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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사람의 우상 na kim 2017-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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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3. 5.

 

* 본 문 : 창세기 2931-35절 말씀

* 제 목 : 사람, 사람의 우상

 

언제인지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습니다만 여러분께 김춘수 시인의 이라는 시에 대해서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실은 제게 있어서 이 시는 한 때 시인의 꿈을 꾸게 했던 대단한 시입니다. 어쩌면 이렇게 간략하고 정제된 언어로 사람의 마음과 관계를 표현할 수 있을까...? 참 좋은 시라고 생각했습니다. 다시 그 시를 읽어드립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아직도 시의 전문을 암송하는 몇 안되는 시 중 하나입니다. 일반적으로 이 시는 언어와 존재와 관계에 대한 시라고 해석합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이 시에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 대한 간절한 열망이 있습니다. 나의 이름과 존재에 대해 의미를 부여해주는 다른 사람들 속에서 내가 참된 행복과 삶의 의미를 찾는다는 고백입니다. 한참 감수성이 예민할 때 이 시를 암송하면서 나도...누군가의 꽃이 되고 싶다...” 참 좋은 말이라고 생각했고, 정말 그렇게 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나이가 이쯤 되다보니... 그게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도 그는 이미 꽃이었고, 누군가가 나의 이름을 불러주고 삶의 의미를 부여해주지 않아도 나 또한 이미 꽃이 아니었을까요? 사람이 다니지 않는 들판에서 이름 없이 피어도 꽃이요, 푸른 들풀과 함께 하늘과 구름을 노래하고 있어도 꽃이요, 고속도로 씽씽 달리는 가을 길 코스모스도 꽃이요, 잘 가꾼 정원에 옹기종기 피어나도 꽃입니다. 화려한 장미도 꽃이요, 장미를 아름답게 꾸미는 안개꽃도 꽃이요, 잔디와 함께 자라는 클로버도 꽃입니다. 겨울 지나 화사한 봄과 함께 피어도 벚꽃이며, 추운 겨울 흰 눈 속에 붉게 피어도 동백꽃입니다. 사람들이 보고 부르고 좋아해야 꽃이 되는 것이 아니라, 꽃으로 지음 받았고 꽃으로 살다가 꽃의 이름으로 지게 될 것입니다. 꽃은 스스로 꽃입니다. 다른 사람의 시선과 부름이 나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과 바람과 별과 구름 속에서 나는 이미 꽃으로 지음 받았고, 피어났고, 살고 있습니다. ‘이라는 시를 가만히 암송해 봅니다. 좋은 시이지만 꼭 이 시처럼 되지 않아도 또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누가 나를 인정해주지 않아도, 사랑해주지 않아도, 꽃으로 불러주지 않아도 스스로 꽃일 수 있을 때가 가장 아름답습니다. 봄이 오는 들판에 꽃들이 가득합니다.

 

1. 야곱의 일생

족장의 시대, 즉 아브라함에서 이삭으로, 야곱으로 이어지는 시대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택하시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계시하기 시작하던 때였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선택하십니다. 그의 긴 여정이 시작됩니다. 그런데 그 길이 쉽지 않습니다. 꽃길이 아닙니다. 황금길도 아닙니다. 메마른 광야를 지나는 길이요, 생명과 안전을 보장받지 못하는 길입니다. 영광도 없고 번영도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약속의 길을 갑니다.

 

아브라함에서 이삭까지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초점이 있습니다. 그런데 야곱부터는 다릅니다. 그에게는 하나님의 부르심과 예정하심보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가 하는 것이 더 중요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하나님을 떠난 것은 아닙니다. 그는 여전히 하나님의 언약과 복 안에 있기를 원합니다. 다만 그 속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자신의 방법으로 얻고자 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과 야곱의 소원 - 이것이 야곱의 삶을 요약하는 말일 수 있습니다.

 

야곱의 삶에는 크게 두 가지 소원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사람을 향한 소원이요, 다른 하나는 성공을 위한 소원입니다.

 

2. 사람을 향한 소원 - 라헬을 내 아내로

 

오늘은 야곱이 삶에 뿌리내린 두 가지 소원 중에서 사람을 향한 소원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물론 다음 주에는 성공에 대한 소원을 생각하겠습니다. 여러분, 야곱은 누구에 대한 강력하고 뜨거운 소원으로 살았을까요? , 다름 아닌 사랑하는 아내 라헬입니다.

 

사람이 드물었던 그 시대에 라헬은 야곱이 위기의 순간에 만났던 세상에 가장 아름다운 한 사람으로 각인되었습니다. 창세기 299절에 보면 야곱과 라헬이 만나는 장면이 소개됩니다. 꽤 낭만적입니다. 야곱은 아버지 이삭을 속이고 장자의 축복을 받은 후 형 에서를 피해서 삼촌 라반의 집으로 가던 중이었습니다. 들에서 양을 치는 라헬을 극적으로 만나게 됩니다. 11절을 보면 야곱은 라헬에게 입 맞추고 소리 내어 울며 자신의 처지를 말합니다. 그가 아버지와 어머니와 심지어 하나님 앞에서도 흘리지 않았던 눈물을 한 여인 앞에서 흘렸고, 이후에 그의 마음과 정신을 다 빼앗겨 버렸습니다. 그는 라헬을 아내로 얻기 위해 14년을 일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 사랑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라헬만 있으면 내 삶에 충분한 위로와 만족이 있을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사람이 야곱의 인생의 목적이 된 것입니다.

 

야곱의 인생을 전반, 중반, 후반으로 나눈다면 각 단계에 중요한 사람이 있습니다. 전반에는 이삭이 중요합니다. 그로부터 장자의 복을 받아야 합니다. 후반에는 요셉에 중요합니다. 잃었다가 얻었고, 그로 말미암아 애굽으로 들어갑니다. 중반에 가장 중요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라헬입니다. 라헬만 있으면 행복하고 만족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3. ‘눈 뜨니 레아

 

어느 신학자는 야곱의 삶을 표현하기를 눈 뜨니 레아!”라고 했습니다. 저는 이 표현이 참 기가 막힌다고 생각합니다. 야곱이 라헬을 얻는 과정을 봅시다. 7년을 수일처럼 일해서(29:20) 드디어 라헬과 혼인하는 줄 알았습니다.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취해서 침소에 든 신랑 야곱에게 라반은 레아를 보냅니다. 25절을 보면 당황한 야곱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야곱이 아침에 보니 레아라”(29:25) 라헬인 줄 알았습니다. 행복해질 알았습니다. 그런데 눈을 떠보니 레아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롭게 할만도 한 것 같아서 선악과를 먹습니다. 그런데 먹고 보니 하나님 앞에 범죄했습니다. 사울왕은 사람들로부터 인정만 받으면 더 위대한 왕이 될 줄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재물을 나눠주고 자신이 제사를 드리고 보니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사람들에게 인정만 받으면 다 될 것 같았습니다. 거짓으로 재물을 바쳐서라도 인정받고 싶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진노를 만납니다. 어떤 분들은 그렇게 말하더군요. 미국 와서 신분 때문에 고생을 워낙 많이 해서 신분만 안정적으로 얻으면 소원이 없겠다고 했는데... 이혼하게 되고 자녀들은 원하는 대로 성장하지 않고 삶이 더 힘들다고 말입니다. 사업만 성공하면, 직분만 받으면, 저 사람의 사랑을 얻기만 하면, 결혼만 하면...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의 마음에 자리잡은 소원만 이루면 의미있고 행복한 삶을 살 것 같습니다. 하지만 과연 그렇습니까? 눈을 떠보니 레아가 아니던가요? 세상은 나보다 더 간교하고, 현실은 나의 계획보다 단단하지 않던가요? 오래 고민하고 계산하고 심지어 기도하고... 결정했는데, 눈을 떠보니 얻은 것은 하나요, 잃은 것은 모든 것일 때가 있지 않던가요?

 

자신의 소원을 우상으로 섬기고 결국 사람을 우상으로 섬겼던 야곱의 삶에서 불행은 반복됩니다. 장자의 축복만 받으면 될 것 같았는데 가족을 잃었고, 라헬만 얻으면 될 것 같았는데 눈을 뜨니 레아이고, 그래서 7년을 더 일해서 라헬을 얻었는데... 라헬은 일찍 죽습니다. 라헬의 아들 요셉을 끔찍하게 사랑했더니 다른 아들들이 질투하여 잃고 말았습니다. 얻은 줄 알았는데, 고개를 돌려보니 잃고 말았고, 행복할 줄 알았는데 눈을 떠보니 불행입니다. 성도 여러분! 그것이 바로 우상입니다. 그것만 얻으면 행복해질 수 있다고 거짓으로 우리를 유혹하는 것 - 우리 안에 믿음과 함께 자리 잡은 우상입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언약의 계보를 잇는 사람이었지만 그 안에 사람이라는 우상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언약의 성취를, 사람을 얻으므로 행복의 성취를 원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통해 언약의 성취를 이루십니다. 그러나 그는 사람을 통해 얻는 행복에는 처절하게 실패합니다. 사람은 왜곡된 마음 속에서 사람의 우상이 됩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가로막습니다.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가로막습니다.

 

4. 원하지 않았던 한 사람

 

야곱의 삶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람은 오히려 레아입니다. 야곱 안에 있는 우상에 대해 나누는 첫 말씀은 레아에 대한 묵상으로 마치려고 합니다.

 

성경이 레아와 라헬을 소개할 때 이렇게 대조합니다. 레아는 시력이 약하고 라헬은 곱고 아리따우니”(29:17) 라헬은 곱고 아름답다고 했습니다. 반대되는 말은 무엇일까요? 대조가 되려면 외모에 대해 평가하는 말이 들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이 레아의 시력이 약했다고 말합니다. 아마도 레아는 많이 못났는데 특히 눈에 심각한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 라반은 그런 방식으로 레아를 시집보내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아무도 그녀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여호와께서 레아가 사랑 받지 못함을 보시고...”(29:31)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녀를 돌아보십니다. 31절 하반절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여호와께서 레아가 사랑 받지 못함을 보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나..”(29:31) 그녀의 약점과 불행에 대해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셨다는 것입니다. 그녀가 자녀를 생산합니다. 고대 창세기의 시절에는 자녀의 이름이 부모의 신앙의 고백 혹은 기도였습니다. 성경이 기록하는 그녀의 아들들의 이름의 의미를 봅시다.

 

첫째는 르우벤입니다.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보셨으니 이제는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로다”(29:32) 둘째는 시므온입니다. “여호와께서 내가 사랑 받지 못함을 들으셨으므로 내게 이 아들도 주셨도다”(29:33) 셋째는 레위입니다. “내가 그에게 세 아들을 낳았으니 내 남편이 지금부터 나와 연합하리로다”(29:34) 셋째까지 낳았습니다. 그녀의 시선, 기도, 소원은 여전히 딱 한 곳만을 향하고 있습니다. 남편의 사랑입니다. 남편만 나를 좀 사랑해주면 내가 행복할텐데...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오지 않습니다. 셋째를 낳을 때까지 그녀는 하나님께서 그녀에게 태의 문을 열려주신 이유를 알지 못합니다. 넷째를 생산합니다. 이름은 유다입니다. 레아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29:35) 그녀는 남편에 대해서도... 아들에 대해서도... 지쳤습니다. 남편에게서, 아들에게서 시선을 거둡니다.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고백합니다.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놀라운 것은 이 넷째 아들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장자의 계보를 잇습니다. 이 아들에게서 왕들이 탄생합니다. 그리고 이 아들에게서 모두에게 버림을 받았던, 아무도 원치 않았던 한 사람, 하나님께서 이 땅에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합니다.

 

야곱의 인생은 하나님 안에서 우상을 사모했던 기록입니다. 그에게 있어서 우상은 사람으로 다가왔습니다. 사람을 통해서 만족과 평안을 얻으려 했습니다. 실패합니다. 하나님은 왜 야곱의 이렇게 어리석은 삶을 방대한 양으로 기록하셨을까요? 그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렇습니다. 사람에게 인정받고 사랑받으려고 합니다. 사람에게서 만족을 얻으려 합니다. 아내가, 남편이 우상이 됩니다. 자녀가 내 삶의 행복과 성공을 결정하는 우상이 됩니다. 사람으로부터 받는 인정과 사랑과 칭찬이 우리 인생의 가치가 되고 목표가 됩니다. 야곱의 가정에 우상을 벗어나는 때를 보시기 바랍니다. 그 우상을 잃을 때입니다. 레아가 야곱이라는 우상을 잃을 때 하나님을 사모하게 되고, 언약의 계보를 이을 유다를 생산합니다. 야곱이 우상을 극복하는 시기는 안타깝게도 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부르시면 내 인생을 걸었던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다는 것 - 마지막 시간에 그 진리를 깨닫는다면 우리는 도대체 얼마나 어리석은 사람들인가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언약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사람이 나를 사랑해주지 않아도 하나님, 사람이 나를 인정해주지 않아도 하나님, 사람이 나를 실망시키고 힘들게 하고 낙심케해도 오직 하나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참된 만족이 있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우리가 물어야 하는 것은 얼마나 외모가 출중한가? 얼마나 인정받는가? 얼마나 능력이 있는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린도 교회에 주신 말씀에는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이 제시됩니다. 그것은 우리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 안에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가장 아름다운 피조물, 가장 아름답고 신선한 꽃이 됩니다. 믿음의 조상 중 한 사람인 야곱조차 극복하기 어려웠던 사람의 우상, 우리는 믿음으로 넉넉하게 이길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꽃은 꽃으로 지음 받았고,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 받았습니다. 성도와 교회는 하나님의 뜻 안에, 그 품 안에 있을 때 가장 아름답습니다. 사람의 시선이 아닌 하나님의 뜻으로 해석되는 아름다운 인생, 우리 초대교회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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