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상과 은혜(4)- 부요한 사람 | na kim | 2017-04-2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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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4. 23. * 본 문 : 누가복음 19장 1-10절 * 제 목 : 우상과 은혜(4) - 부요한 사람 여러분은 혹시 이 사람이 누군지 아십니까?(사진 1,2) 예, ‘철강왕 카네기’라고 불리는 사람입니다. 록펠러와 함께 19세기 미국 산업을 대표하는 기업가이기도 합니다.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난 그는 영국의 산업혁명 이후 일자리를 잃게 된 아버지를 따라서 미국으로 건너와 펜실바니아의 피츠버그에 정착합니다. 철도회사에서 취직을 하게 되었는데 기차의 장거리 노선에 침대칸을 도입하는 아이디어로 큰 돈을 벌게 됩니다. 그렇게 번 돈으로 농장을 구입했는데, 농장에서는 석유가 터집니다. 이름 하여 벼락부자가 됩니다. 그는 당시 미국 산업사회의 성장을 바라보며, 철강산업이 모든 산업의 기초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예견합니다. 카네기 철강을 세웠고, 30대에 이미 세계적인 거부가 되었습니다. 그의 전성기 때의 재산을 현재로 환산하면 약 3000억 달러로, 전성기의 빌 게이츠보다 3배 이상 많았다고 합니다. 그는 인생의 후반부에 자선과 기부로 유명했습니다. 그는 "통장에 많은 돈을 남기고 죽는 사람처럼 치욕적인 인생은 없다." "부자로 죽는 것은 불명예스러운 일이다" 등의 명언을 남겼고, JP 모건에 자신의 철강회사를 판 자금으로 재단을 설립하여 각종 사회사업을 활발하게 시작했습니다. 미국의 명문대 중 하나인 카네기 벨론 대학이 그의 기부로 세워진 대학이며, 미국 전역에 카네기의 이름으로 2500개의 도서관이 세워졌습니다. 그가 각종 교육 및 사회단체에 기부한 총액은 3억달러를 넘어섰는데, 당시 일본의 1년 예산이 1억 3천만달러였습니다. 그는 33세의 나이에 이른 성공을 거두고 세계적인 부자가 되고 난 다음 자신의 삶에 대해 고민했습니다. 그리고 그 나이에 ‘나에게 보내는 글’이라는 놀라운 비망록을 썼습니다. 그는 자신의 마음의 상태를 냉정하게 바라보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인간에게는 우상이 필요한 것 같다. 우상숭배 중에서도 최악의 형태는 부를 축적하는 것이다. 돈을 숭배하는 것보다 더 비열한 우상숭배는 없다. 나는 무슨 일을 하든지 지나치게 밀어붙이는 편이고, 따라서 나는 보다 가치 있는 삶을 위해서 신중하고 바르게 선택해야 한다. 사업의 성공에 푹 빠져서 더 짧은 시간에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계속 몰두한다면 나는 틀림없이 저급한 인생이 되어 회복할 수 없는 지경에 빠지고 말 것이다. 나는 서른다섯에 은퇴해야겠다. 그리고 그 다음 2년은 매일 오후에 공부하며 체계적으로 독서하며 보다 나은 삶을 준비해야겠다.” 1. 'Watch Out!' 카네기의 전기를 썼던 ‘조셉 프레이저’는 그를 동시대를 살았던 록펠러나 포드, 혹은 모건에 비해서 탁월한 사람이었다고 평가합니다. 짧은 인생에서 감당할 수 없는 성공을 거둔 사람이 그 성공에 취하지 않고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는 것은 참 대단한 일입니다. 다만 하나 확인할 것은 그가 과연 결단한 것처럼 2년 후 물질에 얽매였던 삶으로부터 은퇴하고 보다 고상한 삶을 위해서 헌신할 수 있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는 실패합니다. 카네기에 대한 또 하나의 평가는 그가 수많은 노동자들의 희생으로 부를 축적했다는 것이고 그의 선행과 기부는 노동자들의 피와 눈물을 외면한 결과였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그는 미국 전역에 2500여개의 도서관을 건립하지만 그의 제철소에서 일하던 한 노동자는 이렇게 인터뷰합니다. “우리는 도서관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노동환경이 개선되고 임금이 인상되기를 원합니다.” 당시 제철 노동자들은 바닥이 뜨거워서 신발 밑에 나무판을 대고 12시간 교대근무를 했고, 대부분 40세를 전후로 사고나 질병으로 죽어갔습니다. 1892년 임금협상에서 그의 회사는 노동자들과 대립하여 총격전까지 벌여서 10여명의 사망자를 내기도 합니다. 결국 주정부에 요청하여 8000명의 군인이 투입되었고, 군대의 감시 하에 공장이 가동되었습니다. ‘교육과 사회사업’이라는 얼굴과 ‘독점과 노동탄압’이라는 또 다른 얼굴 - 모두 카네기의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12장에서 재미있는 상황을 맞이합니다. 예수님의 복음을 듣던 한 사람이 자신과 형의 재산 분배에 개입해주기를 요청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눅 12:15/Then he said to them, "Watch out! Be on your guard against all kinds of greed; a man's life does not consist in the abundance of his possessions.) 예수님은 복음을 들으면서 재물에 대해 고민하는 그에게 ‘Watch Out!'이라고 소리치셨습니다. 생명의 복음을 들으면서 재물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큰 소리로 경고하십니다. 스스로 경계하고 조심하지 않으면 귀는 복음에, 마음은 재물에 헌신하게 될 것입니다. 앤드류 카네기는 아마도 청년의 때에 자신의 마음과 삶에 자리 잡은 성공과 재물이라는 우상을 발견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뿌리 채 뽑지 못했습니다. 그 자리를 좀 물리고 사회사업을 통한 보람과 명예라는 또 다른 우상을 심었을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큰 소리로 “Watch Out!"이라고 외치셨는지 아시겠습니까? 우리가 세심하게 경계하지 않으면 쉽게 속거나 속이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카네기는 조금 덜 나쁜 우상을 선택한 것 같습니다. 재물 대신 명예를, 이익 대신 보람을 선택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보람과 명예는 결국 그가 이루었던 성공과 부(富)의 또 다른 얼굴이었을 뿐입니다. 2. 삭개오, 예수를 만나다. 삭개오가 예수를 만나는 장면은 유명합니다. 그는 키가 작았고, 여리고 지역의 세리장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를 보려고 나무 위로 올라갑니다. 예수가 어떤 가르침을 전하는지는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자신의 삶과는 반대됩니다. 하지만 그는 무엇인가 갈급합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한 채 그는 예수를 보기 위해 나무까지 올라가게 됩니다. 여러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그는 지역에서 잘 알려진 고위 공무원입니다. 사람들이 모여서 웅성거리고 있는데,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는 한 고위 공무원이 가로수에 기어오릅니다. 체면이 말이 아닙니다. 키가 작은 자신의 약점이 드러나는 일이요, 또 무슨 뜯어먹을 것이 있어서 이런 곳까지 왔느냐는 비난을 들을 일입니다. 그런데 삭개오가 그 일을 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성경이 삭개오의 행동을 해석하기를 “He wanted to see who Jesus was”(눅 19:3)라고 했습니다. 예수가 누구인지 보고 싶어 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를 발견하십니다. 그리고 그에게 첫마디 건내는 말은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눅 19:5)입니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이 삭개오를 은혜 가운데 초대하고 있습니까? 삭개오가 어떤 삶의 질적 변화를 만들기 전에 예수님이 먼저 그를 부르십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우리의 구원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구원은 우리의 도덕적 성취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열매입니다. 3. 두 가지 선택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예수님을 만난 삭개오의 두 가지 선택에 관한 것입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집으로 영접하고 말씀을 들은 후 감격에 사로잡힙니다. 은혜가 그의 삶을 인도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두 가지 약속을 합니다. 첫째, 그는 자신의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내놓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만일 삭개오가 유대인으로서의 모세의 율법을 지키기로 마음을 회복했다면 1/10을 내겠습니다...라고 결단하면 됩니다. 유대인들의 신앙의 회복은 1/10을 내는 것으로 시작하기도 했습니다. 1/10을 낸다는 것은 내가 당신의 소유가 되었음을 고백하는 것이면서 신앙의 고백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삭개오는 절반을 드리겠다고 합니다. 그는 단순히 율법만 지키는 삶이 아닌 자신에게 허락된 은혜가 인도하는 삶을 살기로 결단한 것입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초대교회는 십일조에 집착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모자람이 없었고 풍족하게 나누고 섬기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팀 겔러 목사는 자신에게 십일조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물어보는 한 성도에게 이렇게 물어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과 신약의 교회 성도들 중에서 더 큰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짐승을 제물로 드리고 죄 사함의 상징을 얻었습니다. 신약의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가 제물이 되셔서 죄사함을 받았습니다. 누가 더 큰 은혜를 입었습니까? 당연히 신양의 교회와 성도들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이스라엘에게 요구되는 것이 율법이면서 십일조라면 신약의 교회와 성도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받은 은혜에 합당한 삶입니다. 지금 삭개오는 가장 좋은 예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은혜는 받는 만큼, 그리고 깨달은 만큼 감사하는 것입니다. 또한 삭개오는 두 번째 약속을 합니다. 그것은 혹시 자신이 다른 사람의 것을 부당하게취한 것이 있으면 4배를 갚겠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구되는 율법이 있었습니다. 레위기 5:16과 민수기 5:7을 보면 부당한 이익을 취한 일이 있다면 20%정도의 이자를 붙여서 돌려줘야 합니다. 소위 법정이자와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삭개오는 무엇이라 말합니까? 내가 100을 부당하게 취했다면 400%를 돌려주겠다고 말합니다. 우와... 만일 절반을 나눠주고 400%를 갚고 난 다음 재산을 탕진하면 어떻게 될까요?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 19:9-10) 삭개오는 두 가지 선택을 합니다. 하나는 허락하신 은혜에 감사하는 삶을 살기로 결단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이전에 지은 잘못에 대한 정의를 결단하는 것입니다. 내 재물의 절반으로 감사를, 남은 절반으로 정의를 실현하는 삭개오의 삶에 우리 주님은 구원을 확증하시는 아름다운 선물을 주십니다. 이전에 재물은 삭개오가 악을 행하도록 지배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재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감사하는 수단이 되었습니다. 받은 사랑을 베푸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재물로부터 자유했더니 오히려 재물이 풍성해졌습니다. 4. 더 풍성한 삶을 위하여 예수님은 가난하실까요? 부자일까요? 성경은 예수님이 가난하다 말씀하십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8:9) 예수님은 왜 가난하게 되셨다고 했습니까? 우리를 부요하게 하려고...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부요한가..? 하는 것입니다. 질문을 좀 다르게 해 봅시다. 고린도후서 8장 9절의 말씀에 의하면... 삭개오를 부요하게 하시려고 예수님이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맞습니까? 초대교회를 부요하게 하시려고 예수님은 가난하게 되셨습니까? 맞습니까? 여러분과 저를 부요하게 하시려고 예수님께서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맞습니까? 그러면...삭개오는 부요하게 되었습니까? 예,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그는 단 한 푼 다른 사람에게 나눠줄 것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것을 부당한 방법으로 빼앗아 와야 할 만큼 지독하게 강퍅하고 가난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부자가 되었습니다. 소유의 절반을 뚝 떼어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줘도 더 주고 싶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혹시 부당하게 뺏은 것에 대해 4배가 갚아도 더 주고 싶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은혜가 그에게 임했더니 그는 부자가 되었습니다. 초대교회는 부요했습니까? 예, 그렇습니다. 성도들이 자신의 것으로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사도행전 4장 32-34절을 보면 핍절한 사람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성령이 임하고 은혜가 풍성했더니 재물이 성도들을 삶을 주장하지 못했습니다. 성도들이 하나님의 뜻과 은혜 가운데 재물을 제대로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영광이 나타났습니다. 은혜가 넘쳤고 재물이 넘쳤습니다. 그들은 부요했습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우리는 부요합니까? 주님께서 우리를 부요하게 하시려고 가난하게 되셨다고 했습니다. 만일 우리가 여전히 가난하다면...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를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받은 은혜를 무력화시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의 은혜를 입고도 부요하고 풍성한 삶을 살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가 마치 카네기처럼....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부요하게 하시려고 스스로 가난하게 되셨다는 것을 압니다. 은혜와 감사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결단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실천하기는 참 어렵습니다. 그래서 적당하게 타협합니다. 신앙생활을 하고, 교회생활을 하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우리는 여전히 가난하고 궁핍하게 더 재물을 소망하며 삽니다. 성경이 삭개오를 자랑하는 것은 그의 두 가지 결단과 변화가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은혜가 인도하는 삶, 하나님의 공평과 정의가 실현되는 삶이 거룩하기 때문입니다. 은혜로 말미암아 허락된 그의 삶의 풍요가 우리의 거울이 되기 때문입니다. 거짓된 신들의 세상, 물질이 신으로 숭배되는 세상을 사는... 사랑하는 초대교회 성도 여러분! 주님은 우리를 풍요하게 하시려고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주님 허락하신 은혜에 대하여, 우리에게 주신 사랑에 대하여 풍성한 삶의 열매가 있는 초대교회와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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