니다. 결국 자신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후배 검사들에게 조사를 받는 수모를 당하고 있습니다. 왜 한국에서 가장 뛰어난 수재였던 그는 청소년기에 품었던 푸른 꿈을 실현하지 못했을까요? 검사가 되는 것이 꿈이 아니지 않습니까? 검사의 직위가 꿈이 아니라 그 직을 통해서 해야 할 일이 그의 꿈 아니겠습니까? 그의 손에 국민을 위해 일할 수 있는 기회를 허락했을 때 약자를 보호하고 정의를 세우는 일을 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왜 그는 그 꿈을 잃고 자신이 그토록 청산하고자 했던 정의를 잡아먹는 괴물이 되고 말았을까요?
1. 풍랑 속에서 제자들이 갈릴리 바다에서 큰 풍랑을 만났습니다. 나면서부터 갈릴리에서 어부로 살았던 제자들도 있었는데, 그들 역시 어찌할 수 없는 큰 파도였습니다. 그런데 어두운 바다 한 가운데서 누군가 걸어옵니다. 제자들은 죽음의 고비를 넘나드는 와중에도 “귀신이닷!”를 외치면서 두려워합니다. 그때 바다에서부터 음성이 들려옵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아직 어두움과 파도 때문에 자세하게 보이지는 않습니다. 베드로가 나서서 다시 묻습니다. “정말 우리 선생님 예수님이 바다를 걸어서 오시는 건가요? 그렇다면 나도 예수님께 갈 수 있도록 해주세요.” 예수님은 “그래, 내게로 걸어 오너라!”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는 성큼 바다에 뛰어듭니다. 성경은 그가 물 위를 걸었다고 했습니다. 이순간이 중요합니다.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고 “물 위를 걸어오라!”는 명령에만 집중하고 한걸음 성큼 물 위로 발을 내딛는 순간, 그리고 두 번째 발을 옮기는 순간... 그는 물위를 걷습니다. 그런데 출렁~~ 파도가 칩니다. 갑자기 예수님이 파도에 가려서 보이지 않습니다. 어... 파도의 높이가 베드로의 눈높이를 넘어섰습니다. 그의 마음에 예수님을 담았을 때 그는 바다를 걸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의 마음에 훅~하고 풍랑이는 바다가 들어와 버렸습니다. 바다만 들어온 것이 아니라 두려움도 함께 들어왔습니다. 순간 그는 여지없이 바다로 빠져들었습니다. 예수님은 허우적거리는 베드로를 건져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마 14:31下) 예수님은 베드로와 함께 배에 오르셨고, 바다는 잔잔해졌습니다. 배를 타고 있던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께 절하고 찬양했습니다. 이것이 오늘의 본문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이 이야기를 통해서 제자들과 교회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싶어 하셨을까요? 저는 오늘 성경이 들려주는 이 짧은 이야기 속에서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의 영적인 현실과 우리들의 모습을 함께 찾아보려고 합니다. 2. 경계에 서다. 본문이 보여주는 그림은 명확합니다. 제자들은 지금 두 가지 영적 현실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뢰입니다. 제자들은 정말 어렵고 힘든 결단과 과정을 통해서 제자가 되었습니다. 이들이 보여주는 연약한 모습을 비웃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시대에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아들여서 제자가 된다는 것은 오늘날 우리가 믿음으로 사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힘들고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예수님에 대한 분명한 신뢰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또 다른 영적인 현실을 직면합니다. 그들에게는 세상에 대한 두려움이 남아 있습니다. 믿음으로 예수를 선택하기는 했지만 아직 포기하지 못한 꿈이 남았고, 아직 떨쳐버리지 못한 두려움도 남아있습니다. 오늘 성경이 보여주는 이 장면은 그들이 여전히 예수님에 대한 신뢰와 세상에 대한 두려움의 경계에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실 알고 보면 제자들이 두려워했던 것은 높은 파도만은 아닙니다. 높은 파도는 하나의 사건이자 상징일 뿐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기는 하지만 그 믿음의 크기보다 세상에 대한 두려움이 더 커지는 순간들을 경험합니다. 그때마다 그들은 우왕좌왕했습니다. 천국의 복음을 전하고 돌아와서는 더 높은 자리에 오르겠다고 다퉜고, 들판을 메운 군중들을 보면서 예수님의 사랑이 아닌 군중의 수와 그들의 호주머니에 있는 돈을 생각했습니다. 십자가를 지겠다는 예수님의 결단 앞에 그들의 미래를 걱정하면서 반대하기도 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했던 3년 간 그들은 속 시원히 세상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믿음으로 든든하게 이기는 모습 을 보여주지 못합니다. 그들은 늘 주님에 대한 신뢰와 세상에 대한 염려와 두려움의 경계에 서 있었습니다. 주님을 신뢰하지 않았다면 제자의 삶을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요,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았다면 예수님의 십자가에 동참했을 것입니다. 어디 그들만 그럴까요? 실은 성경에 나오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이 그랬습니다. 자기 안전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아내를 두 번이나 왕들에게 내어줍니다. 이삭도 그렇습니다. 아내를 빼앗긴 적이 있습니다. 야곱에게 있어서 복에 대한 욕심과 집착은 복 없는 삶에 대한 두려움과 염려의 다른 모습이기도 합니다. 신약의 대표적인 사도들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목숨 걸고 따랐지만 부인하는 베드로는 어떻습니까? 바울이 아직 회심하지 않았을 때 스데반을 돌로 쳐서 죽인 적이 있습니다. 그의 분노는 자신이 알고 믿고 있는 것이 부정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의 다른 얼굴입니다. 그의 두려움이 분노의 가면을 쓰고 스데반에게 돌을 던졌습니다. 그들 모두가 스스로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스스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안타깝게도 하나님 아닌 세상에 대한 두려움이 그들의 행동을 결정합니다. 오늘날 우리도 그렇습니다. 우리 또한 다양한 가면을 쓴 두려움과 염려를 가지고 삽니다. 때로 두려움과 염려는 욕심이라는 가면을 씁니다. 더 많이 가지고 저장하지 않으면 안전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때로 두려움과 염려는 사람들의 인정과 사랑이라는 가면을 씁니다. 사람들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 두렵습니다. 때로 두려움과 염려는 불안의 다른 표현으로 사용됩니다. 그리고 그런 우리가 예수를 믿습니다. 믿으면서 불안하고 걱정하고 염려하고 두려워합니다. 우리는 늘 경계에 서 있습니다. 주님을 바라보고 걸어가고 또 세상의 파도에 빠집니다. 3. 두려워 말라, 염려하지 말라! 그래서, 여러분! 성경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명령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두려워하지 말라! 염려하지 말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순종하라, 말씀대로 살아라, 믿음으로 살아라”는 말씀보다 두려워 말라,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을 더 많이 주셨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광야의 끝에서 가나안 입성을 준비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정탐꾼을 가나안으로 보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 땅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왔습니다. 다른 10명의 정탐꾼은 가나안 원주민들의 풍요하고 강대한 모습을 보고 왔습니다. 그들은 두려움에 빠졌습니다. 전쟁을 하면 반드시 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두 사람, 여호수아와 갈렙의 마음을 채운 것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였다면, 열사람의 정탐꾼의 마음을 채운 것은 바로 두려움이었습니다. 그 두려움은 이스라엘 모든 백성의 마음으로 전염됩니다. 모두가 두려움의 패닉 상태에 빠집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일이 벌어집니다. 두려움에 빠진 사람들이 갑자기 용감해지기 시작합니다. 그들이 누구에 대해 용감해질까요? 정작 그들의 적은 가나안인데, 그들은 두 사람, 두려움이 아닌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선택한 여호수아와 갈렙에 대해 아주 용감해집니다. 엄청나게 분노합니다. 민수기 14장 6절을 보면 그들은 돌을 들어서 두 사람을 죽이려 합니다. 자, 여러분! 이스라엘이 싸워서 물리쳐야 한 적은 가나안입니다. 그런데 온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마음으로 가나안과의 전쟁을 준비하는 여호수아와 갈렙을 죽이려 합니다. 열명의 정탐꾼과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보다 더 가나안이 된 것입니다. 정작 가나안은 아직 싸우지 않고 있는데, 여호수아와 갈렙이 가나안과 한번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았는데 더 가나안스러워진 이스라엘의 손에 죽게 생겼습니다. 왜 이스라엘은 가나안보다 더 가나안스러워 졌을까요? 두려움과 염려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의 마음 속에 훅 하고 들어와서 견고하게 자리 잡은 두려움과 염려는 그들을 오히려 가나안의 편에 서게 만들었습니다. 이 장면과 오늘 본문의 장면을 비교해보십시오. 예수님에 대한 신뢰로 파도 위를 걸었던 베드로는 두려움에 마음을 빼앗기자 물에 빠져듭니다. 하지만 실은 그는 물에 빠지기 전에 먼저... 두려움에 빠졌습니다. 두려움이 그의 마음에 찾아와서 마음을 빼앗아 버렸습니다. 그가 바다에 빠져들고 그도 바다가 되어 다른 제자들이 타고 있는 뱃전을 휘몰아칠 것입니다. 4. 내 안에, 평안과 풍랑 저는 우병우씨가 10명의 정탐꾼의 마음과 비슷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베드로의 마음과도 비슷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정의로운 마음을 품었을 것입니다. 검사가 되기만 하면 정의가 자신의 삶에서 실현되는 사람이 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20세에 검사가 되고 보니... 세상을 만나게 됩니다. 세상을 이겨보려고 했겠지요. 베드로가 물로 뛰어드는 것처럼 이 세상의 보편적 정의와 사법질서를 믿으면서 좋은 검사를 꿈꾸었을 것입니다. 누가 처음부터 나라를 뒤흔드는 비리를 저지르겠다고 결심했겠습니까? 10명의 정탐꾼 또한 각 지파의 젊은 엘리트들입니다. 가나안을 정복하겠노라고 정탐꾼이 되어 길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우병우가 거대한 세상을 만났습니다. 정의가 힘이 있는 것이 아니라 돈이 힘이 있고, 법이 힘이 있는 것이 아니라 권력이 힘이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꿈이 세상의 파도에 잠겼다가 나왔다가 출렁댑니다. 내가 이 세상을 이길 수 있을까? 잠시 당황하고 고민하는 사이 세상의 파도가 그의 마음을 가득 채웁니다. 어느새 세상의 파도에 빠져들었고, 그 자신이 가장 높은 파도가 되어 온 세상을 회몰아치게 된 것입니다. 열명의 정탐꾼과 베드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두려움과 염려에 마음을 빼앗기는 순간, 바로 그 순간이 이 세상의 파도에 빠져드는 순간입니다. 그리고 그들조차 파도가 되어 교회와 성도에게로 몰아치게 됩니다. 여러분이 사는 세상은 평안하십니까? 염려와 두려움이 없는 삶은 없습니다. 성도로서의 우리는 늘 경계에서 삽니다. 예수를 믿고 세상을 염려합니다. 때로 우리는 담대하게 여호수아와 갈렙이 되기도 하고, 때로 우리는 열명의 정탐꾼이 되기도 합니다. 언제 그렇습니까? 그 경계에 서서 주님을 더욱 신뢰할 때 우리는 용사가 되고, 세상을 두려워할 때 우리는 그 용사들과 싸우는 세상이 됩니다. 주님만을 바라보고 걸으면 파도 위를 걷는 능력 있는 성도가 됩니다. 파도 때문에 주님을 향한 시선이 흔들릴 때 우리는 다른 성도들에게 휘몰아치는 파도가 됩니다. 우병우는 어릴 적에 품었던 그 꿈대로 살았다면 그에게 허락된 재능으로 지금 사회와 역사에 큰 공헌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 꿈을 세상의 풍랑에 빼앗겼을 때... 그래서 그의 꿈이 세상의 파도에 잠기고 그 자신 또한 그 파도에 잠겼을 때.... 그는 자신을 덥쳤던 파도보다 더 높은 파도가 되어 연약한 사람들에게 휘몰아칩니다. 세상에 이렇게 수만은 우병우들이 존재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 모두 하나님이 허락하신 그들의 마음의 바다를 세상의 풍랑에 빼앗기고 살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파도 너머에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예수님께 집중하셔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건지시기 위해 어디서든 달려오시는 분입니다. 파도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기를 바랍니다. 믿음으로 파도 너머에 있는 주님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풍랑이는 바다가 여러분의 마음을 주장하지 않도록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말씀으로 지켜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평안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킬 수 있어야 합니다. 두려움과 염려가 아닌 주님을 향한 신뢰로 이 풍진 세상에서 평안의 복음을 전하는 초대교회와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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