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상과 은혜(5)- 하루, 그리고 120년 | na kim | 2017-04-3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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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4. 30. * 본 문 : 창세기 6장 22절 * 제 목 : 우상과 은혜(5) - 하루, 그리고 120년
지난 3월 18일 뉴욕의 메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아주 대단한 경기가 열렸습니다. 세계 복싱기구인 WBA/WBC/IBF/IBO의 미들급 통합 타이틀전이 열린 것입니다. 챔피언타이틀을 많이 가지고 있던 개나딘 골로프킨이 방어하는 입장에서, WBA의 정규 챔피언이었던 다니엘 제이콥스라는 선수가 도전자의 입장에서 경기를 했습니다. 개나딘 골로프킨은 이 경기를 하기 전까지 37전승 33KO승의 전적을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아마추어 때도 전적이 화려한데, 무려 310승 10패였습니다.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땄고, 2년 후 아테네 올림픽에서는 은메달을 땄습니다. 프로에 데뷔한 후 2010년에 세계 챔피언이 됩니다. 강인한 체력과 강력한 펀치로 무패의 전력을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현존하는 세계 챔피언들 중 가장 강력합니다. 하지만 오늘 여러분께 소개하고 싶은 선수는 다니엘 제이콥스라는 선수입니다. 그는 아마추어 전적 137승 7패를 기록했고, 2007년 프로에 데뷔하여 단 한 번의 패배만을 기록하면서 승승장구합니다. 그런데 2011년 3월 이라크에 파견된 미군들을 위한 봉사활동을 하던 중에 허리에 이상을 느낍니다. 검사해보니 핸드볼크기만한 악성종양이 그의 척추를 감싸고 있었습니다. 골육종이라는 뼈에 발생하는 암이었습니다. 하반신이 마비되고 심장의 박동이 느려지고 있었습니다. 5월에 대수술을 했습니다. 앞으로 운동은커녕 걷기도 힘들 것이라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제이콥스의 트레이너 버질 헌터도 낙심했습니다. 유망한 선수를 질병으로 잃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수술을 마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아서 그는 깜짝 놀라게 됩니다. 제이콥스가 체육관에 나타난 것입니다. 버질 헌터는 한 스포츠 매체와 이런 인터뷰를 했습니다. “어느 날, 제이콥스가 전신보형기를 차고 체육관에 나타났어요. 샌드백 앞에 서더니 뻣뻣한 동작으로 “으어, 어으, 으어,어어,아으,우어” 하면서 여섯 번인가 휘둘렀어요. 그리고는 “오케이, 오늘은 이정도만 해야겠군, 버질, 내일 봐요” 라고 하면서 비틀비틀 돌아가는 거예요. 그리고 그는 정말로 다음 날 체육관에 돌아왔어요. 그 다음 날도, 다음 날도 계속 돌아왔어요." 제이콥스는 골육종으로 수술한 지 17개월 후 2012년 12월에 첫 경기를 가집니다. 조쉬 루테란이라는 선수를 1회에 KO로 눕힙니다. 이후 2016년 9월까지 모든 경기를 KO로 끝냅니다. ‘미러클 맨’이라는 별명을 얻습니다. WBA 세계 챔피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난 3월 가장 강력한 챔피언으로 인정받는 골로프킨과 여러 타이틀을 걸고 싸우게 된 것입니다. 1. 누가 이겼을까? 자... 여러분, 누가 이겼을까요? 누가 이기면 좋겠습니까? 경기 결과는 중요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다만 오늘 제가 제이코프를 여러분께 소개하기를 원하는 것은 그의 ‘지향성이 있는 꾸준한 일상’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지향성이 있는 일상’ - 지난 수요일 말씀을 나누면서 그 개념을 소개했습니다. ‘내면세계의 질서와 영적 성장’이라는 걸출한 책을 쓴 고든 맥도날드 목사가 자신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은사인 버논 그라운즈 박사를 소개하면서 사용한 개념입니다. 나이 90이 넘어서도 여전히 왕성한 의욕으로 더 아름답고 의미있는 삶을 살고 있는 스승을 보면서 그는 ‘지향성이 있는 일상’이라는 개념을 발견합니다. 매일 반복되는 잔잔한 일상에 하나님이 주신 큰 그림으로서의 인생의 의미와 목적, 가치관과 신앙이 함께 묻어난다는 것입니다. 스승은 이미 덴버 신학교의 학장의 자리는 은퇴했지만 꾸준하고 건강한 영적 생활과 관리로 90세 이후에도 이전보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면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를 노인으로, 이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스스로를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서는 날까지 하루하루 목적 있고 의미 있는 삶을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스승에게 큰 도전을 받았습니다. 제이코프와 골로프킨의 경기 결과... 혹은 그 이후에 그가 얼마나 더 대단한 성공을 거두는가 하는 것은 저의 관심의 영역에 있지 않습니다. 그가 앞으로의 경기마다 패배하거나 병이 깊어져서 다시는 사각의 링에 올라설 수 없었다고 하더라도... 그는 실패한 것이 아닙니다. 그가 인생의 과정에서 만난 문제에 쓰러지지 않고 “그래, 오늘은 여기까지... 내일은 다시 내일의 한걸음을 걸으면 되니까... 오늘은 충분히 목적이 있는 최선을 다했으니까... 오늘 내게 허락된 시간에 내가 걸어야 할 걸음을 충분히 걸었으니까....”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의 삶은 충분히 아름답고 의미 있습니다. 인생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인생에서 내가 원하는 결과를 얻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것은 곧 과거가 되고 그것을 지키거나 더 많이 이루기 위한 또 다른 과정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2. 성공이라는 신화 우리는 지난 주일에 ‘재물’이라는 우상에 대해서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쉽게 우리 인생의 목표가 되고 의미가 되고 주인이 됩니다. 그리고 오늘은 또 하나의 우상에 대해 생각하려 합니다. 그 우상의 이름은 성공 혹은 성취라는 이름으로 우리의 삶의 중심에 들어와 있습니다. 인생에서 성공이나 성취가 어떻게 우상이 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솔로몬에게서 잘 나타납니다. 그는 소위 성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전도서를 통해서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무엇이든지 내 눈이 원하는 것을 내가 금하지 아니하며 무엇이든지 내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내가 막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나의 모든 수고를 내 마음이 기뻐하였음이라 이것이 나의 모든 수고로 말미암아 얻은 몫이로다”(전 2:10) 무엇이든지 내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있게 된다는 환상, 나의 수고의 결과로 나를 즐겁게 하겠다는 환상, 내가 성공하면.... 내 꿈을 성취하면.... 내 인생의 의미와 가치를 내가 창출할 수 있다는 환상 - 이것이 바로 성공이라는 우상입니다. 자신의 인생에서 신이 될 수 있다는 환상입니다. 나와는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우상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대단한 모습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상은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는 가치관입니다. 우리가 성공을 우상으로 섬기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몇 가지 징후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성공과 삶의 안정을 연결시키는 생각입니다. 불안이 없는 안정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일정한 수준의 성공을 거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런 생각은 꽤 우리들 가까이에 있습니다. 그 정도만 이루면 행복하고 안정된 삶을 살 수 있을거야.... 스스로 최면을 겁니다. 두 번째는 자신이 이룬 일을 통해 자신의 가치를 평가하려고 합니다. 소위 업적(業績), 즉 사업과 연구를 통해서 쌓은 공적으로 삶을 평가합니다. 교만과 자기 비하를 오고 갑니다. 마지막으로 우리에게는 상실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마돈나를 다 아실 겁니다. 그녀는 이런 고백을 합니다. “언젠가는 나도 평범한 사람이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심이 나를 움직이는 힘이다. 나는 이미 대단한 성공을 이뤘지만 여전히 나는 성공을 지키기 위해 싸워야 한다. 나의 이런 투쟁은 끝난 적이 없고 앞으로도 절대 끝나지 않을 것이다.” 만일 여러분도 이런 생각 중 하나를 마음에 품은 적이 있다면... 여러분도 삶의 성공이라는 우상의 영향을 받고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3. 결과가 아닌 과정입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 모두가 속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내가 소위 사업에 성공하고 성공적인 노후를 설계하면... 그것이 우리의 인생의 결론이 될 수 있을까요? 다시는 걱정이 없고 염려가 없이 영원불멸하게 될까요? 그것으로 우리의 인생에 대한 평가는 끝나고 나는 가장 가치있고 의미있는 삶을 살아간 것일까요? 그래서 나는 후회 없는 성공하는 인생을 살아간 사람으로 기억될까요? 내가 얻은 성공과 명예는 결코 무너지지 않고 나를 계속 영광스럽게, 즐겁게 만들어줄까요? 솔로몬은 단호하게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는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시간의 비밀 앞에서 그 모든 것이 다 무너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모든 것은 헛됩니다. 왜 그럴까요? 한 사람의 일생에 일어나는 모든 일은 결과가 아닌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태어나고 성장하고 노화가 진행되고 그리고 하나님을 만납니다. 때로 그 과정이 아주 짧기도 하고 사고나 질병으로 중단되기도 하고... 그것보다 조금 더 이 땅에서 기쁨과 슬픔을 누리다가 하나님 앞으로 가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사람들은 많은 일들을, 성공과 실패를 경험합니다. 존경받기도 하고 손가락질 받기도 합니다. 부자로 살기도 하고 가난하게 되기도 합니다. 이 모든 것은 과정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이 원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지금 결정되기를 원했습니다. 그 나라에서의 영광이 확증되고 변하지 않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께 묻습니다. “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행 1:6) 이제 모든 고난이 끝나고 영광만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이 원하는 답을 주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여전히 그들이 하나님 나라로 가는 과정 가운데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7-8) 그들은 하나님 나라의 회복이라는 결과를 원했지만 예수님은 ‘증인의 삶’이라는 과정을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은 여러분과 제게도 유효합니다.
4. 120년의 일상 오늘 본문은 주인공인 노아의 입장에서는 좀 억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6:13-21까지 심판과 홍수를 말씀하시고, 그에게 방주를 지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6장 22절 한 절을 지나서 7장 1절이 되면 벌써 홍수 7일 전입니다. 그러니까 6장 21절부터 7장 1절까지는 120년의 시간을 6장 22절 딱 한 절로 요약합니다. “노아가 그와 같이 하여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창 6:22) 그는 120년 동안 무엇을 했을까요? 성경은 노아의 120년을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겠습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노아에 대한 수많은 설교를 들었고, 성경 공부를 했습니다. 랭캐스터 밀레니엄 극장에서 연극을 봤고, 노아 영화도 봤습니다. 모두 공통적으로 상상하는 것이 있습니다. 노아 시대에 수많은 사람들이 그 시대를 죄악으로 규정하고 하나님이 내리실 심판의 때를 준비하는 노아에 대해 적대적일 것이라는 상상입니다. 하지만 의외로 성경은 그 사람들의 반응에 대해 무관심합니다. 다만 노아의 삶을 한 마디로 요약하고 있을 뿐입니다. 노아는 그렇게 살았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말씀에 순종해서 매일 방주를 만들고 또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언제까지, 얼마동안, 어떻게 말입니까? 무려 120년간의 매일입니다. 지향성이 있는 일상 - 견고한 삶의 목적이 있는 건강한 삶의 일상, 오늘 여러분과 제가 노아의 120년을 통해서 기억해야 할 구절입니다. 그 120년 동안 그는 매일 산에 올라서 매일 조금씩, 아주 조금씩 방주를 만들어갑니다. 120년의 어느 한 날과 그 다음 날이 주는 차이는 아주 작아서 느낄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서 그는 하루 하루를 건강하게 살아갑니다. 홍수의 때에 인류를 구원할 방주의 큰 그림을 보면서 오늘 나는 나무 한 그루를 베고 내일 나는 그 나무를 깎고 모래 나는 그 나무를 말리고 그 다음날 전에 말려두었던 나무를 이어서 갑판을 만듭니다. 그 모든 일은 하나님의 때를 준비하는 과정입니다. 내가 방주라는 결과를 만들기 전에 홍수가 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는 걱정하지 않습니다. 홍수와 방주에 대한 계시의 말씀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 어떤 결과도 하나님의 뜻 안에 있습니다. 다만 그의 삶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과정에 있을 뿐입니다. “ “그래, 오늘은 여기까지... 내일은 다시 내일의 한걸음을 걸으면 되니까... 오늘은 충분히 목적이 있는 최선을 다했으니까... 오늘 내게 허락된 시간에 내가 걸어야 할 걸음을 충분히 걸었으니까....”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제자들을 양육하셨습니다. 성공했을까요? 처절한 실패입니다. 예수님은 살아서 그들의 비겁함과 배반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낙심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가 이 땅에 증거되는 과정입니다. 연약하여 쓰러진 그들에게 성령을 보내시고 교회를 세우시고 세계 교회를 건설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어떤가요? 오늘날 세계 교회는 예수님의 사역의 결과인가요? 네, 결과이면서 동시에 과정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지어져가고 있습니다. 여러분과 저의 모습을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의 결과라고 하기에는 너무 부끄럽지 않습니까? 다만 우리는 지금 120년의 일상을 보내고 있습니다. 오늘의 삶을 하나님의 나라와 뜻이 이루어지는 과정으로 알고 건강하고 의미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세상에서의 성공이 나의 목적이 아니라 내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증거 되는 것이 목적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렇게 노아를 지나 아브라함을 지나 다윗을 지나 예수님의 시대를 지나 초대교회를 지나 종교 개혁의 역사를 지나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지나서 한걸음씩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 나라를 바라보는 견고한 믿음과 오늘을 최선을 다하여 살아가는 건강한 일상 - 방주를 짓는 노아의 마음으로 허락하신 삶을 지어가는 우리들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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