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주인" | na kim | 2017-02-2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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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9.2017 초대교회 주일예배 설교 입니다. 아래 유툽 링크를 클릭해주세요.
2017. 2. 19. * 본 문 : 마태복음 6장 24절 말씀 * 제 목 : 두 주인 ‘반지의 제왕’(The Lord of the Rings)이라는 영화를 아시지요? 전체 3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부는 ‘반지 원정대’(사진1), 2부는 ‘두 개의 탑’(사진2), 3부는 ‘왕의 귀환’(사진3)이라는 제목입니다. 영국의 영문학자이자 소설가 존 로널드 루엘 톨킨이 1950년대 초에 발표한 3부작 판타지 소설을 원작을 만들었습니다. 소설의 배경으로 설정된 신과 인간의 중간계에는 인간, 괴물, 요정, 마법사, 난장이 등 다양한 종족들이 공존합니다. 악의 군주인 사우론은 각 종족에게 자기 종족을 지배할 수 있는 힘을 가진 반지를 나누어 줍니다. 그리고 자신은 "모든 반지를 다스리고, 모두를 찾아내며, 한데 불러 모아 어둠 속에서 하나로 묶는 절대반지(사진4)를 만들어서 세계를 통치합니다. 세상은 암흑기로 접어들고, 이에 대항하는 선의 연합군은 힘을 모아 사우론을 필두로 하는 악의 군대와 싸워 결국 승리합니다. 그런데 절대반지를 빼앗아서 ‘운명의 산’ 용암에 던져 넣기로 했던 인간종족의 왕자는 반지가 주는 유혹을 이기지 못합니다. 자신이 반지를 차지하려고 합니다. 모든 세력이 반지를 손에 넣기 위해 치열한 싸움을 벌이게 되고 왕자는 죽임을 당합니다. 반지는 강물에 버려지고 세월이 흐릅니다. 여기까지가 소설의 배경입니다. 소설은 난장이 종족인 호빗족에게서 시작됩니다. 평범하고 보잘 것 없는 그들의 손에 반지가 흘러들어 갑니다. 죽음에서 부활해서 기력을 회복한 사우론은 그 반지를 찾기 위해 세상을 정찰합니다. 반지의 존재와 사우론의 의도를 알게 된 인간들은 그 반지가 원래 만들어졌던 ‘운명의 산’으로 가져가서 파괴하기로 결정합니다. 호빗 종족인 프로도와 각종족을 대표하는 용사들은 원정대를 조직하고 길을 떠납니다. 그들은 죽음보다 힘든 고난을 겪으며 목적지에 다가섭니다. 그런데 그 과정 가운데 그들은 육체적으로 지칠 뿐만 아니라 자신과 함께 한 동료를 믿지 못하게 되고, 심지어 자기 자신을 믿지 못하게 됩니다. 반지가 주는 유혹이 너무 강렬했습니다. 반지는 인간의 내면에 자리 잡고 있는 욕망을 통해서 인간을 조종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밖으로 그 반지를 되찾으려는 사우론의 무리와 싸워야 했지만, 안으로는 그들의 욕망을 끊임없이 자극하면서 그들을 또 다른 사우론으로 만드는 반지의 유혹과도 싸워야 했습니다. 절대적인 순수한 마음을 가진 프로도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잠시 반지를 손에 넣게 되는 것만으로도 악의 화신으로 쉽게 변합니다. 결국 반지는 제거되지만 그 과정에서 소설은 사람이 욕망에 대해 얼마나 연약한지를 잘 보여줍니다. 그들은 모두 악에 맞서 싸우기로 결정한 용사들이었고, 자신의 종족을 위해 삶을 헌신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막상 반지가 그들의 손에 들어오면 반지는 그들 안에 숨어 있던 가장 작은 욕망까지도 사용합니다. 결국 영광과 권력을 상징하는 반지는 사람의 내면에 존재하는 욕망을 통해서 사람을 지배하는 우상이었던 것입니다. ‘반지의 제왕’이라는 제목은 실은 다소... 단순한 번역입니다. 의로운 일을 위해 헌신하고 협력했던 사람들조차 반지를 손에 넣기만 하면 영광과 권력의 욕망을 이기지 못하게 될 때.... 그들이 반지의 주인입니까? 반지가 그들의 주인입니까? 그래서 ‘반지의 제왕’이라는 제목은 실은 ‘반지의 주인’ 혹은 ‘반지라고 하는 주인’으로 번역을 해도 됩니다. 1. 보물, 마음, 시선,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의 주인 예수님은 마태복음의 첫 설교인 산상수훈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소개합니다. 하나님 나라 시민의 삶의 질서와 가치를 가르치셨습니다. 그 중에서 ‘반지의 제왕’과 같은 주제의 말씀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6장 19-24절의 말씀입니다. 여기에 중요한 단어들이 등장합니다. ‘보물’, ‘시선’, ‘마음’, 그리고 ‘주인’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보물’은 우리가 가치 있게 여기는 것, 내 삶을 사용해서 얻고자 하는 것, 우리가 욕망하는 모든 것을 말합니다. 그 보물은 우리의 시선을 빼앗고 마음을 사용합니다. 우리는 그것의 주인이 되고 싶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마 6:20)고 권면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추구해야 할 참된 가치는 땅에 속한 것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21절에서 예수님은 사실 ‘보물’ 그 자체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이자 시선입니다. 땅에 있는 것에 우리의 시선을 빼앗기면, 땅이 우리의 마음의 주인이 됩니다. 지난 한 주간 여러분의 마음의 에너지를 가장 많이 사용한 그것, 여러분의 시선이 가장 많이 움직인 그곳, 여러분의 시간을 가장 많이 소비한 그것이 바로 여러분의 주인입니다. 레베카 피퍼트는 그녀의 책 ‘Out of Saltshaker' 53p 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무엇이든지 우리를 지배하는 것이 우리의 주인이다. 힘을 추구하는 자는 힘에 지배당한다. 인정받기를 바라는 자는 그가 호감을 사려는 이들에게 지배당한다. 우리는 스스로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의 주인에게 지배당한다.” 2. 두 주인, 하나님과 재물 여러분은 그녀의 말에 동의하십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바울을 통해서 골로새 교회에 편지하기를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숭배니라”(골 3:5)고 했습니다. 땅에 있는 지체를 좇는 것, 그 중에서도 탐심은 우상숭배라고 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내 안에 있는 마음인데, 나의 욕망인데... 그런데 성경은 그 마음을 우상을 숭배하는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우상이라고 하면... ‘내가 무슨 불교를 믿는 것도 아니고, 이슬람을 믿는 것도 아닌데... 나는 여전히 신앙을 고백하고 기도하고 예배하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데... 단지 성공하고 싶은 욕심이 좀 많고 재물에 대한 욕심이 좀 많을 뿐인데, 왜 나를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이라고 비난하는거지...?’ 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탐심에 대해 특별한 주의를 주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탐심이란 ‘물질에 대한 만족하지 않는 욕구’를 뜻합니다. 디모데전서 6장 10절에서는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10)라고 했습니다. 돈을 사랑하는 마음이 믿음보다 강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동의가 되십니까? 안타깝게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연약함을 잘 알고 계신 예수님은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 여기서 말하는 두 주인은 누구와 누구입니까? 하나님과 재물입니다. 먼저 하나님은 당연히 우리의 주인이십니다. 왕이십니다. 그렇다면 재물은 우리의 주인이 될 수 있을까요? 가능할까요? 예, 가능합니다. 재물이라는 것은 중립적인 가치를 가진 것이지만, 그것이 우리 안에 욕심을 만날 때... 재물은 영적인 가치를 가지게 되고 우리의 주인이 됩니다. 오늘 본문에 대한 두 영어 번역본을 비교하면 재미있습니다. "You cannot serve both God and Money."(Matt 6:24/NIV) “Ye cannot serve God and mammon.”(Matt 6:24/KJV) NIV에서는 하나님과 돈을 섬길 수 없다고 번역했습니다. KJV에서는 하나님과 맘몬, 즉 물신(物神)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Mammon, 즉 물신이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재물을 의존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말합니다. 좀 더 폭넓게 해석하자면 재물뿐만 아니라 우리의 만족에 대한 욕구를 자극하는 모든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 안에 있는 욕망과 만나면, 그것은 우리의 주인이 되고 우리의 마음은 그것을 예배하게 됩니다.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3.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 우상에 대해 잠시 생각할까요? 성경은 크게 세 가지 종류의 우상이 있다고 말합니다. 먼저 성경은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서 우상을 설명합니다. 성경은 사람과의 관계에 대한 의존이나 두려움이 우상이 될 수도 있다고 경고합니다. 사람들로부터의 인정이나 인기, 사랑과 관심은 성도와 하나님 사이에 놓인 다양한 색깔과 굴곡을 가진 거울과 같습니다. 사울왕은 사람들로부터 왕으로 인정받기 위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왜곡합니다. 다윗이 자신보다 더 사랑과 존경을 받는다고 생각해서 충신이었던 다윗을 거듭 죽이려 합니다. 사람과의 관계가 우상이 되는 가장 좋은 예입니다. 성경은 개인의 성취나 성공이 우상이 될 수도 있다고 말합니다. 성공과 성취, 번영과 영광에서 삶의 만족과 의미를 찾으려 할 때 그것은 우상이 됩니다. 소원을 이루는 삶에 신앙과 기도의 초점이 있습니다. 내 소원을 이루는 믿음은 그 자체가 우상입니다. 마지막으로 성경이 말하는 또 하나의 우상은 삶의 목적 혹은 가치와 관계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추구하며 삽니다. 예수님의 시대에 그들이 그렇게 기다리던 메시야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믿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들 안에 복음 이전에 먼저 자라고 있는 가시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주의와 율법은 한 때는 복음을 설명하는 도구였지만 예수님의 시대에 복음을 가로막는 장벽이 됩니다. 바리새인들에게 있어서 율법은 우상이 되었고,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선민의식은 우상이 됩니다. 오늘날 우리 자신도 한번 고민할 필요가 있습니다. 혹시 나는 복음보다 앞서는 어떤 가치나 삶의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때로 그것은 정치의식일 수도 있습니다. 때로 그것은 신학일 수도 있습니다. 때로 그것은 편견과 아집일 수도 있습니다. 복음이 역사하는 일을 가로막는 나만의 가치와 생각들, 우리 안에 숨어 있는 우상들입니다. 4. 하나님만을 섬기라!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택하신 민족, 하나님의 나라로 부르시고 그들이 반드시 기억하고 지켜야 할 계명을 주십니다. 계명을 주시기 전에 하나님은 먼저 선언하십니다.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출 20:2)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이 믿고 추구해야 할 가치는 오직 하나님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계명을 주십니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출 20:3) 제2계명은 어떻게 시작합니까?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출 20:4-5上)입니다.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분명합니다. 여호와는 그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입니다. 다른 신을 섬겨서는 안됩니다. 다른 그 무엇에서 만족을 구해서도 안됩니다.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이라는 표현을 보십시오. 우상이란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 그들의 마음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주신 이 명령에 성공했을까요? 에스겔서에는 이스라엘의 실패를 상징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인자야 이 사람들이 자기 우상을 마음에 들이며 죄악의 걸림돌을 자기 앞에 두었으니 그들이 내게 묻기를 내가 조금인들 용납하랴”(겔 14:2-3) 이스라엘의 실패는 우상숭배에 있습니다. 그들이 기도하지 않았던 것이 아닙니다. 예배하지 않았던 것도 아닙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떠나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다만 그들은 ‘자기 우상’을 마음에 들였습니다. 자기만족과 성취가 중요했습니다. 자신만의 절대반지를 만들었습니다. 그것을 추구하며 소원하며 욕망하며 삽니다. 하나님보다 우리 안에 있는 욕망의 가치가 우선하는 삶을 삽니다. 자기 우상을 마음에 들이고 섬기며 살고 있습니다. 저는 이번 주부터 약 10주 정도, 우리 안에 있는 주인들에 대해 말씀을 나눌까 합니다. 내 안에 나도 모르는 사이 주인 행세를 하고 있는 것은 없는지 함께 고민하고 비춰보고 답을 찾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 거짓 없이 설 때에 하나님을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영적 실체를 보여주시고 우리를 바른 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우리 안에 숨은 또 하나의 주인, 우상에 대해 말씀합니다. 내 안에 하나님보다 더 큰 기쁨, 하나님보다 더 큰 영광, 하나님보다 더 큰 소원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은 없습니까? 그것은 무엇입니까? 복음으로 그것을 이길 수 있습니까? 나는 하나님만을 섬기는 사람으로 살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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