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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서원(誓願) na kim 2017-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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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3. 12.

 

* 본 문 : 창세기 2820-22절 말씀

* 제 목 : 그의 서원(誓願)

 

일반적으로 사회에서는 쓰지 않지만 교회에서 신앙적인 분야에 사용하는 단어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 서원’(誓願)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신학교에 들어온 이유를 물어보면 의외로 많은 신학생들이 어릴 적 부모님의 서원에 대해서 말합니다. 때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신앙적인 결단을 하고 그것을 잊기도 하고, 지키지 못해 괴로워하기도 하고, 지키려고 발버둥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모든 서원은 다 신앙적인 것일까요? 한번 서원을 했다면 꼭 지켜야 하는 것일까요? 잘 잊거나 쉽게 타협하는 우리들... 좀 걱정되지는 않으십니까?

 

지난 주일에 우리는 야곱 안에 있었던 사람이라는 우상에 대해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오늘도 이어서 생각하려 합니다. 본문에서 야곱은 아버지의 집을 떠나 자신이 선택한 광야길을 시작합니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서원합니다. 기도와 서원은 신앙적 행위이고,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하는 것입니다. 기도와 서원을 하는 그의 마음이 우상과 관련이 있을 수 있을까요?

 

1. 서원(誓願)이란?

 

서원이란 하나님에 대한 헌신의 약속을 말합니다. 단순히 수동적인 순종을 넘어서서 내가 무엇을 하겠다고 먼저 약속하는 것입니다. 기도나 결단을 통해서 개인적으로 은밀하게 할 수 있고, 공개적으로 선언할 수도 있고, 글로 써서 보관할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나의 결단에 하나님을 개입시켜서 약속이 될 수 있도록 했다면 그것은 서원입니다. 성경은 서원할 것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이나 율법의 개념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다만 우리가 허락하신 은혜에 감동하여 하나님께 어떤 헌신을 약속했다면 반드시 기억하고 지켜야 한다고 말합니다.

 

네가 서원하지 아니하였으면 무죄하리라 그러나 네 입으로 말한 것은 그대로 실행하도록 유의하라 무릇 자원한 예물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 네가 서원하여 입으로 언약한 대로 행할지니라” (23:22~23)

 

네가 하나님께 서원하였거든 갚기를 더디게 하지 말라.... 서원한 것을 갚으라 서원하고 갚지 아니하는 것보다 서원하지 아니하는 것이 더 나으니 네 입으로 네 육체가 범죄하게 하지 말라. 천사 앞에서 내가 서원한 것이 실수라고 말하지 말라 어찌 하나님께서 네 목소리로 말미암아 진노하사 네 손으로 한 것을 멸하시게 하랴”(5:4~5)

이 두 말씀에서 서원에 대해 기본적인 이해가 되셨습니까? 서원은 내가 하나님께 자원해서 드리는 약속의 개념이기 때문에 그것을 지키지 않는 것은 입으로 육체를 범죄하게 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2. 두 사람의 서원

 

야곱과 함께 서원에 대표적인 한 사람이 있습니다. 아들을 기도하는 한나입니다.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서원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보시고 나를 기억하사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시고 주의 여종에게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의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삼상 1:10~11)

 

너무 멀리가면 잊으실테니까 한나의 기도와 야곱의 기도를 비교해 봅시다.

 

야곱이 서원하여 이르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시어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28:20-22)

 

이 두 서원에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차이를 말하기 전에 먼저 같은 점을 생각해 봅시다. 그들은 자신의 삶의 절박한 위기에서 기도를 출발합니다. 한나는 아들을 간절히 원하고 있고, 야곱은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면서 염려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두 사람 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그들에게는 소원이 있습니다. 한나는 아들을 소원합니다. 야곱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켜달라고 기도합니다. 먹을 것과 입을 옷을 주시고 평안하게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게 해달라고 간구합니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서원합니다. 한나는 아들을 주시면 그 아들을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말합니다. 야곱은 십일조를 서원합니다. 당시에 십일조의 의미는 왕에 대한 조세적 성격이 강했습니다. 자신을 포함한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고백하고 인정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차이는 무엇입니까?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소원을 들어주시기를 기도하면서 서원을 했습니다. 그런데 만일 하나님께서 그들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으시면 어떻게 될까요? 한나의 기도에는 그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시지 않으면 그 아들을 드릴 수조차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셔도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입니다. 내 삶에 대해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에 대해 한나는 조금도 흔들림이 없습니다. 그런데 야곱의 기도를 보십시오. 그는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나와 동행하시고 나를 부모의 집으로 돌아오게 해주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 되고, 내가 세운 이 돌기둥은 하나님의 집이 될 것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이 야곱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면... 그가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보호하심을 받지 못하면... 하나님이 내 뜻대로 응답하지 않으시면... 내 소원이 하나님을 통해서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러면 하나님과 나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야곱의 서원에 있어서 더 중요하고 가치있는 것은 자신의 안전과 성공입니까?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입니까?

 

3. 두 사람의 예배

 

두 사람의 삶의 결과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한나의 기도에 하나님이 응답하십니다. 아들 사무엘이 태어납니다. 그 이름의 뜻은 하나님께 구한다입니다. 한나는 마치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서 아들 이삭을 놓고 고민하듯 고민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결단합니다. 제사장 엘리에게로 갔습니다. 한나가 이르되 내 주여 당신의 사심으로 맹세하나이다 나는 여기서 내 주 당신 곁에 서서 여호와께 기도하던 여자라 이 아이를 위하여 내가 기도하였더니 내가 구하여 기도한 바를 여호와께서 내게 허락하신지라 그러므로 나도 그를 여호와께 드리되 그의 평생을 여호와께 드리나이다 하고 그가 거기서 여호와께 경배하니라”(삼상 1:26-28) 그녀가 자신의 생명보다 귀한 아들 사무엘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녀와 하나님과의 관계 때문입니다. 소원을 들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오, 거절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뿌리는 분이 하나님이시오, 거두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한나는 그 믿음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가 거기서 여호와께 경배하니라한나 신앙의 핵심은 이 한 구절로 설명됩니다. 아들이 없어도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이요, 슬프고 조롱당해도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이요, 아들을 주셔도 하나님을 예배하고, 아들을 하나님께 드려도 예배하는 사람입니다. 그녀에게 있어서 소원의 성취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였습니다.

 

야곱은 어떠합니까? 과정을 일일이 다 볼 필요는 없습니다. 그는 혼자 나갔지만 가족을 이루었고, 빈손으로 나갔지만 부자가 되었습니다. 심지어 그의 마지막 염려와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형님 에서와도 화해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는 두려움 속에서 에서를 만나지만 형 에서는 그를 끌어안고 입을 맞춥니다. 그가 고향을 떠날 때의 기도는 넘치게 응답되었습니다. 그는 무엇을 했을까요? 3316-17절을 봅시다. 이 날에 에서는 세일로 돌아가고 야곱은 숙곳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집을 짓고 그의 가축을 위하여 우릿간을 지었으므로 그 땅 이름을 숙곳이라 부르더라”(33:16-17) 그는 자신을 위해 집을 짓고 가축들을 위해 축사를 짓습니다. 그리고 또 그는 좋은 땅을 발견합니다. 세겜 족속이 살고 있던 세겜땅입니다. 그는 그곳에서 땅을 삽니다. 정착을 원한 것입니다. 서원했던 벧엘도, 십일조도, 조상들에게 약속했던 가나안도 그의 마음에 없습니다. 야곱이 밧단아람에서부터 평안히 가나안 땅 세겜 성읍에 이르러 그 성읍 앞에 장막을 치고 그가 장막을 친 밭을 세겜의 아버지 하몰의 아들들의 손에서 백 크시타에 샀으며 거기에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 불렀더라”(33:18-20) 여러분, 야곱이 예배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그는 고향을 떠날 때도 예배했고, 돌아와서도 예배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그는 오직 자신을 위해 예배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예배의 목적은 하나님께 있지 않았습니다. 오직 자신에게 있었습니다. 서원도 잊고 언약도 잊습니다.

 

4. 벧엘로 올라가라!

 

두 사람이 간절히 기도하며 서원했습니다. 하나님은 신실하게 응답하셨습니다. 이제 두 사람은 예배합니다. 그런데 한 사람의 예배는 하나님께 기도했던 서원으로 드리는 예배였습니다. 한 사람은 자신의 또 다른 필요를 위해 예배합니다. 그 결과는 무엇일까요?

 

한나의 삶에는 평강과 감사가 있습니다. 그러나 야곱의 삶은 그렇지 않습니다. 창세기 34장으로 가면 그의 실패가 시작됩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가 혼자이고, 아무 것 가진 것 없을 때는 단 한번의 실패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모든 걱정과 염려가 없고 그는 부자인데... 그는 넘어지기 시작합니다. 레아에게서 난 딸 디나가 그들이 정착한 세겜 족속 추장의 아들 세겜에게 욕을 당합니다. 디나의 오빠인 시므온과 레위가 격분합니다. 계략을 써서 모든 세겜의 남자들을 다 죽이고 노략합니다. 야곱은 당황합니다. 다른 족속들이 자신을 해칠 것이라 두려워합니다. 여전히 자신의 삶에 왜 이런 일이 닥쳤는지 깨닫지 못합니다. 그때 하나님이 나타나십니다. 야곱에게 서원과 믿음을 회복할 것을 명령하십니다. 351-3절을 봅시다.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야곱이 이에 자기 집안 사람과 자기와 함께 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상들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너희들의 의복을 바꾸어 입으라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내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내가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제단을 쌓으려 하노라 하매”(35:1-3)

 

하나님의 명령을 잘 보시기 바랍니다. 1절에서 하나님은 그를 벧엘로 올라가라고 말씀하십니다. 벧엘은 그의 서원이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2절에서 야곱이 가족들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가족들에게 있는 이방 신상들과 문화를 버리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그동안 어떠했다는 말입니까? , 야곱의 집은 우상이 함께 들어와 있는 집이었습니다. 언약의 계승자 야곱의 집에 말입니까? 하나님께 기도와 제사를 드리는 야곱에게 말입니까? ,, 그렇습니다. 야곱의 집이 문제가 아니라 야곱 자신에게 하나님을 믿는 믿음보다 자신의 소원과 필요가 더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모든 우상은 사람 안에 있는 두려움과 염려, 혹은 욕망과 탐욕에서 출발합니다. 그것이 형상화되면 우상입니다. 야곱의 집에 우상이 가득했습니다. 야곱의 마음에 탐욕이 가득했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언약을 이어야 할 그의 삶과 가정에 믿음 아닌 것, 언약 아닌 것, 하나님의 약속이 아닌 것을 제거해 나가기 시작하십니다. 그가 비로소 벧엘로 올라갑니다. 하나님과의 언약을 갱신합니다. 그런데 그곳을 떠나면서 그는 그토록 사랑했던 라헬을 잃습니다. 고향으로 돌아가서 아버지를 만납니다. 그런데 아버지 이삭도 죽습니다. 큰 아들 르우벤은 자신의 처인 빌하와 통간하여 가정과 명예를 더럽힙니다. 둘째와 셋째 시므온과 레위는 수많은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들은 모두 장자가 되지 못합니다. 장자를 계승하게 된 유다는 며느리인 다말에게서 예수님의 조상이 되는 베레스와 세라를 낳습니다. 그 와중에 가장 사랑했던 아들 요셉을 잃습니다. 20년 가까이 요셉이 죽은 줄로 알고 절망 가운데 삽니다. 야곱의 삶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 것이 없었는데, 원하는대로 되는 것이 없는 삶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결국 야곱 안에 자리잡은 모든 우상을 제거하시고 그를 애굽 땅으로 밀어 넣으십니다. 그의 후손을 노예가 되게 하십니다. 그들은 400년간을 신음하면서 삽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으면 그들은 아무 것도 아니며, 하나님이 아니면 아무런 소망이 없다는 사실을 고백할 때 비로소 하나님은 그들을 애굽에서 약속된 가나안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내십니다.

 

종교개혁자 존 칼빈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명예를 최고로 여기면 야심이 그 사람을 장악한다. 돈을 최고로 여기면 탐욕이 하나님의 나라를 점령한다. 쾌락을 최고로 여기면 그 사람은 방종에 빠진다.” 심지어 야곱이 그랬습니다. 그의 가족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예배하면서도 서원을 버리고, 우상을 그들의 품 안에 품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 안타깝게도 예수를 믿어도 그렇습니다. 때로 우리는 숨어있는 우리 마음의 또 다른 주인을 느낍니다. 그것은 분노로, 염려로, 두려움으로, 상처로, 강력한 소원으로, 탐욕으로, 성공에 대한 욕구로, 명예와 쾌락으로 우리 안에 숨어 있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세겜에서 만족하게 하고 벧엘로 올라가는 길을 가로막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애굽에서 만족하게 하고 약속의 땅 가나안을 잊도록 만듭니다.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 만족하고 집착하게 하고, 우리가 하나님의 피로 값주고 사신 사랑받은 자녀임을... 우리가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임을 망각하도록 만듭니다. 야곱이 가족들에게 회개와 함께 명령했던 말씀을 함께 읽으면서 마치려고 합니다.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으면서 함께 읽도록 합시다.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내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내가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제단을 쌓으려 하노라 하매”(3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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