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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아 산에서 na kim 2017-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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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2. 26.

 

* 본 문 : 창세기 2211-14절 말씀

* 제 목 : 모리아 산에서

 

요즘 교회에 아픈 성도들이 많습니다. 우리의 인생길에 원하지 않는 험한 골짜기와 마른 광야가 펼쳐질 때... 오히려 하나님과 좀 친밀한 교제가 있기를 바랍니다. 오래 전부터 하나님의 사람들은 광야로 혹은 산골짜기로 들어가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에서 우리가 가진 것이 없고 우리에게 남은 소망이 없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때... 오직 하나님만을 만나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알고 보면 사람은 참 약한 존재입니다. 때문에 강한 척 하며 살기 쉽습니다. 어깨와 두 팔과 마음에 잔뜩 바람을 불어넣고는 자신의 인생은 자신이 알아서 할 수 있다고 외치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큰 몸에 작은 암세포 하나만 들어와도 견디지 못합니다. 요즘 많은 분들이 힘들어 하는 독감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 바이러스에 우리 몸이 꼼짝 못하는 증거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건강하고 우리의 삶에 평안할 때 스스로 광야로 나가는 것은 좋은 영적인 훈련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는 살 수 없음을 경험하게 됩니다. 청빈과 겸손을 배우게 됩니다. 갑자기 험한 산골짝과 거친 광야를 만나고, 내가 왜 이곳에 있어야 합니까? 하나님은 지금 어디 계십니까? 소리치고 울부짖지 말고, 건강하고 평안할 때에 스스로 광야에 서는 훈련이 되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인생의 광야에 뜻하지 않게 설 때에 잘 훈련된 모습으로 넉넉하게 길을 찾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말씀을 시작하면서 여러분에게 먼저 천기(?)를 누설할까 합니다. 두 그림을 보실까요?(사진1, 사진2) 이 두 그림의 연관성을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1. 내게 가장 소중한 것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이 사람에게 표현하시는 가장 큰 진노는 무엇일까요? 관점에 따라 다를 수 있겠습니다만, 로마서 118, 24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해여 하늘로 좇아 낱나니니...”(1:18)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1:24)

 

성경은 사람이 자기 욕심대로 사는 것을 불의하다고 말합니다. 스스로를 욕되게 하는 삶이라고 합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임합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하나님이 간섭하지 않으시고, 외면하십니다. 이 땅에 사는 생명에게 표현하시는 가장 큰 진노입니다. 그들이 어떤 삶을 살았기에 하나님 이렇게까지 진노하실까요? 21-22절에서, 먼저 그들은 마음이 어두운 사람들입니다. 어리석습니다. 23절에서 그들의 상태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1:23) 25절에서도 다시 설명합니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1:25) ...이제 비로소 이해가 됩니다. 하나님은 왜 그렇게 진노하셨을까요? , 사람들이 하나님이 아닌 우상을 섬겼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우상의 개념을 알 수 있습니다. 우상은 사람들에게 스스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그것은 생명이 없습니다. 주권도 없습니다. 그런데 영성을 가집니다. 왜 그럴까요? 그 우상이 바로 사람들의 마음에서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장은 우상을 설명하면서 사람들의 마음에 주목합니다. 그들의 생각이 허망하고 마음이 어두워집니다. 무엇인가 욕망하는 것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얻고 싶고 소유하고 싶고 즐기고 싶은 것이 생겼습니다. NIV에서는 그것을 ‘the sinful desires of their hearts’(1:24)라고 했습니다. 그들의 마음에 죄성이 있는 욕망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과 내 마음에 자리 잡은 'evil desire', 이 두 가지가 만나서 우상이 됩니다. 그것이 우리의 마음의 주인이 되고 예배의 대상이 됩니다. 피조물을 하나님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고 사랑하는 것’ - 그것이 우상숭배입니다.

 

2. 광야에 서면

 

최근에 인터넷에서 출처가 불분명한, 그런데 말이 되는 이야기 하나를 읽었습니다. 그 글을 쓴 사람의 의도가 좀 쉽게, 분명하게 읽혀서 만들어낸 이야기인가... 생각도 들었지만 나름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도 간단한 실험을 한번 해볼까요? 모두다 펜을 드시기 바랍니다. 옆 사람에게 빌리기도 해 보십시오. 우리가 가진, 지키고 싶은 소중한 것은 무엇입니까? 5가지를 써 봅시다. 무엇이든 좋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도 좋고, 추상적인 것도 좋습니다. 사람과의 관계도 좋습니다.

 

다 하셨으면... 만일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그 중에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면 무엇입니까? X표를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상황이 더 악화되었습니다. 누군가가 강력한 힘을 가진 악한 사람이 있어서 내게 남은 5개 중에서 두 개를 내놓으라고 한다고 합시다. 무엇과 무엇입니까? 상황이 점점 안좋아집니다. 하나 더 내 놓아야 합니다. 마지막 남은 것은 무엇입니까? 제가 인터넷에서 본 글에는 부부관계를 마지막에 놨더군요. “재물도, 부모도, 자녀도 다 나를 떠나지만 결국 떠나지 않는 것은 내 남편이고 아내입니다. 서로를 소중하게 여깁시다.” ..이런 메시지였습니다. 여러분은 마지막에 무엇이 남았습니까?

 

예수님이 오시기 약 2000년 전 유대광야를 헤매면서 살았던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원래 갈대아 사람이었는데,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서 무조건 본토와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났습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약속이 있습니다.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와 같이 그에게 자손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나이 100세가 되어서야 아들을 얻습니다. 하늘의 별과 바다의 모래를 약속받았는데, 무려 100세에 아들을 낳았습니다. ... 얼마나 귀한 아들일까요? 세상의 모든 것을 잃어도, 심지어 자신의 목숨까지도 바꿀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까 본 그림에서 아버지는 아들을 지금 제단에 올려놓고 칼을 들고 있습니다. 소중하지 않아서 일까요? 덜 사랑해서 일까요? 아들의 가치를 몰라서일까요? 아닙니다. 목숨보다 사랑하고 자신보다 중요하고 이 세상 모든 것과 바꿀 수 없습니다. 그는 그 아들을 제물로 드리고 있습니다.

 

그는 자기 인생에 가장 어려운 순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거친 광야입니다. 산골짜기입니다. 풀 한포기 남아 있지 않은 절망의 광야에서 그는 홀로 하나님과 대면하고 있습니다. 마음 속에 수많은 질문이 들끓습니다. 하나님, 도대체 왜... .... 왜 아들을 주시고 또 달라고 하십니까? 왜 별과 모래의 축복을 이야기하셔놓고는 하나마저 빼앗으십니까? 어쩌면 그의 진심은 칼의 끝을 아들의 목이 아닌 하늘로 향하고 싶은 것일 수 있습니다.

 

3. 아들을 주시는 하나님

 

성도 여러분! 지키고 싶어도 지킬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아니 실은 세상에 속한 모든 것이 그렇습니다. 저는 부모님으로부터 참 많은 사랑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저는 부모님을 끝까지 지킬 수 없습니다. 저는 저의 자녀들을 정말 사랑합니다. 저의 자녀들을 제 힘으로 지킬 수 있을까요? 제 아내의 옆 자리를 영원히 지킬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실은 우리가 지킬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잠시 함께 하다가... 잠시 서로에게 소중한 의미가 되었다가, 잠시 함께 웃고 울며 마음과 삶을 나누다가... 잠시 이 세상에서 허락된 것을 함께 즐기고 사용하다가.... 우리는 우리를 지으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갑니다. 우리가 지킬 수 있는 것은, 재물도 관계도 영광도 명예도... 그리고 건강과 생명도... 결국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자신이 짐승과도 같으며 헛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가 봅니다. 지킬 것이 많은가 봅니다. 재물을 지키고 싶고, 사람을 지키고 싶고, 이 땅에서의 나의 소원을 이루고 싶고, 명예와 영광을 얻고 싶고,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은 모양입니다. 문제는 그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섭리하심을 넘어설 때입니다.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보지 못하고, 그것 때문에 우리의 마음과 삶을 하나님께 드리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보다 그것이 더 커지고, 결국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그것이 떡~ 하니 가로막고 서 있을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광야의 끝에 세우시고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절벽의 끝에 놓으시고 물으십니다. 너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인가?” 아브라함은 마음 속에 들끓는 수많은 질문들을 억누르고 침묵하며 순종합니다. 그가 칼을 들어 아들의 목을 겨누었을 때, 이 세상에서 자신에게 허락된 가장 큰 은혜, 가장 소중한 복, 자신의 생명보다 귀중한 가치에 겨누었을 때, 자신의 삶에 가장 소중한 것을 하나님 앞에서 내려놓기로 결정했을 때.... 하나님은 비로소 그에게 칼을 거두라고 명령하십니다.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22:12)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선택을 믿음으로 해석하셨고, 그를 믿음의 조상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때로부터 2000년이 지나갑니다. 이삭이 제단 위에서 제물로 바쳐졌던 모리아산은 예루살렘이 됩니다. 예루살렘 성의 한 모퉁이에서 인류 역사의 중심이 되는 한 거룩한 제단이 세워집니다. 그 제단의 이름은 십자가(사진 2)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을 제물로 보내셨고, 아들은 기꺼이 제단에 올라갑니다. 아무도 아들을 향한 칼을 막지 않습니다. 아들은 살이 찢어지고 피를 흘리며 십자가 위에서 완전한 제물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8:32)

 

2000년 전,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칼을 막으셨습니다. 2000년이 지나서 같은 산에서 완전한 헌신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사람을 위해 제물로 드리셨습니다. 하나님의 독생하신 아들이 우리를 위해 죽임당하셨습니다. 아무도 그 칼을 막아주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로마서를 통해 말씀하시기를.... “너희들이 그 아들을 믿으면,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주실 것인데.... 어찌 그 모든 것에 마음을 두고 아들을 믿는 믿음을 고백하지 못하느냐?” 여전히 세상의 모든 것에 마음을 두고 아들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느냐 물으십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내려놓고 믿음이 무엇인지를 설명했고, 하나님은 자신의 가장 소중한 아들을 내어주시고 구원이 무엇인지를 증명하셨는데.... 우리에게는 소중한 것이 너무 많습니다. 내려놓지 못하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우리의 마음과 삶을 묶고 있는 칭칭 감긴 줄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것을 내려놓으면 마치 내가 무너질 것 같고, 그것을 포기하면 너무 불안하고, 그것이 없으면 살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과 염려의 대상들이 너무 많습니다. 인생이 그렇게 흘러갑니다.

 

4. ‘그가 아시는 나의 길을 걷다

 

저는 우리가 오늘 본문 말씀의 상황 속으로 잠시 들어가보면 좋겠습니다. 상상해보십시오. 바람이 부는 모리아 산의 한 언덕에 나무로 제단이 쌓였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묶습니다. 아들이 산을 오르며 아버지께 이미 물었습니다. 제물은 어디 있습니까? 아버지가 제대로 대답하지 못합니다. 알기도 하고 모르기도 합니다. 아는 것은 이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는 것이고, 모르는 것은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입니다. 도대체 하나님의 뜻을 모르겠습니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수용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나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내가 이해했기 때문에 아버지의 집을 떠난 것이 아닙니다. 내가 미래를 밝히 알아서 고향을 떠난 것도 아닙니다. 나는 단지 내 마음에 들리는 음성을 따라서 발걸음을 옮겼을 뿐입니다. 그가 떠나라고 해서 떠났고, 그가 가라고 해서 갔습니다. 그가 자손을 향한 별과 모래의 꿈을 주어서 꾸게 되었고, 그가 가나안 땅에 대한 소망을 주어서 품었습니다. 그가 어떻게 그것을 이루실 것인지, 그가 어떻게 나를 도우실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혹시 여러분은 아브라함이 어떤 방법으로든지 하나님께서 이삭을 구해주실 것을 믿고 제단을 쌓고 칼을 들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가 하나님 앞에서 '믿음'이라는 제목의 연극을 했을까요? 아닙니다. 그는 알지 못하는 길을 그저 순종해서 간 것입니다. 구해주실 줄로 알고 행한 것이 아니라 그 다음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고 그저 순종한 것입니다. 실은 그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우리는 정말 많은 것을 아는 것 같고 많은 준비를 하고 사는 것 같지만 한 치 앞의 일도 알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내일의 일을 알지 못합니다. 아브라함은 이 다음의 일을 알지 못하고, 다만 지금 이 순간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에 칼을 겨누고 하나님과 직면해서 서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 믿음과 우리를 위해 독생하신 아들을 주신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만납니다.

 

욥은 자신에게 다가온 고난의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믿음으로 고백합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되어 나오리라”(23:10) 하나님만이 아시는 내 인생의 길을 지금 내가 지금 걷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고 하나님과 교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길을 걸으며 하나님 아닌 다른 것을 의지하여 마치 내가 내 인생의 길을 아는 것처럼 살고 싶어 합니다. 내 인생에 내가 주인이 되고 싶고, 내 소원이 이루어지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어느새 염려와 두려움이, 욕심과 소원이 우리의 마음에 있고, 세상의 가치와 만나고... 예수 잘 믿는 우상숭배자로 이 세상을 살게 됩니다.

 

제가 오늘 말씀을 시작할 때 첫 마디를 어떻게 드렸는지 기억하십니까? “요즘 교회에 아픈 성도들이 많습니다.”였습니다. 원하지 않아도 광야에 설 때가 온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2000년 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모리아산으로 부르신 이유는.... 믿음을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2000년이 지나서 그 산이 있던 자리에 십자가를 세우시고 예수님을 제물로 주신 이유는.... 구원을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다면 또 2000년이 지나서 하나님은 여러분과 저를 모리아 산으로 부르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욥의 고백에 답이 있습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방법으로 더욱 아름답게, 정금같이 단련시키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가득 채운 욕심을 제거하고 우리의 시선을 혼란스럽게 하는 우상을 제거하고 오직 하나님 앞에 서는 성도와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성도는 하나님 앞에 설 때 가장 아름답고, 교회는 십자가와 함께 할 때 가장 거룩합니다. 우상이 아닌 하나님, 세상이 아닌 십자가를 품는 초대교회와 성도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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